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예배
주승중 (장신대)
I. 들어가는 말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 줄기이다. 당시 종교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는 영국 교회의 감독제에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교회직제를 장로제로 하기로 하면서, 장로교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게 된 것이다.
이 장로교회는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민 이후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상륙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제 1, 2차 대각성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미국 장로교회는 크게 성장을 계속하였고, 그들의 선교열은 기독교 복음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놀라운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복음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80%가 장로교회인 것을 볼 때, 그들의 장로교 예배를 공부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예배의 뿌리를 아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먼저 장로교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고, 미국에서의 정착과 성장 과정을 정리한 후, 그들의 예배에 대하여 두 시간에 걸쳐 공부하도록 하겠다.
II. 몸 말
1. 장로교회의 역사적 배경
장로교회는 종교 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의 한 전통이다. 신학적으로는 존 칼뱅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존 낙스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정착된 교회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감독제에 근거한 직제를 전통적으로 지켜 왔으나, 장로교회는 감독제를 거부하고, 장로제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장로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기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영국과 종교 개혁
16세기 영국은 정치 종교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지금까지 영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소속으로서,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헨리 8세가 즉위한 후, 그의 이혼과 결혼 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1534년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로마 교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이제 영국 내에는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계열, 로마 카톨릭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는 계열, 그리고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개혁하려는 개신교 계열--특별히 청교도들--로 나뉘게 되면서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아주 복잡하게 빠져들게 된다.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6세는 개신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다. 그러나 1553년 그가 죽고 피의 여왕 메리(Bloody Mary)가 등장하면서, 다시 상황은 바뀐다. 그녀는 에드워드 6세에 의하여 이루어진 모든 개혁 조치들을 폐지하고, 로마 교회에 돌아가, 1554년 영국에 대한 교황권을 회복시킨다. 한편 메리의 박해는 역으로 영국 내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반 카톨릭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고, 유럽에 망명한 사람들에게는 대륙의 종교 개혁 사상을 보다 확실하게 배워 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들이 돌아온 후 영국에서는 보다 거센 개혁의 물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558년 메리 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다시 개신교 쪽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로마 교황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에드워드 6세의 기도서를 개정하여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모든 교회 안의 장식이나 성직자의 복장 등은 에드워드 재임시의 규정을 따르도록 하였다.
160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영국에는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6세를 데려다가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두 나라의 이름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여, 영국교회의 감독제를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장로 직제를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 챨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절대 왕권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고, 특별히 William Laud를 기용하여 종교 정책을 펴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는 영국 교회를 강화하고, 모든 의식과 복장과 예배를 통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챨스는 영국 의회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고, 나아가 스코틀랜드에서는 거센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1633년 라우드를 동행하고 스코틀랜드를 공식 방문하였는데, 그곳의 교회 구조와 예배 형태가 영국교회와는 너무 다른 것을 놀랐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636년 스코틀랜드 교회가 존 낙스의 예식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대신 영국 교회의 기도서(Laud 예전)를 사용하도록 하고, 즉석 기도와 장로 제도는 금지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1637년 마침내 에딘버러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1638년 "국민 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고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 해에 그래스 고우 대성당에서 총회가 소집되어 1610년 이래로 지속되어오던 감독제를 폐지하고, 장로제도를 다시 확립하였으며, 왕의 예식서를 거부하는 대신에 "공동 예배 규범서"(The Book of Common Order)를 사용토록 하였다. 이에 챨스 왕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영국 내부 사정도 더욱 악화되어, 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개혁 세력 중심의 의회파 나뉘어 싸우게 되었다.
2) 스코트랜드 교회의 개혁
중세 후반기를 지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스코틀랜드에도 종교 개혁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바로 John Knox(1515?-1572)이다. 그는 1553년 영국에 친 카톨릭 정권인 메리 여왕이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프랑크 포트로 망명해서 영국인들을 위해 목회를 하다가, 에드워드 기도서에 대한 그의 비평적 입장 때문에 분열이 생겨서 칼뱅이 종교개혁을 하던 제네바로 가서 칼뱅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다.
1555년 후반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에 귀국하여 머물렀는데, 약 9개월이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스코틀랜드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게 되었다.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 세력의 요청에 따라 1559년 5월 귀국을 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여 개혁 운동을 열렬히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개혁 세력은 이제 국회의 지배 세력이 되어 1560년 낙스가 기초한 칼뱅주의적 신앙고백을 신조로 채택하고, 1주일 후에는 교황권을 배격하고 미사를 금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왕과 귀족의 손을 떠나 평민의 교회로 자리를 잡게 된다.
