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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

하마사 2009. 2. 17. 07:38
▲ 조선일보 DB

"나는 그동안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면서 사세요."

천주교 김수환(金壽煥·87·사진)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한 김 추기경은 10월 초 한때 호흡곤란으로 위독했다가 의식을 회복했지만 가슴에 꽂은 링거주사로 영양을 공급받아 왔다. 의료진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으니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김 추기경은 전날 갑자기 폐렴 증세를 보였고 이날 오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는 선종 2~3일 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로 고맙다"고 말했다.

"주여,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과 함께 영원을 향하여 걷고 싶습니다. /형제들을 위한 봉사 속에 /형제들을 위한 가난 속에/ 그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면서 /사랑으로 몸과 마음 다 바치고 싶습니다." ('나의 기도'·1979)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은 그가 엄혹했던 유신정권 말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은 자작시 그대로였다. 종교인 김수환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추기경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만남과 합일(合一)을 갈구한 소박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2001년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돌아보면 하느님께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사제가 될 때 택한 성경 구절이 시편 51편의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였는데, 지금 심정이 똑같습니다."라고 했다.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집무를 중단하고 피정(避靜·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을 떠났는데 하느님을 잘 만날 수 없어서 얼굴이 까맣게 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 단순한 종교지도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은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삼아 그들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격동이 몰아쳤던 지난 40년간 그는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이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에 반미친북(反美親北) 경향이 강해지는 점을 우려하고 북한의 인권 개선과 체제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파와 이념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혼돈을 겪던 국민은 언제나 김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해 6월, 86회 생일을 맞아 "빨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지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입원 후에는 문병 온 사람들과 매일 병실에서 미사를 올리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선종하시던 날은 말씀이 거의 없으셨고, 특별히 남긴 유언은 없다"며 "선종 10분 전까지 의식이 뚜렷했고 고통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기증을 약속했으며, 선종 직후인 이날 오후 7시2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 수술을 마쳤다. 김 추기경이 남긴 눈은 두 사람에게 시술할 예정이다. 김 추기경의 유해는 이날 밤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본당에 마련된 유리관 안에 안치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조문객을 위해 명동성당을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개방할 예정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20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 주재로 장례미사가 열리며 장지는 용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직자 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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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시절 '민주화' 중심… 국민들은 그의 입을 쳐다봤다

 

● 한국현대사를 꿰뚫은 그의 족적
가난한 옹기장수 막내… 박정희 정권 독재 비판
6·10땐 경찰진입 막아

 

  

한국 천주교계의 큰 별,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 졌다. 16일 선종(善終)한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원로였다. 1970년대 이후 우리 국민은 천주교 신자 여부를 떠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버릇처럼 그의 입을 쳐다봤고, 그의 한마디는 사회적 파급효과를 냈다. 그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BOVIS ET PRO MULTIS)'가 곧 그의 삶이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옹기장수나 숯장수는 주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위해 택한 직업이었다.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강권 덕분이었다.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에 진학한 그는 당시 교장이던 장면 박사의 추천으로 일본 상지대로 유학을 떠났지만 태평양전쟁에 학병으로 끌려가 전쟁터에서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학업을 마치고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사제로서 그의 일생은 어찌 보면 탄탄대로였다. 5년간 안동·김천본당의 주임사제, 교구장 비서로 일한 그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64년에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에 임명됐다. 이어 1966년엔 주교로 수품돼 신설 마산교구장에 오르고, 2년 후엔 대주교로 승품돼 서울대교구장이 된다. 다시 1년 후인 1969년엔 만 47세의 나이로 한국 최초의 추기경에 서임된다. 그의 추기경 서임은 사제 수품 후 18년 만의 일이었다.

