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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한국의 생명력' 추구해 온 사진가 최광호

하마사 2008. 11. 8. 09:59

 

[Why] "대한민국 모두를 다 벗기는게 제 소원입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35년간 '한국의 생명력' 추구해 온 사진가 최광호


"부모님 설득해 알몸 사진… 미친 놈·변태 소리도 숱하게 들어"
'가족'을 화두로 20년째 파격 실험 친할머니·장인 임종 순간 촬영해

  

40 넘은 아들이 술에 취해 노모(老母)의 가슴을 주무르더니 카메라를 들이댔다. "엄마, 옷 좀 다 벗어봐." 대경실색한 어머니가 '내 아들이 사진 한다더니 드디어 미쳤다'고 한탄하다 응수했다. "내 가슴은 네 아버지 거다. 못 보여준다." 아들은 못마땅한 듯 입맛만 쩍쩍 다셨다.


얼마 뒤 모자(母子)가 함께 아버지가 묻힌 공동묘지를 찾았다. 거기서 아들은 괴상한 논리를 댔다. "땅 속의 아버지께 아버지 것을 돌려주세요." 고민하던 어머니는 남들이 흘끔거리는 앞에서 옷을 벗었다. 사진가 최광호(崔光鎬·52)의 '가족'시리즈 명편(名篇) 한 컷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생전에 의사였던 아버지도 벗겼다. 아버지가 "어릴 적 함께 목욕할 때 자주 보지 않았느냐"고 거부하자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낳은 아버지의 몸을 이 순간에 샅샅이 기록하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아버지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모든 것을 훌훌 던졌다.
▲ 사진가 최광호의 작업실은 100평이 넘는다. 그 넓은 공간은 그를 좋아하는 후배가 빌려줬다. 작업실에는 포토그램(photogram)뿐 아니라 필름과 조명기구부터 잡초와 화분, 중국 요릿집에서 공짜로 준 성냥과 찌그러진 커피 캔이 뒤섞여 있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최광호는 20년째 '가족'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해왔다. 자기는 최고라고 주장하고 세상은 그를 한국의 10대 사진가라 평한다. 그의 작품에는 알몸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임종(臨終) 직전 넋이 빠져나가는 할머니와 장인, 장모, 누나의 눈빛과 숨결도 필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광호는 27살 때 이미 유명해진 사진가다. '한국의 발견'이라는 11권짜리 대작(大作)의 제작책임을 그가 맡았다. 10대 때는 인천과 백령도, 대청도, 강릉 일대의 풍광과 인간을 모아 '심상(心象)일기' '바다기행' 같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 땅의 산하(山河)와 사람을 35년간 쫓던 나머지 스스로 알몸이 되고 마침내 모든 사람의 옷을 자유자재로 벗기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그다. 그는 희대의 변태(變態)인가, 알고 싶은 것을 향해 무작정 돌진하는 열정(熱情)의 예술가인가.

최광호가 말했다. "미국·일본에는 세계적인 사진가가 많다. 우리는 그런 수준이 안 된다. 테크닉과 감각에는 차이가 없지만 '한국적인 것'을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목표는 한국적인 생명력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가족은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 20대부터 포토그램 작업을 해온 사진가 최광호가 4일 부천의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통해 작품세계를 이야기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작가를 두고 제일 잘 알려진 이야기가 결혼식 도중 주례(主禮)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사건이지요.

"주례를 맡은 스승 육명심 선생을 골려 주려 한 거지만 사진은 그때 아니면 못 찍는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지요. 양복 주머니에 미리 넣어둔 롤라이 카메라를 주례사가 시작되자마자 꺼내 찍기 시작했어요. 선생이 당황하더니 말을 더듬었지요. 그 일로 사모님께 혼났습니다."

―본인이 주례할 때는 신랑 신부를 찍었지요?

"40대에 처음 주례를 맡았어요. 그럴 나이가 아닌데 원래 예정됐던 분이 전날 술에 만취돼 쓰러져 얼굴에 상처를 입었어요. 하기는 해야겠는데 할 말은 없어 사진을 한참 찍어주고 '앞으로 부부가 나처럼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라'고 한마디 한 뒤 주례를 마쳤지요."

