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나는 국악계의 영원한 아웃사이더"
[강인선 Live] 대장암 딛고 다시 선 가야금 명인 황병기
"암 수술 뒤 기저귀 차고 독일공연 마쳐"
강인선 insun@chosun.com
가야금 명인 황병기(72)씨의 손은 부드럽고 매끈했다. 중학교 때 이후 한시도 가야금 연주를 쉰 적 없는 그의 손에 굳은 살 정도는 두툼하게 배겨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손 사진을 찍고 싶어했는데, 그는 손을 등 뒤로 빼면서 "이젠 오래 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판소리하는 분들이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연습을 한다고 하잖아요. 가야금도 오래하면 그런 고난의 흔적이 있을 줄 알았어요.
"목소리를 트이게 하려면 똥물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국악인들이 싫어해요. 과장되고 신화화된 것이 많거든요. 가야금도 손끝에서 피가 나도록 해야 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요. 조금 하면 손끝에 물집이 잡히는데 그러면 아파서 줄에 손도 못 대요. 물집이 잡혔다 터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굳은 살이 생기면서 괜찮아져요."
1954년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다 만난 부부는 서로의 창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집을 1, 2층으로 나눠 쓴다. 벽 곳곳에 가야금을 세워둔 2층이 한씨의 '영토'다. 툭 트인 창으로 마포와 여의도 쪽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이달 17일까지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금요일마다 열리는 '황병기 명인의 창작 이야기' 공연을 본 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반듯하게 앉아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두번 째 만났을 땐 이전보다 많이 웃었다.
서울 가회동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황씨는 한국전쟁 때인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경기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 근처 고전무용연구소에서 처음으로 가야금 소리를 듣고 반했다.
라디오의 음악소리조차 듣기 싫어했던 아버지는 "부모가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서 네 책임하에 배우라"고 했다. 그래도 가야금을 사주고 레슨비도 내주었다. 가야금에 빠져든 덕에 중학교 때부터 그의 별명은 '영감'이었다.
가야금을 좋아하긴 했지만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서울법대를 다닐 때도, 명동극장 지배인일 때도, 매일 가야금을 연주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꾸 왜 법대를 갔느냐고 묻는데 전국에 국악과가 하나도 없던 시절이니 어딜 가려야 갈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가 서울법대를 졸업하던 해인 1959년 서울대에 국악과가 생겼다. 황씨는 서울음대 국악과에서 가야금 강사로 4년간 일했다. 현제명 당시 음대학장이 그가 고교와 대학시절 콩쿠르에 나가 입상한 경력을 눈여겨봤다가 강사로 채용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에게 가야금은 여전히 취미였다. 아버지도 아들이 가야금보다는 사업을 하길 바랐다. 그러다 결단의 순간이 왔다. 서울대 국악과가 자리를 잡자 1972년 한양대, 1974년에 이화여대에 국악과가 생기면서 황씨에게 교수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그는 이때 "음악에 모든 것을 던지자"고 결심했다.
"제가 서른여덟 살이 돼서야 '프로의식'이란 걸 처음 가진 겁니다. 그 전엔 아무 때나 그만둘 수 있는 강사가 좋다느니, 가야금은 좋아서 할 뿐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저것 해봐야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었어요. 교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지도 알 수 없고요. 그래서 음악에만 전력투구하기로 한 겁니다."
어릴 때 가야금 반해 '영감' 별명
세상사람 편견에는 신경 안 써
1500년 祖上음악 왜 낮춰보나
1974년은 그에게 멋진 해였다. 그의 작품 중 요즘도 가장 많이 연주되는 '침향무'를 작곡했다. 그의 음악적 상상력은 조선시대를 넘어 신라로 갔고, 한국을 넘어 아시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첫 유럽 독주회도 가졌다.
"이전의 미국 공연에 이어, 서양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암스테르담부터 파리까지 다니면서 가야금 연주를 했어요. 파리 공연 때 제가 대학시절부터 흠모했던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왔어요. 베니스 공연 때는 밤에 가야금을 옆에 끼고 안개 낀 가로등 길을 걸어가서 오래된 궁에서 밤 11시에 연주를 했어요. 창 밖으로 곤돌라의 배 젓는 소리가 들렸고요. 어린 아이들이 제가 가야금 줄 고르는 모습을 눈을 반짝거리면서 보더라고요."
―'가야금 연주자'와 '작곡가'로서 황병기는 어떻게 다릅니까?