성직자로서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지만 김 추기경은 지난 2005년 발간한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나는 늘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이후 그의 삶은 한국 사회에 '추기경'이란 어떤 자리이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또 오늘날 500만명 이상의 신자를 확보한 현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닦았다.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김 추기경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 1971년 성탄절 자정미사에서 그는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TV로 전국에 생방송되는 미사였다. 1972년 8월 9일엔 광복절을 앞두고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끌려 갔을 때는 박 전 대통령과 면담, '풀어 달라'고 담판을 지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이 시절 그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부(代父)'로도 불렀다.

엄혹한 시절 종교 지도자로서 할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천주교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게 천주교계 안팎의 평가다. 그러나 그는 "나는 젊은 신부들이 자꾸 시국기도회를 여는 것을 말리는 편이었다"면서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6·10 항쟁 때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누가 나에게 '그때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 아무것도 안 했느냐'고 되물으면 '아니다. 나름대로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다"고 솔직히 토로하기도 했다.
▲ 16일 서울 명동성당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유해가 안치된 가운데, 정진석 추기경(사진 맨 오른쪽 앞)과 신부들이 장례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 2000년대 들어 한때 자신이 지원했던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05년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 함세웅 신부 등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분'이란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너무 칭찬만 듣고 살아서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그런 비판을 한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받아넘기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절이건 민주화 이후 정권이건 권력자들은 김 추기경의 발언을 불편해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어제는 자신을 지지하던 쪽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김 추기경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난 2005년 동국대 특강에서 자신의 색깔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조금 보수 쪽'이라고 답했다. 그는 "우리 헌법에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를 기틀로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통일은 바른 일이 아니라고 본다"며 "어떤 방식으로라도 통일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보수"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쏠린 관심과 기대, 오해에 따른 부담 때문에 그는 "교구장 시절 이후 의사가 처방해준 약에 의지해 잠들 때가 많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 길을 제시해온 그는 1969년 추기경 서임 이후 40년 만에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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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곁에 있었던 분… 가톨릭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지도자"

외신들 "한국사회에 인권·정의 일깨운 분"
장기기증 서약따라 선종 직후 안구 적출

 

 

 16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 소식을 접한 정치권 등 각계 인사와 신도들은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을 찾아 고인을 애도했다. 외신들은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급히 전하며 "가톨릭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고 소개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신앙인의 표상이며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큰 족적을 남기신 추기경님의 영전에 온 국민과 함께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김 추기경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때 국민과 동행한 정신적 지도자였고, 이념적 중간이 아닌 정신적 중심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추모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김 추기경은 우리 현대사의 큰 별이었고 어두웠던 시절에는 빛이었으며 그분의 삶은 사랑이었다"고 강조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도자가 남긴 말씀이 우리 사회가 바르게 가는 지침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애도했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이날 오후 9시30분쯤 김 추기경의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김 추기경의 아호를 딴 옹기(甕器)장학회 회장인 한 총리는 "항상 큰 나무, 큰 그늘, 큰 별이셨는데 오랫동안 편찮으시다 돌아가셔서 애석하다"고 밝혔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오후 10시30분쯤 빈소를 찾아 "어른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답답하고 슬프다"며 "추기경이 살아오신 삶이 많은 사람에게 잘 전해져 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김 추기경의 조카와 증손녀 등 가족과 수녀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망자에 대한 가톨릭 의식인 연도 기도를 마친 뒤 오후 10시쯤 김 추기경의 유해를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으로 옮겼다. 명동성당에서 추모 기도를 올렸다는 연규선(64)씨는 "추기경께서 항상 약자와 어려운 쪽에 서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고, 이영순(57·주부)씨는 "천주교의 대들보이자 큰 어른을 잃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서울대교구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조문도 받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AP통신은 "김수환 추기경은 군부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전했으며, 로이터는 "김 추기경은 한국 사회에 인권과 정의의 가치를 일깨웠고, 정치적인 동기보다는 가톨릭 정신에 따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AFP통신도 김 추기경의 선종 사실을 긴급 기사로 전하면서 "김 추기경은 250만 한국 가톨릭 신자의 리더이자 한국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가톨릭 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존경받던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 2009/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