―남의 귀한 행사를 망친 것 아닌가요.

"세상이 바뀌었는지 그게 또 재미있대요. 주례 요청 안 받으려 한 짓인데 오히려 주례 요청이 많이 들어와요. 제 나이에 주례 16번 했으면 많이 한 거지요."

―에피소드가 많더군요. 차가 달리는 광화문 네거리로 달려들었다든가, 이화여대 앞 육교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졌다든가…. 그게 다 사진에 대한 열정 때문입니까.

"이대 앞 육교에서 뛰어내린 건 사진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당시 사귀던 여자에게 딱지맞고 화가 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니까요."
▲ 최광호 작가가 포토그램 전시회를 올 봄 가졌다. 그는 포토그램을 할 때마다 암실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지금 국내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포토그램을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최 작가가 유일하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예술가들에게는 그런 유의 이야기가 하나 둘씩은 있는 것 같아요. 괴짜만 예술가가 되는 겁니까, 예술이 괴짜를 만드는 겁니까?

"가끔 '형, 변태 아니야?'라고 하는 후배들이 있어요. 저는 평범해지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생각을 하다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습관을 버릴 수가 없어요. 충동이 오면 그게 뭘까 하고 알고 싶은 것에 다가갑니다. 그런 게 남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나 봐요."

―남을 꼭 벗겨야 사진이 됩니까.

"벗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지요. 벗으면 솔직해지고요. 그래서 사랑하는 남녀가 벗는 거지요. 저는 솔직한 상태에서 삶과 죽음의 실체를 확인할 때 비로소 생명을 느낍니다."

―자주 벗기다 보면 도(道)가 트지요? 몇 명이나 벗겨봤나요. 1만명? 5000명?

"다 자발적으로 벗는 겁니다. 강제로 한 적은 없는데…, 어휴, 문형 왜 그래."

―한국적인 생명력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초가집이나 한복 입은 사람 찍는 게 한국적인 생명력인 것은 아니지요. 형체일 뿐 본능(本能)과는 다릅니다. 얼렁뚱땅, 술집에서 갑자기 폭발적으로 싸우는 것, 대충하는 것 같지만 기발하고 품위 있는 것이 우리의 본능 아닌가 싶어요. 가족 시리즈를 2~3년 안에 끝내면 붙어보고 싶은 게 그런 것입니다."

―친할머니와 장인이 임종할 때 카메라를 들이댄 것도 가족을 찾는 작업의 일환인가요.

"친할머니는 임종 때뿐 아니라 오랜 세월을 촬영했어요. 1995년에 장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보니 숨이 끊어질 찰나였어요. 카메라를 들고 앵글을 잡는데 혼(魂)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주변에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미친 놈 소리도 들었지요. 남들은 뭐라 해도 저는 선후배들에게 '나는 사진가로서 해 볼 거 다 해봤다'고 자랑하고 다녔어요. 죽는 장면을 목격한 것보다 행복한 게 어디 있느냐고요. 그런데 나쁜 일을 자랑할 게 아니더군요."

―벌을 받았군요.

"1996년 8월 14일부터 16일이 연휴(連休)였어요. 동생(최순호)과 함께 처음으로 청평으로 가족여행을 갔어요. 그 다음날 동생이 익사했어요. 청평 가기 전 화도 휴게소 화장실에서 동생과 소변보며 나눈 대화가 마지막이 됐어요. 동생은 '형, 집안 걱정 말고 좋은 작품 열심히 남기라'고 했어요. 동생은 시인(詩人)이었지만 사업하며 돈을 많이 벌었어요. 제가 유학 갔을 때 장남 노릇도 했고 제 학비도 보태줬어요."

―그 이후 10년 넘게 전국을 걸으며 촬영하는 '하늘 땅 815'라는 행사를 하게 된 계기가 동생의 죽음 때문입니까.

