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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스타 성룡- 죽을 때 한푼도 안 남기겠다

하마사 2009. 1. 12. 19:39

 

[조선인터뷰] "필사적으로 벌고, 필사적으로 기부… 죽을 때 한푼도 안 남기겠다"
 
4000억원 전 재산 사회 환원 밝힌 액션 스타 成龍
         "한땐 나도 쇼핑광… 기부 알고부터 평온과 위안 얻어
          창고 6개에 가득한 사치품들, 이젠 처치곤란한 짐일뿐
          17살 외아들에게도 스스로 나가서 돈 벌라고 가르쳐"
 
베이징=이명진 특파원 mj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70년대 한국에서 영화촬영을 자주 했던 성룡은“아주 오래전, 한국의 한 고아원에 자전거 1000대를 기부하면서 한국과의‘기부 인연’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챈민정

배우 성룡(成龍·청룽·55). 올해로 연기 인생 47년째를 맞는 그를 중국인들은 '다거'(大哥·큰형님)라 부른다.

1편당 1500만달러가 넘는 출연료를 받는 할리우드 초특급 배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인들은 그가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사랑을 실천, 중국인의 몐쯔(面子·체면)를 세워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작년 말 "세상을 뜨기 전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 또다시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화를 찍지 않을 때는 자선활동을 한다"며 세상에 '기부 바이러스(virus)'를 퍼뜨리고 있는 성룡을 9일 베이징(北京)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당신이 기름 유출 피해를 입은 충남 태안 주민을 위해 1만달러를 기부한 사실이 지난달 뒤늦게 공개돼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당신의 기부는 언제 시작된 건가.

"오래전이다. 25~30년 전쯤 (홍콩의) 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린이 환자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는 거였다. 돈 벌고 유명해지는 게 인생 목표였던 시절이다. 하도 집요하게 청을 해서 (내키지 않았는데도) 갔는데 신기하게도 그후 아이들의 얼굴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뒤로 오늘은 이 병원, 내일은 저 병원을 찾게 됐고 마치 눈덩이 커지듯 미국에서, 일본에서 또 여기저기서 '성룡 자선기금'이 설립됐다. 10년 전엔 내 재산의 절반을 자선기금에 출연했다. 따지고 보면 기부는 빌 게이츠(Gates)보다 내가 선배다. 물론 그에 비하면 내 재산은 보잘것이 없지만."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성룡은 작년 8월 은행 잔고가 5억위안〈약 1000억원〉이라고 말했고 전 재산은 20억위안〈4000억원〉쯤 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돈을 벌고 또 필사적으로 기부한다. 돈을 벌면 회사, 가족들 그리고 내가 쓸 돈을 조금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기부한다.

―아버지가 재산을 몽땅 기부하겠다니 외아들 팡쭈밍(房祖名·17·가수)이 서운해 하지는 않던가.

"나는 늘 '아들이 능력이 있다면 내 재산이 필요치 않을 것이고 능력이 없다면 내 재산이 지금보다 훨씬 많더라도 다 탕진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해 왔다. 지금도 생각은 마찬가지다. 아들에게 '네 스스로 나가서 돈을 벌라'고 했다. 죽은 뒤 은행에 한 푼도 남지 않는다면 너무 홀가분하지 않겠나."

―젊어서부터 검약정신이나 기부가 몸에 밴 것인가.

"아니다. 한때는 나도 닥치는 대로 물건을 사들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 '기부'라는 숭고한 행위를 알게 됐고 거기서 평온과 위안을 얻게 됐다. 예전에 사들인 시계, 자동차가 6곳의 대형 창고에 그득 쌓여 있다. 이제 그 물건은 처치 곤란한 짐일 뿐이다. 그것들 역시 필요한 곳이 생기면 기부할 거다. 옷이나 신발은 이제 살 이유도 없고 사지도 않는다. (입고 있던 상의를 가리키며) 이 옷도 10년 전부터 입던 것이다."