"저는 '전통적인 연주자'이면서 '현대적인 작곡가'입니다. 연주는 정신활동이라기보단 육체활동이에요. 나이 들면 기운이 달리고 순발력이 떨어지지요. 1965년에 미국서 첫 음반녹음을 했을 때 돈이 없어 반주자를 못 데려갔기 때문에 장구와 가야금을 제가 다 따로 연주해 녹음한 후 합쳤어요. 연습도 안 하고 녹음했는데 두 가지가 딱 들어맞으니 녹음하던 사람들도 다 놀라더라고요. 지금이야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더 농익은 소리를 낼 자신은 있지요. "
―처음 가야금을 배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많은 게 달라졌지요?
"한국전쟁 직후엔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전주에만 있었어요. 1년에 여남은 대 정도 팔았어요. 그 사람도 원래는 장롱을 짜면서 가야금 주문이 있으면 하나씩 만들었대요. 그런데 요즘엔 가야금이 연 7000대 정도 팔린다고 합니다. 엄청난 변화지요."
―국악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지요?
"옛날엔 오죽하면 국악을 하냐고 그랬어요. 학교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국악을 싫어했어요. 베토벤은 외국인으로 느끼지 않고 그의 음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국악은 천시했지요. 그런데 법대 나온 제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데도 국악을 하니까 국악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치켜세워주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편견과 싸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이상스럽게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학생 시절에 가야금을 들고 가면 여학생들이 보면서 킥킥 웃었어요. 저를 웃음거리로 여긴 거지요. 그래도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웃을 테면 웃어라' 그런 식이었어요."
―다른 일도 남들이 뭐라 건 신경 쓰지 않으시나요?
"제겐 어쩔 수 없는 아웃사이더 기질 같은 게 있어요. 이대 교수를 할 때도 구내식당에 안 가고 자장면 같은 것을 혼자 먹게 돼요. 선생들이 그런 걸 안 좋아하거든요. 가야금만 해도 우리 민족이 1500년 동안 한 것을 이어서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프랑스나 미국에 가서 어마어마한 돈 들여 피아노 공부해오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저처럼 우리 할아버지들이 하던 가야금을 하면 이상하다고 그러지요. 제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일이 다 이상한 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살려면 자기 원칙을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제겐 좌우명이나 가훈이 없어요. 채근담의 한 대목은 자주 봅니다.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가고 나면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호수를 지나도 기러기가 가고 나면 호수는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일이 생겨야 비로소 마음에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느니라.' 대학 때 서점에서 이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어릴 땐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을 듣고 컸잖아요. 붙들고 늘어지라는 말만 들은 거예요. 그러니 너무 놀랐지요. 채근담은 지금도 자주 봐요."
―창작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안목입니다. 예전에 시골에 가면 제 아버지나 형뻘 되는 사람들이 양복 밑에 파자마가 보이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좋다는 데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누구나 다 자기 안목이 높다고 생각해요. 자기 권위를 버리고 다른 음악을 자꾸 들어야 해요. 자신이 늘 듣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거기서 굳어버리고 국제성과 세계성을 잃게 됩니다. 저는 늘 의심을 합니다. 연주를 잘 했다는 칭찬을 들으면 기쁘지만 쉽게 믿지는 않아요."
―'황병기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한 문장으로 답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래 의도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는 감격을 경험하셨습니까?
"1974년에 작곡한 '침향무'가 그런 경우예요. 우리의 전통음악이란 조선의 음악이거든요. 저는 그걸 벗어나려고 했어요. 그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고심을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돼요."
―'고심'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걸까요.
"몰입하는 건데 쉽지는 않아요. 운도 있어야 하고요. 일생을 음악을 하며 살기로 결심한 해에 유럽 순회독주회를 앞두고 한국이란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생겼어요. 그때 범아시아적 정서를 생각했어요. 신라 음악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를 생각했어요. 신라시대의 유형문화재를 보고 종소리도 들어봤어요. 반가사유상의 정지된 이미지에서 움직임을 찾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좀 유치하지만 별빛도 많이 작용했어요. 별빛은 신라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신라사람이 춤을 추는 장면이 환각처럼 보여요. 그렇게 침향무를 썼어요."
―국악계에서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고 계시지만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제 음악은 서양음악을 따라 하지도 않고 전통음악을 모방하지도 않고 제가 이전에 쓴 곡과도 달라요. 비슷한 곡을 양산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은 거 아닌가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작곡을 따로 배우신 적은 없지요?
"가야금을 배운 건 그 소리가 아름다워서였어요. 오래 하다 보니 전통음악이 왜 아름다운지 그 원리가 있을 것이고 그걸 제가 추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정주 시인이 쓴 '국화 옆에서'의 시어 하나하나에 충실한 노래를 만들어보면서 작곡을 시작했어요."
―한 곡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저는 곡 하나를 마음 속에서 숙성시키는 데 2년이 걸려요. 막상 펜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면 두 주면 끝나요. 간절한 표현을 담는 악상을 잡는 게 어렵지요."