"죽음을 목격했다고 자랑스레 떠들다 막상 동생의 죽음을 보니 암담해졌어요. 동생을 추억하는 행사를 10년 넘게 해왔지만 마음 속 응어리는 지금도 그대로예요."

가족 시리즈를 시작하기 한참 전인 20대 때 최광호는 이미 '한국'에 미쳐 있었다.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에 입사하자마자 선배 3명이 동시 사표를 냈다. 그는 졸지에 '한국의 발견'시리즈 책임자가 됐다. 이 시리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1권으로 완간됐다.

암(癌)으로 사망한 고 한창기 사장의 사랑을 받으며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녔다. 한 달에 20일을 지방출장으로 보내던 시기였다. 그때를 기억하면서 그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고 행운이 겹치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지금 봐도 그 시리즈는 대단합니다.

"제대로 된 기획 같은 것도 없었지요. '강원도 어디에 이런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작정 가 동네를 헤매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찍어가면 되던 때였죠."

―뿌리깊은 나무가 당시로서는 대단한 월간지였지요.

"육 선생 추천으로 입사했어요. 사진 몇 장 찍어오라는 게 입사시험이었는데 당시 김형윤 사진부장이 제 사진을 척 보더니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거예요. 월급이 상당했어요. 첫 월급이 15만원이었고 일본 유학 가기 전 퇴사할 때 29만원을 받았으니까요."

―좋은 대우가 좋은 작품을 낳는다고 봅니까?

"지방에서 돈 떨어지면 곧바로 우체국으로 부쳐주기도 했지요. 출장비가 떨어진 적은 별로 없었어요. 워낙 많이 줘서 남겨 돌아왔죠. 그 때문에 선배들에게 혼이 났어요."

―출장비 남겨오는 후배를 왜 혼냅니까.

"대충 영수증 만들어 회사에 내면 될 걸 제가 물정을 몰랐거든요. 술 마실 때마다 선배들에게 욕 먹었어요."

―일본과 미국에서 여러 스승을 만났지요.

"이노우에 세에류(井上靑龍), 모리야마 다이토(森山大道), 윌리엄 클라인, 러버트 프랭크 같은 분들입니다. 사진도 배웠지만 인생을 배웠다는 게 더 적합할 겁니다."

―인생을 어떻게 배웠다는 겁니까.

"일본 오사카 빈민가 가마가사키에서 촬영하다 값비싼 장비를 모두 잃었어요. 거기서 사귄 노동자 친구와 함께 술 마시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찾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다음날 정말 그 친구가 장비를 찾아줬어요. 이노우에 선생이 그걸 알고 '너는 사진만 찍은 게 아니고 사람을 알았구나'라고 했습니다."

―작업 때 항상 피사체와 대화합니까.

"1981년 신촌의 육교에서 거지를 매일 찍는데 그 사람이 '너 부잣집 아들이지. 커피 한잔 뽑아와'라고 해요. 학생이어서 가난하다고 뻗대니 그 거지가 '옜다, 거지 돈으로 커피 두잔 뽑아와라'하는 겁니다. 며칠 뒤 커피 한잔 들고 찾아가 하루에 얼마를 버느냐고 하니 재수 좋은 날은 하루 5만원도 번대요. '저도 거지 하겠다'고 하니 기겁을 하더군요. 그 뒤 그 거지는 제 모델이 됐지요."

―사람과 사귀는 특출한 재능이 있나요.

"부자(父子)가 대화를 잘 안 하잖아요. 강릉에서 운영하던 병원이 불타 없어지자 아버지는 무의촌(無醫村) 의사가 됐어요.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던 고1 어느 날 아버지가 성적표를 내놓으래요. 없다고 거짓말했더니 회초리를 드는 겁니다. 몇 대 맞다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저 한 대를 때리면 아버지도 자기 종아리를 한 대 치는 겁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분이었군요.

"거기가 대청도였어요. 제가 잘못했다고 비니 아버지가 술 한잔 하자더군요. '술 마실 줄 모른다'고 딱 잡아떼다 한잔 마시니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술 많이 처먹어 봤네'하며 웃어요. 그 뒤 아버지와 인생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최광호는 집안의 말썽꾸러기였다. 2남3녀의 장남이었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당시 시험보고 들어가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재수를 안 한 적이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시험'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겁을 집어먹게 됐다.