―당신은 작년 쓰촨(四川) 대지진(5월 12일) 때 가장 먼저 1000만위안(약 20억원)을 기부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다른 유명인이 욕먹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그날 나는 베이징에서 영화 촬영 중이었다. 처음엔 별일 아닌 줄 알았다. 그날 저녁 학생 900명이 희생됐단 소리를 듣고 이튿날 바로 그 900명의 학생들과 가족들을 위해 1000만위안을 냈다. 그런데 피해규모가 상상외로 커지면서 사람들이 '류더화(劉德華·배우)는 10만위안밖에 안 냈다', '야오밍(姚明·NBA 농구선수)은 쥐꼬리만큼 냈다'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 친구들에게 '다거, 다거 때문에 죽겠습니다'라고 원망 많이 들었다. 그후 어떤 기업은 1억위안을, 다른 기업은 더 큰돈을 경쟁적으로 내놓더라.(웃음) 그러나 돈보다 중요한 건 젊은이들의 태도가 변한 거다. 인터넷에서 '야한 동영상'을 찾고 새 휴대전화 정보만 찾던 중국 젊은이들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내서 달려갔다."

―한국에도 김장훈씨를 비롯해 기부에 열심인 유명인들이 많은데 한국 유명인들과 함께 자선사업을 할 계획이 있나.

"계획 중이다(그의 매니저는 성룡이 올 5월 이전 한국을 방문해 가수 김장훈과 함께 고아원을 방문하는 것을 추진 중이라고 귀띔했다). 나는 자선과 기부가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생각한다. 쓰촨 대지진 후 한국과 일본 친구들이 중국을 돕겠다고 나서자 중국인들은 반한(反韓), 반일(反日) 감정이 쓸모 없는 것임을 알게 됐다."

―벌써 55세인데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혹시 보톡스?

"(양손 바닥을 두 볼에 대고 밖으로 밀면서) 내가 보톡스를 맞으면 아마 얼굴이 이렇게 넙적해질 거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면 첫째는 항상 즐겁게 사는 것, 그 다음엔 규칙적인 운동, 그 다음엔 뭐가 있을까…."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당신은 언제나 선인(善人)의 이미지다. 좀 갑갑하지 않은가.

"글쎄, 불편한 건 없다. 사실 난 어릴 때 문제아였다. 학교에서 매일 사고치는. 열다섯 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보니 주변엔 온통 조폭(組暴)들뿐이었다. 내가 16살 때 아버지(房道龍·지난해 작고)가 '다른 일은 다 해도 좋은데 마약하지 말고 흑사회(조폭집단)에 들지 말고 도박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을 평생 명심하고 따르고 있다. 내 영화에는 일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내 배역은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남이 버린 휴지를 주워서 휴지통에 버린다거나 하는 소소한 행위들을 하는데 내 영화를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의식한 것이다. 잠자리 장면이 없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다. 당신은 배우이자 영화사(Golden Way Films) 사장이다. 경영원칙이 있나?

"직원들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해고는 없다. 30여년간 딱 3명 해고했고 최근 10년 사이엔 한 명도 없다. '가족적 경영방식'이랄까. 손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우리는 함께 식사하고 대가족처럼 동고동락한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고맙게도 직원들 모두 나를 사랑하며 보호해주고 나를 위해 희생해주고 있다."

성룡은 누구


국내외 각종 인명사전에는 성룡(55)의 본명이 '천강성(陳港生)'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9일 인터뷰에서 성룡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네 원래 이름은 팡스룽(房仕龍)이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했다. 세관 관리를 했던 아버지는 법을 어겨 가면서 아이 둘 딸린 '여성 마약 운반책'을 눈감아 주었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고 성룡을 낳았다는 것. 이후 아버지가 팡(房)씨에서 천(陳)씨로 성을 바꾸면서 성룡의 이름도 바뀌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70년대 초 호주로 이민 갔던 부모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그가 일곱 살 때 홍콩 경극학교에 입학시켰다. 홍금보·원표 등이 경극학교 선·후배. '취권' '소권' '캐논볼' '폴리스 스토리' 등으로 홍콩 코믹 액션영화를 세계에 알렸고, 할리우드에 진출해 '러시아워' 시리즈, '턱시도'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을 모두 흥행시켰다. 100편에 달하는 영화를 찍었지만, 세 가지는 사절. 악역, 섹스 신(scene), 대역(代役). 인터뷰에서 그는 "열 손가락 다 부러졌고, 코뼈도 몇 번 나갔고, 갈비뼈도 여기저기 부러졌고, 내 치아는 남은 게 없다. 허리뼈가 밖으로 드러난 일도 있고…"라며 '부상의 역사'를 읊었다. 그는 현재 보험 가입이 불가능하다. 최근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코믹 액션영화 'The Spy Next Door'(2010년 개봉) 촬영을 마쳤다.

 

조선일보, 2009/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