―남산음악당에서 열리는 '황병기 명인의 창작이야기'에서 곡에 얽힌 사연을 들으니 재미있더라고요. 중요한 체험이 얼마 지나면 음악으로 변하는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1999년엔 대장암 수술을 받고 '시계탑'이란 곡을 구상했어요. 서울대병원에서 수술 후 운동하느라 링거를 꽂은 채 병원 복도를 빙빙 걸어 다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시계탑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평소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그땐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내 입장이 비참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가 돼서 그런지 비극적인 곡보다는 예쁘고 아름다운 곡을 쓰고 싶었어요. 그때 시작해서 퇴원 후에 완성했어요."
―그 후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의사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 다 하라고 했어요. 1월에 퇴원해 3월에 독주회를 했고 5월엔 독일로 공연을 갔어요.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 다 해냈어요."
그는 갑자기 의자에서 불쑥 일어나 창 쪽으로 가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마침 대장암 수술 이야기를 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술을 해준 의사가 고교 후배인데 술도 잘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워요. 수술 후에 저에게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살고, 의사를 따라 하면 죽는다'고 그러더라고요. 하하하…."
모든 체험은 음악의 영감
한 작품 숙성하는데 2년
아플 때 예쁜 曲에 더 끌려
―작가나 예술인들이 묘비에 어떤 식으로 쓰이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혹시 생각해두신 것 있습니까?
"제가 저를 어떻게 알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좋게 말해준 게 있는데,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이 '황병기론'을 쓰면서 '유일자', '오직 한 사람'이라고 해주신 것이고요. 또 하나는 현각 스님이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에서 자신이 한국을 왜 좋아하는지 알려면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든지 황병기의 가야금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던 겁니다. 영광으로 생각하지요."
―예술가로서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요.
"국악인 중에선 정남희(丁南希) 선생입니다. 제게 가야금을 가르친 김윤덕 선생의 스승이지요. 한국전쟁이 나자마자 월북했는데 제가 그 전에 만든 음반을 들었어요. 1990년에 북한에 갔을 때 정 선생이 북한에 가서 녹음한 테이프를 구했어요. 외국 음악가로는 서양 현대음악에 눈뜨게 해준 스트라빈스키였어요. 요즘도 정월 초하루엔 차례를 지내고 나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듣는 것이 제가 새해를 시작하는 의식입니다."
―자기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제 음악은 대중적인 폭발성이 없어요. 한마디로 재미없는 음악이죠. 하지만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가 1960년대 미국에 갔더니 그때 기행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유명했던 작곡가 백남준이 지루한 음악을 들려달래요. 지루하다는 건 느려 터지고 단순한 곡 아니겠어요? 그래서 한 곡 들려줬어요. 그랬더니 더 지루한 거 없느냐고 그래요. 하하하."
―대중적인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요?
"대중적인 것은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평론가들이 추천사를 쓸 때 보면 제가 국악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말을 자주 써요.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대중적인 겁니까?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대중이 오랜 세월을 거쳐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이 베토벤이에요. 저는 대중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비대중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매일 가야금 연습을 하십니까?
"그럼요. 한 달만 쉬어도 손이 아파서 못해요. 연습을 안 하면 손가락 근육도 다 풀려 버리고요. 그런 의미에서 연주는 육체행위지 정신행위가 아닙니다. 가야금뿐 아니라 모든 연주자가 이런 멍에를 짊어져요. 연주란 그런 속박을 즐거워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즘은 흔하지만 5년 연상과의 결혼은 당시로선 특이했을 것 같아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정상이라고 봐요. 남녀라는 것이 알고 보면 암컷과 수컷이잖아요. 남녀가 들판에서 야수 만나듯 만나는 거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서 나이를 알아볼 것도 아니잖아요? 처음엔 물론 결혼할 생각 없이 만난 것이지만요."
―두 분이 1·2층을 나눠서 독립공간으로 쓰고 계신다더니 정말 그러네요.
"서로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방해는 안 하려고 해요. 부부란 동업자 기질이 있어야 해요. 저희 부부는 성격이 반대예요. 저는 비관주의자거든요. 집사람은 뭐든 잘 된다고 보는 낙관주의자예요. 저는 가끔 넥타이를 매고 싶기도 한데, 집사람은 넥타이를 못 매게 해요. 남자들이 20세기 내내 매던 넥타이를 왜 매냐는 거예요. 촌스럽다고요."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가야금을 무릎 위에 놓고 인터뷰 중 자주 언급했던 '침향무'의 한 부분을 연주했다. 평생을 가야금과 함께 살아온 명인의 연주는 사진기자와 둘이서만 듣기엔 과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조선일보
입력 : 2008.10.11 03:17 / 수정 : 2008.10.1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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