고교 입시에 낙방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던 7월 어느 날 학원을 놀이터로 삼고 있던 그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인천 A고에 들어갈래?" 7월에도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있나 싶어 밑지는 셈치고 가봤다. 그와 같은 학원을 다니다 슬그머니 사라진 말썽꾸러기들이 거기 다 모여있었다.

―그때부터 마음잡고 공부했습니까.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진을 하게 된 계기는 됐죠. 그해 9월쯤 담배를 사러 갔는데 그 가게가 DP점을 겸했어요. 우연히 사진이 현상돼 올라오는 모습이 고향 강릉 앞바다에서 하얀 파도가 치는 모습과 똑같아요. 그 신기함에 반해 사진에 미친 겁니다. 학교 사진부를 제가 만들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공부만 하지만 당시에는 고교생 사진대회 같은 게 많았습니다. 상(賞)이란 걸 그때 처음 타봤습니다."

―원래 서라벌예대에 갈 뻔했는데 왜 신구대 사진과로 진학했습니까.

"공부를 안 했으니 서라벌예대 갈 생각을 못했지요. 고교 선배 중 서라벌예대생들이 '너 같은 녀석은 붙여준다'며 꼭 시험 보러 오래요. 그래도 겁이 나서 못 갔어요. 나중에 그 선배가 신구대에 아는 분을 소개시켜줬습니다. 그분이 육 선생님입니다."

―신구대 갈 때는 확답을 받았나요.

"당시 신구대는 사진과만 지금의 교보문고 뒤편에 있었어요. 육 선생을 찾아가니 근처 다방에 가있으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사진 좋아해?'하고 묻길래 '좋아합니다'했어요. 그랬더니 '얼마나 좋아해'하더군요. '죽기살기로 좋아합니다'라는 제 대답에 빙긋 웃더군요. 사진 하는 친구들 전부 데리고 오라고도 했어요."

―그런 답을 받고도 떨어질 뻔한 사연이 있었습니까.

"신이 나서 원서접수 전날 밤새워 술을 마셨어요. 다음날 만취해 경기도 성남 신구대로 가니 원서접수 하는 분이 '이런 형편없는 놈들을 봤나'하며 원서를 안 받아줘요. 윤리를 가르치던 학과의 학과장이었어요. 빌다시피 해 겨우 원서를 접수시켰어요."

―대학 졸업 후 직업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죠.

"한 사진가의 스튜디오에 취직될 뻔했는데 한 선배가 귀띔해 주는 거예요.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0시 전에 퇴근해 본 적이 없다고요. '너, 사진 계속하고 싶으면 여기 스튜디오에 절대 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집안에서는 왜 안 도와줬습니까.

"거짓말로 등록금을 세 번 타낸 적은 있지만 '사진'이라는 말만 나오면 부모님들 표정이 바뀌셨지요. 3년간 막노동을 했어요. 하루 8000원 가량 받았어요. 그렇지만 매년 전시회는 빼놓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사진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두 분 다 고향이 함경남도 원산입니다. 어머니 집안이 갑부(甲富)였어요.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다녀왔던 외삼촌이 원산에서 서광사라는 사진관을 했는데 젊어서 장티푸스로 요절했어요. 일본인 의사가 암실(暗室)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발병(發病)했다는 진단을 내렸대요. 그 뒤로 부모님은 사진이라면 머리를 흔들었어요."

―그래도 사진 때문에 대학 가고 직업 얻고 지금의 부인과 만난 것 아닙니까.

