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산울림

하마사 2008. 11. 17. 07:09

          "산울림, 이제 마침표 찍어야지…"

전집 세트 내는 김창완 "밴드 산울림 더 이상 활동 안해"
"막내 죽은 후 매일 '환청' 들어
우리는 형제 밴드… 다른 사람 끼면 산울림 아니다"
한현우 기자 hwh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산울림 3형제의 활동은 사실 매우 짧았다. 1977년 데뷔 이후 31년간 산울림은 사실상 김창완이었다. 그러나 김창완은“이제 산울림과 헤어지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제 바람은 멈추었다. 모든 색은 합쳐져 단 하나의 작고 검은 마침표가 되었으며 모든 빛은 합쳐져 수억 겁의 미래로 가버렸다… 산울림, 그들의 노래는 화석이 되었다."

25일 발매될 산울림 전집 박스세트 소책자에 김창완(54)은 그렇게 썼다. 1977년 '아니 벌써'로 등장해 97년 13집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까지 음반 13장과 '개구쟁이'를 비롯한 동요집 4장을 낸 산울림에그는 종언(終焉)을 고했다. 이유는 단 하나. 막내 김창익(지난 1월 작고)이 없기 때문이다. "(막내가 죽은 뒤) 매일 조종(弔鐘) 소리를 환청으로 들었다"는 그를 만났다. 산울림의 맏형이자 가장 큰 산이었던 그는 "산울림으로는 더 이상의 작업은 없다"고 했다.

―다른 드러머와 산울림 활동을 할 수도 있지 않나요.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끼면 산울림이 아니에요. 나는 지금 산울림과 헤어지고 있어요. 그것이 산울림에 대한 나의 애정과 경의의 표현이에요."
▲ 전성기때 산울림 모습. 왼쪽부터 김창훈 창익 창완.

그는 오래 전부터 "산울림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리하려면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지난 1월 캐나다에 살던 김창익이 사고로 먼저 떠난 것이다.

―산울림에 영향받은 뮤지션들이 무척 많습니다.

"과학자나 정치가, 성자만이 남에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걸 음악이 나한테 가르쳐줬죠. 내가 은행원이 됐다면 지금 인생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찾았겠죠."

김창완은 1977년 은행 입사시험과 산울림 1집 레코딩이 같은 날 겹쳤을 때 "시험은 또 볼 수 있지만 레코딩은 인생에 한 번뿐"이라며 음악을 택했다.

―그 순간의 결정이 무척 중요했던 거네요.

"순간요? 그전에 다른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온 거죠. 순간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섯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김창완은 음악과 아무 상관없는 유소년기를 거쳤다. 그가 기억하는 음악적 사건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최희준의 '하숙생'을 듣고 가사가 슬퍼 밤새 펑펑 운 것"뿐이었다.

그는 17세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때 기타와 처음 대면했다. "교본을 사서 도레미파를 공부한 뒤 처음 쥔 코드가 'D'예요. 그 화음에 매료돼서 장독대에 올라가 두 시간 동안 D코드만 쳤어요." 그리고 3개월 후 그는 처음으로 곡을 썼다. 산울림 5집에 실린 '왜! 가'가 그 노래다.

―산울림 음악은 당시에 엄청난 파격이었는데요.

"우리 음악은 우리의 어른이 들었던 가요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어요. 산울림의 모태가 우리 가요에 있는 거죠. 음악의 소재, 가사, 작곡 모든 면에 그런 반발이 담겨 있어요."

―'아니 벌써'만 해도 당시 사회에 반어법으로 저항했다는 해석이 많잖아요.

"그런 건 다 '뻥'이에요. 그때 열 몇 살짜리들이 뭘 안다고 저항이에요. '아니 벌써'는 심의에 걸리는 바람에 전부 원래 가사의 반대말로 바꾼 거예요. 그런데 그 멜로디가 폭력적이었어요. 젊은이들을 세게 때렸죠. 긴 세월 지나고 보니까 그 가사의 은유가 그 노래의 생명력이 된 것 같아요."

―'내게 사랑은 너무 써'가 담긴 8집을 가장 싫어하고 히트곡이 없는 9집을 가장 좋아한다면서요.

"8집은 가장 창피한 음반이에요. 너무 감성을 팔아먹었죠. 그런 유혹에서 벗어난 게 9집이에요. '저주받은 걸작'이라고들 하는데, 뭐, 단 한 장도 안 팔린 것 같았으니까."

―산울림은 돈을 못 벌었다는데 사실인가요.

"계약서도 한 장 안 썼고, 음반이 많이 팔려도 돈을 한 푼 못 받았죠. 행사 출연료가 수입의 전부였는데 그나마 밤무대 출연은 안 했으니까 돈을 벌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젤소미나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잠파노였어요(영화 '길'에 나오는 '젤소미나'는 학대당하는 인물, '잠파노'는 가혹한 인물이다)."

―밤무대에는 왜 출연 안 했나요.

"1집 내고 처음 찾아본 단어가 '화류계'였어요. 그때 어느 건달 같은 매니저가 '너희들은 이제 화류계로 온 거야' 하더라고요. 그 이후로 돈 많이 준다는 행사는 다 거절했죠. 화류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김창익씨가 생전에 큰형을 '폭군'이라고 했다는데요.

"막내가 나를 폭군이라고 했지만… 얼마나 거칠게 (삶의) 문을 닫았어요. 얼마나 거칠게 나와 헤어졌습니까." 그의 말투가 무거워졌다. 그는 이어 "내가 방송국 가는 길에 막내 회사가 있었잖아…" 하면서 눈시울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매일 아침 김창익이 근무했던 서울 양평동 대우자동차 사옥 앞을 지나 서울 목동 SBS 사옥에 출근, 라디오를 진행한다.

―최근엔 가수가 아니라 배우와 DJ로 더 유명합니다만.

"나는 가수예요. 11년 만에 음반을 내지만(그는 산울림 전집과 함께 '김창완밴드' 1집을 낸다). 지금은 기부하는 마음이 아니면 음반을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산울림 때문에 음악을 하게 된 후배들에게.

"진실된 음악을 하라고 권면하고 싶어요. 대중들은 음악을 원하지 않아요. 목숨을 원한다고요. 목숨 걸고 하는 음악만이 살아남는 거예요."

 

 

조선일보, 200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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