자기계발/메모장

모순형용법

하마사 2009. 7. 24. 17:12

못했지만 잘했어요


  영어에서는 꽤 자주 쓰이는 수사법으로 옥시모론(oxymoron)이 있다.영한사전에는 "모순형용법"이라고 해석돼 있는데, 서로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를 상치하여 상황을 강조하거나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법이다. 예컨대 오래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뉴욕 타임스의 헤드라인은 "작은 거인 죽다"였는데, 이것도 옥시모론의 일종이다. 즉 신체적으로는 작지만 권력이나 영향력으로는 거인이므로, 언뜻 보기에 서로 모순된 이미지이지만 함께 쓰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듣는 사람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부수적 효과까지도 있다.

  또 다른 예로 아인슈타인 같이 일반사람에게 익숙한 일에는 서투르고 자기 분야에서는 천재성을 발휘하는 사람을 "우둔한 천재"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다 아는 비밀"이라는 말도 사실은 모순형용법의 일례다. 수사법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소개하려고 혹시 예가 될 만한 표현을 접하면 적어 두기도 하는데,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예가 나왔다.

제목은 모르겠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어려움이 있는 한 가정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주는 프로였다. 이번주의 대상은 장애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인 진호였다. 나이에 비해 몸집이 아주 왜소한 진호는 여태껏 건강했으나 모계(母系) 유전으로 조금씩 장애가 와, 팔과 다리가 굽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선 아동정신과 의사가 늘 우울하고 말이 없는 진호와 면담을 했다. 몸이 불편해서 마음이 아픈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진호는 마음이 항상 답답하다고 대답했다.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자 진호는 집과 나무를 그렸다. 의사가 그 나무가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묻자 진호는 대뜸 "외로워요. 그래서 슬퍼요"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외롭고 슬픈 마음을 그림 속 나무에 투사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늘 집에만 있는 진호 부모에게 다른 부모와 같이 사회활동을 권고했고, 장애인인 진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직장 구하기에 나섰다. 또한 무언가 함께 가족활동을 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에 따라 그들은 모두 볼링장에 갔다.진호 아버지는 젊었을 때 볼링을 꽤 잘 쳤다고 했지만, 오랜만에 치는 볼링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번번이 열개의 핀 중에 대여섯개 쓰러뜨리면 잘하는 것이었다. 종합점수가 아주 낮게 나오자 진호 엄마가 민망한 표정으로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 잘 못했지, 안 그래?" 그랬더니 진호가 눈을 크게 뜨고 답했다.

"아뇨, 못했지만 아주 잘했어요!" 즉 객관적 점수는 "못했지만" 아빠를 사랑하는 자신의 주관적 점수는 "아주 잘했다"는, 진호의 "옥시모론"적인 답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지난주에 어떤 장애인단체 모임에 참석했을 때 사회자가 한 말도 바로 모순형용법이었다.

"우리는 볼 수 없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지만 들을 수 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다른 이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마음의 귀로 다른 이의 아픔을 듣고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배려로 친구도 생기고 성격도 많이 밝아진 진호를 보여주며 TV 프로그램은 끝났다.

진호의 훌륭한 모순형용법 구사가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다 진호 못지않은 모순형용법 구사가들인지도 모른다.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 기쁜 사람과 슬픈 사람들…. 모두 겉으로 보기에 많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 보충하고 도와가며 함께 어울려 그런 대로 한세상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세상이야말로 제일 좋은 모순형용법의 예이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 8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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