"바다 사진을 찍던 중 아내를 만났어요. 5년쯤 사귀는데 갑자기 아내가 '며칠 뒤 선을 본다'는 거예요. 제가 매일 사귀던 나는 놔두고 왜 다른 남자 만나려 하느냐고 물으니 '당신과 살아봐야 인생 뻔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검게 물들인 군복에 고무신 끌고 다니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큰 처형을 만나니 직장이 없어 반대한다는 겁니다. 뿌리깊은 나무에 입사한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뿌리깊은 나무를 나와 오사카 예술대,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7년을 보내다 귀국한 최광호는 1년 동안을 꼬박 놀았다. 그가 없던 사이 한국의 사진계는 '찍어서 되던 것'에서 '만들어서 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는 사진을 극도로 싫어했다.

상업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가, 스트레이트를 계속 추구할 것인가를 놓고 그는 1년간 전국을 여행하며 고민했다. 결론은 '최광호만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것이었다. 생계가 쪼들리고 외상으로 재료를 사오는 한이 있어도 "돈과 명성은 스스로 찾아온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한국 사진계에서 최 작가가 평가하는 열명을 꼽아본다면요.

"60대 이하만 꼽는다면 배병우·구본창·민병헌·정창주·이정진·김아타·김중만 같은 분들이지요."

―한국 사진계의 톱 클래스와 외국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세계적인 사진가와 비교하면 진짜 일류라 할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끼리끼리의 네트워크는 있겠지만요."

―최근 외국에 진출하고 꽤 높은 작품 가격을 받는 작가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진시장은 미술시장의 일부처럼 돼있지요. 사람 들어간 사진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장식용 미술품처럼 사진을 구입하는 거지요. 사람 들어간 사진이 팔리려면 사고(思考)하고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합니다."

―상업적인 흐름을 보며 유혹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까.

"팔기 위해 사진을 한다는 생각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들어서야 생긴 겁니다. 저는 좋아서 사진을 합니다. 가난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사진이 그냥 좋았기 때문이지요."

―말은 그렇게 해도 올 봄 포토그램 전시회에서'대박'을 쳤지요.

"포토그램은 사진기가 없을 때 롤지(紙)와 노광(露光)만을 이용해 작업하는 겁니다. 잡초, 화분, 얼음이 다 소재가 되고 사람도 소재가 됩니다. 100점을 전시했는데 50점 이상 팔렸어요. 작품 한 점이 몇 천 만원 한다는 것보다 전시작의 절반 이상 팔린 게 더 놀라운 겁니다. 화랑 쪽에서도 놀랐지요."

―최 작가의 포토그램을 보면 부부와 아이가 옷을 벗은 작품도 많은데 이런 모델은 어떻게 구합니까.

"주례 볼 때 약속을 받은 겁니다. 결혼해 아이 생기면 꼭 찾아와야 한다고요. 그러면 대개 찾아오지요. 홀랑 벗겨 감광액 묻히고 노광을 주면 이런 형상이 나옵니다."

―이런 정교한 포토그램은 국내에서 최 작가만 하는 것으로 압니다. 사진계의 평가는 어떤가요.

"포토그램은 사진을 배운 사람이면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저도 20대 때부터 했지요. 본격적으로 한 것은 IMF 때부터였어요. 경제사정이 나빠지자 카메라상에서 외상을 안주는 거예요. 그래서 필름 없이 할 수 있는 포토그램을 한 겁니다. 사진계에서는 모두 저를 보고 욕을 했어요."

―왜 욕을 합니까.

"사진가는 카메라를 사용해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 아닌가 해요. 그런 고민이 유학 길에 오르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남녀노소의 필수품이 됐습니다. 모두가 카메라에 익숙해지면 사진가들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나요.

"디지털은 호흡이에요. 필름은 '확인 사살'로 비유할 수 있지요. 디지털 시대라는 것은 공짜 시대입니다. 공짜는 남을 감동시키기 힘들지요. 필름은 돈을 내 투자하는 거잖아요. 신중해질 수밖에 없지요. 디지털과 필름 카메라는 다른 겁니다."

―그래도 모두가 사진을 잘 찍게 되면 사진가는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요.

"디지털 카메라는 누구나 사진을 잘 찍게 만들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잘 찍은 사진이 훌륭한 사진이 아닌 시대지요. 개성(個性)시대입니다. '누구답다'고 인정 받기만 하면 작가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200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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