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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칼럼] 기적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리

하마사 2008. 12. 23. 06:55

 

[류근일칼럼] 기적(奇蹟)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리
 
한국인은 원래 기적의 민족 이 시련 거뜬히 이겨내기를… 
          25년 연재한 칼럼 마치며 간절히 소망하고 기원합니다
류근일·언론인

 

 

연말 정국이 해머와 전기톱으로 몹시 어지럽다. 경제공황의 먹구름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기도 하다. 내년에는 실업자 수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예보도 있다. 한국, 한국인들은 또다시 시련과 역경의 시기를 맞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다. 좌절할 이유도 없다. 한국, 한국인들은 원래가 폭풍을 뚫고 기적을 이룬 나라요 국민이기 때문이다.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부터가 우선 기적 같은 사태였다. 북쪽에는 스탈린이 지시하는 계급혁명이 착착 진행되고, 남쪽에는 그에 호응하는 통일전선이 좍 깔린 난국 속에서도, 당시의 지도자들이 우익독재 헌법 아닌 순수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니고 무엇인가? 이 헌법 덕택에 오늘의 우리의 민주화가 가능했고 산업화가 가능했다. 그 헌법 정신이 아니었다면 "유신체제 물러가라!" "산업화를 넘어 선진화로!" 같은 구호들이 발붙일 땅이 없었을 것이다.

6·25 남침 때 부산까지 밀렸다가 다시 살아난 것도 기적 그 자체였다.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작심하고 밀고 내려왔을 때 제3자들로서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도 있었다. 그랬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은 없다. 민주화도 없고 산업화도 없다. 그런데 트루먼, 유엔이 발 빠르게 움직였고, 소련도 한국 참전을 결의하던 유엔 안보리에 불출석하는 실책으로 대한민국의 소생을 도왔(?)다. 모두 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국민소득 80달러, 문맹률 70%, 농업 의존도 80%의 최빈국(最貧國) 한국이 오늘의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도약한 것도 기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주변부는 계속 주변부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종속이론가들을 학문적으로 파탄시킨 '예외'의 나라, 예외의 국민이 바로 한국, 한국인이었다.

1950년대 말, 어느 외국인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썼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 지식인, 시민, 언론은 4·19 혁명으로 그 기사를 보기 좋게 엿 먹였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제헌정신은 그 후로도 1987년의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계속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워냈다. 민주화에서도 한국, 한국인은 기적 같은 '예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기적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체념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캔 두(can do) 정신'이라 할까―. 이 정신은 자칫 역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유달리 격렬했던 것도 이 '악착스러움'이 너무 강했던 탓이다. 그러나 교육, 관행, 사회 분위기를 '맹목적 전진'에서 '성찰적 전진'으로 바꿔 나갈 수만 있다면 한국적 '캔 두' 정신은 더 큰 성취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건국 직후 어느 20대 국군 연대장은 무장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세(勢) 불리해지자 포로로 잡히느니 권총자결을 택했다. 그 직전에 그는 한 편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남아(男兒)가 20세라 분발하여 일어날 때이니/관 속에 들어간 뒤/청사(靑史)의 평(評)을 기다리리라."

60~70년대에 휴가도 반납한 채 수출고를 올리려고 정신없이 뛰었던 어느 대기업 종사자는 이런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나는 새벽부터 밤까지 수출전선에 온몸을 던졌다."

민주화 운동 때 어느 시인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가난한 이웃들과 똑같이 고통받으며 미래의 축복받는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 세대의 이 모든 열정들은 오늘의 자유민주 대한민국으로 녹아들었다. 이제부터는 차세대의 몫이다. 체념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흠결을 성찰할 줄도 아는 현명한 차세대를 기대한다.

'류근일 칼럼' 25년―. 독자 여러분과 함께한 그 세월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행복할 때 이만 접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조선일보, 200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