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발레리나 강수진

하마사 2008. 12. 23. 07:07

 

[2008 겨울 희망편지] [8] 발레리나 최고의 순간에 금이 간 뼈…

 

외부 요인으로 빠진 절망

"끝났다" 생각하면 진짜 끝 포기 않고 기다리면 再起
슈투트가르트=강수진·발레리나

 

제게는 발레가 전부이고, 그것을 다 빼앗길 것 같은 시련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를 저는 '블랙홀'이라고 부릅니다. 스티븐 호킹이 말한 그 블랙홀 말입니다. 그 어두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공포 때문입니다. 최악의 블랙홀은 1999년 9월에 찾아왔습니다. 그 블랙홀은 결국 저를 무대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운명은 얄궂지요. 그해 봄 저는 발레리나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여성 무용수상을 받았습니다. 그 영예를 안고 첫 해외 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 걷기도 힘들 정도의 통증이 찾아온 겁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어떻게 참았는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제 왼쪽 정강이뼈를 촬영한 사진이 앞에 있었습니다. 선명한 금이 보였습니다. 1995년 다쳤던 부위인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또 발레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쉰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치료를 미룬 채 춤을 추다 병을 키운 것이지요.

힘들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상으로 춤을 못 추는 시간 동안 "무대로 다시 돌아오기는 어렵겠구나"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옆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라"고 숱하게 얘기했지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기하지 마라"는 말은 크게 들렸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지금의 남편입니다.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반짝 빛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발레리나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카락부터 잘랐습니다. 재기의 결심을 한 것이지요.

시간은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발레를 배운 뒤 1년 이상 쉰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아마도 마지막일 겁니다. 인내심이 없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지만 완전히 주저앉히는 것은 자기 자신인 것 같습니다.

마침내 저는 2000년 11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복귀했습니다. 첫 공연이 끝나고 관객의 박수를 받는 순간 저는 블랙홀을 빠져나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제 몸에서 제가 가장 믿는 게 어딘 줄 아세요? 저를 블랙홀로 몰아넣은 왼쪽 정강이뼈입니다. 뼈가 더 강해졌는지 다시는 깨질 수 없는 곳처럼 느낄 정도입니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 튼튼하지요. 견디면 더 강해진다는 믿음을 준 정강이뼈입니다. 그 시련은 제게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남았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독일을 비롯해 유럽도 경제가 안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게 마련이잖습니까. 시간이 약입니다. "포기하지 말자"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을 품고 있으면 블랙홀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1982년 중학교 때 유학을 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 그랬고, 19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하고 적응하지 못해 울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살게 마련이라고 저는 늘 말합니다. 발레와 삶은 다르지만 정신적인 측면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금 간 정강이뼈가 제게 알려준 작은 교훈을 이제 여러분께 드립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조선일보, 200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