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학교, 일본 상지대, 가톨릭대를 차례로 다니면서도 신학생 김수환은 몇 차례나 그만두려 했다. "신부가 되기에 부족하다" "독립운동을 하고 싶다"고 선배 신부에게 털어놓았다. 다가오는 젊은 여인 때문에 깊이 고민도 했다. 신학교 문에 들어선 지 18년 만에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그는 "보통사람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주님께서 사제의 길만을 보여주시니 그 부르심에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이었지만 김수환은 46세에 서울대교구장, 이듬해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돼 한국 천주교의 기둥으로 섰다. 숨막히는 독재 아래 살던 1970~80년대엔 우리 사회의 등불이었다. 6월항쟁 땐 시위대가 집결한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하자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막았다. 민주화가 이뤄진 1990년대 이후엔 친북좌파에 대한 우려를 거듭 밝혀 '중용(中庸)'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런 김수환 추기경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얹혔다. 86세인 추기경은 지난 7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10월 초 한때 호흡곤란으로 위독했다가 의식을 회복했다. 지금도 가슴에 꽂은 링거주사로 영양을 공급받고 있다. 추기경은 의료진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으니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해놓았다.
▶김 추기경은 그제 문병 온 이에게 '순교자 찬가'를 불러줬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1970년대 천주교 민주화운동 때 단골로 불렸던 천주교 성가다. 교구장으로서 "순교자의 영성(靈性)으로 살자"고 강조했던 추기경이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칼 아래 스러져 백골은 없어도/ 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뒷부분은 추기경이 힘에 겨워해 주위 사람들이 받아 불렀다. 추기경은 왼쪽 귀가 들리지 않지만 매일 병실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여전히 만인을 위해 기도한다. 노(老)추기경이 투병 중에도 간구하는 생명과 사랑의 메시지가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조선일보, 200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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