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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누구인가

하마사 2008. 11. 6. 09:24

 

시련이 키운 '검은 케네디'… "미국에 빚 갚겠다" 정치의 길로
● 오바마 누구인가
흑백혼혈로 태어나 외조부모 슬하에서 성장
고교시절엔 정체성 고민으로 마약 손대기도

컨설팅회사 다니다 빈민 위한 지역활동 시작

 

이혜운 기자 liety@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소년에게 10대 시절은 누구나 힘든 시기다. '버락(Barack)'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소년도 그랬다. 그는 하와이의 명문 사립 푸나후 스쿨의 몇 안 되는 흑인 학생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처럼 부자도 아니었고, 부모와 떨어져 외조부모의 손에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는 케냐 출신 하와이 유학생이었다. 수업을 같이 듣던 17세의 백인 처녀 앤(Ann)과 사랑에 빠져 마우이섬으로 도망가 그를 낳았다. 하지만 두 살 때 아버지는 집을 떠나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났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케냐로 돌아가 버렸다.

소년은 학교에서 아버지가 '케냐의 왕자'라고 허풍을 쳤다. 이후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러 요양차 하와이에 온 허약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보고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그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살았다.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일 때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Lolo)와 재혼한 뒤 그를 데리고 자카르타로 갔다. 어머니는 새벽 4시면 그를 깨워 영어 공부를 시켰다. 언젠가는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바마는 "나는 인도네시아 아이이자 하와이 아이로, 흑인 아이이자 백인 아이로 자랐다. 그 과정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고교 시절엔 '아버지 없는 흑백 혼혈'이라는 출신 배경 때문에 정체성 고민에 빠져 마리화나와 코카인에까지 손을 댔으나 결국 극복했다.

교환학생으로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다닐 때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하루에 4.5㎞씩 달리고 일요일에는 금식을 했으며 삶의 기록을 남겼다. 책도 많이 읽었다. 수업이 없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걸어서 도시 이곳 저곳을 다녔다. 이때의 생활은 그의 지적 수준을 급속히 향상시켰다.

그는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승진도 했고 비서도 생겼으며 은행의 잔고도 제법 쌓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관용과 평등을 지키고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 편에 서라." 그는 결국 빈민을 위한 지역활동을 하러 시카고로 떠났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성장하면서 전형적인 정치인 코스를 밟는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진보적 미국과 보수적 미국이란 없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라는 명연설을 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2006년 그는 미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담대한 꿈'을 실현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연설할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고, 민주당 동료 의원들이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발벗고 나섰다. 참모인 데이비드 액설로드(Axelrod)는 "지지자들은 늘어났지만 그 역시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 말했다.

그는 종종 선배 정치인들에게 자문했다. 가장 신뢰한 사람 중 한 명이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톰 대슐(Daschle·2005년 은퇴)이었다. 톰은 "머뭇거리는 그에게 저는 단호하게 말했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은 버리라고. 상원에 오래 있을수록 '그 표결에서는 왜 찬성했나?'따위의 질문에 변명할 게 많아진다고요"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친한 친구들과 보좌관들을 불러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데 대해 떠봤다. 대선 출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 중엔 성공한 흑인 친구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아직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는 안됐어" 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내가 그런 선입견에 도전하겠어" 라고 답했다.

2001년 오바마는 한 인터뷰에서 부모 얘기를 꺼냈다. "그 분들은 이 나라에서 제 이름이 성공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제게 아프리카 이름 '버락'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더 큰 미국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과 제가 이전에 이 땅에 왔던 모든 이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버락은 이제 그 빚을 짊어진 채 더 큰 미국을 위해 백악관으로 들어간다.


     

물에서 목숨 건진 순간도 웃던 오바마

웃으며 축하 집회 들어서는 오바마

방탄 유리 사이에 두고 지지자 만나다

 

 

조선일보, 200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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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美선택] 오바마는 누구인가

 

“우스꽝스러운 이름에 믿어지지 않는 인생을 산 야윈 소년”이 품은 “담대한 희망”이 미 전역에 울려 퍼졌다.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 4일(현지시간) 실시된 대선에서 흑인 최초로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등극,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믿을 수 없는 변화”를 이뤄냈다.

오바마가 흑인 대통령으로 거듭나기까지의 그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장편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1961년 8월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는 아랍어로 ‘축복받은 자’를 뜻하는 이름과는 달리 그다지 축복 받은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다.

미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와 케냐 출신 유학생인 흑인 아버지는 오바마가 태어난 지 2년 만에 결별했으며, 오바마의 어머니는 이후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 1966년 오바마를 데리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한다.

그러나 재혼도 곧 파경을 맞고 1974년 오바마는 하와이로 돌아와 그때부터 외조부의 밑에서 자라게 된다.

어린 시절의 잦은 환경 변화, 인종차별로 인한 상처 등 청소년 시절 한때 술과 마약을 탐닉하기도 했던 오바마는 그러나 곧 자신의 ‘담대한 희망’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유년 시절의 방황은 오늘의 버락 오바마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의의 성장 경험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포용할 줄 아는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갖추게 했다.

또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양육하기 위해 한때 푸드 스탬프(빈민구호용 식료품 쿠폰)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아들의 교육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교육열도 오늘의 오바마를 있게 했다. 오바마는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매일 새벽 4시면 오바마를 깨워 직접 공부를 가르쳤던 것을 지금도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한다.

이와 같이 어머니와 외조부의 정성어린 가르침으로 오바마는 동부의 하와이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 스쿨에서 고교 과정을 마치고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털 대학에 입학한다. 오바마는 이 무렵 인종 분리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하는 등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결국 2년 후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하게 된다.

1983년 학부를 마친 오바마는 하버드대 법과 대학원에 입학, 그야말로 최고 엘리트의 수순을 밟게 된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104년만에 흑인으론 처음으로 권위 있는 법률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으로 뽑혀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91년 법과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오바마는 대형 법률회사들의 수 많은 러브콜도 마다 하고 시카고로 돌아가 법률회사 마이너 반힐 앤 갈란드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소수민족과 저소득층 시민 등을 위해 일했고, 시카고 대학에서 12년 동안 헌법 강좌를 맡기도 했다.

오바마는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후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록 2000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해 실패하기도 했지만, 2년 후에는 주 상원의원 3선에 성공한다.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오바마에게 2004년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시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기조연설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이곳에서 오바마는 법학자다운 논리로 자신의 사상을 풀어간 자서전 제목과 같은 '담대한 희망'을 주제로 연설을 쏟아내 일약 정치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나의 이야기가 가능한 나라는 지구상에는 없다”며 “자유주의 미국과 보수주의 미국은 없다. 단지 통합된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만이 있을 뿐이다. 흑인과 백인, 라틴계, 아시아계 미국인은 없다. 단지 통합된 미국만이 있을 뿐이다”며 미국이 계층과 정치, 인종을 잇는 교량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이 연설은 미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미국은 하나”를 외치는 이 연설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무명 정치인은 그해 11월 일리노이주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올해 1월 첫 경선지였던 아이오와 코커스를 필두로 2월 수퍼화요일까지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뉴욕 주 상원의원을 밀어내고 흑인 대통령 탄생에 시동을 건 오바마는 마침내 지난 8월27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 11월4일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이제 전 세계인들은 하나의 통합된 미국을 건설하고 싶다는 흑인 소년의 담대한 희망의 드라마가 어떻게 펼쳐지게 될 지 숨죽여 바라보고 있다.

정옥주기자 channa224@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