1560년에는 소위 제 1회 스코틀랜드 총회(General Assembly)를 열고, 그 다음에는 "제 1 교회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를 국회에 제출하여 장로교회 조직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려 하였다. 또한 성서적인 근거가 없는 모든 축일은 폐지하고, 주일만 지키도록 하였으며, 공중 예배를 위해 일명 "낙스의 예전"이라 부르는 "공동 예배 규범서"(The Book of Common Order)를 작성하여 1564년 총회에서 승인 받았다.
낙스는 1572년 사망하게 되는데, 그 이후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제임스 1세)이 되면서 두 나라가 같은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낙스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에는 Andrew Melville(1545-1623)이 개혁을 계속하면서, 장로교를 정립하고 체계화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3) 웨스트민스터 회의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영국 청교도들은 "1000인 청원서"(Millenary Petition)를 제출한다. 그 결과 1604년 Hamton에서 회의 가 열리게 되었고, 그들은 거기서 감독제도보다 장로제를 도입할 것과 개혁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직 성경 번역만 허락되어 "King James Version"이 나오게 되었다.
1625년 챨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감독 없이는 참 교회도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 왕권과 감독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라우드 주교를 기용하여 영국 내 모든 교회의 의식과 복장과 예전을 통일하려 하였다. 그의 종교 정책과 세금 제도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지배를 하고 있는 의회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챨스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1629-40년까지 국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마침내 1637년에 에딘버러에서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1638년 국민 계약을 맺고 감독제를 폐지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챨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1640년 국회를 소집하였으나, 국회가 비협조적이자, 이를 바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손해 배상을 해야하는 챨스 왕은 1640년 다시 국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국회에서 향후 2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의희에는 청교도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의회 내의 종교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회의이다. 이 회의는 1643년 7월에 시작하여 1648년 2월까지 계속 되었다.
처음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위원의 수는 총 151명이었다. 위원은 121명의 성직자들과 30명의 평신도로 이루어졌는데, 평신도 중 10명은 상원 의원이었고, 20명은 하원 의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장로교 계열의 청교도들이었고, 회중 교회파와 영국 국교회에서 몇 명 참석하였으며, 특별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참관인 자격으로 목사 4명과 평신도 2명이 참석하였다.
회의 장소는 웨스트민스터로 하고, 그 이름은 "웨스트민스터 성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로 칭하였으며, 폐회 때까지 1163회의 모임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 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대. 소 요리 문답" 그리고 "공중 예배 모범"(Directory of the Public Worship)등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그대로 수용되어 장로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배로 사용되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특기해야 할 사항은 그 동안 우리는 이 회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요리 문답을 대표적으로 만든 회의로 먼 생각하는데, 사실 이 회의는 예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 회의는 무엇보다도 예배 모범을 최우선적으로 취급하게 되어서, 70회가 넘는 회의를 거치면서 1644년 예배 모범을 국회에 제출하여 1645년 1월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그 내용은 전문 위원 자격으로 참관했던 스코틀랜드 교회 대표들이 자기의 총회에서 연구되어진 것들을 가져와서 제출한 것은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통과된 예배 모범, 신앙고백, 교리문답 등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여 총회에서 통과 시킴으로서, 장로교회의 신앙과 예배와 조직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로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모든 면에서 확고한 장로교에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2. 미국 장로교의 정착과 성장
미국에 대한 식민지화가 유럽의 여러 족속들을 미국 땅에 유입시켜 놓았듯이, 유럽의 여러 교파들이 신대륙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그러므로 북미 대륙에는 유럽의 다양한 기독교 교파들이 그대로 전해지고, 이러한 현상은 교파간의 종교적인 자유를 그 땅에서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로교가 그 중의 대표적인 교파이다.
1) 장로교의 정착과 조직
신대륙의 장로교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다. 첫째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들어오게 된 것이고(청교도 장로파 계열), 두 번째는 18세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대이민 때 들어온 경우이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대이민은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중엽 이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들이 미국 장로교의 주된 구성원을 이룬다. 이들은 주로 뉴햄프셔, 버몬트와 메인, 메사츄세스, 펜실바니아, 메릴랜드,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으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 후 유럽으로부터 계속 흘러 들어오는 이민들로 인해 장로교인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1716년 장로교는 자체적으로 필라델피아 대회(Synod)를 조직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네 개의 노회, 즉 필라델피아, 뉴 캐슬, 롱 아일랜드, 그리고 스노우 힐 노회로 나뉘게 되었다.
2) 대각성 운동과 분열
1730년 이후 독립전쟁까지의 기간은 장로교가 미국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면서, 영적 각성을 체험하고, 기관들을 설립하고, 지도자들을 양성하면서 발전해 나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 17세기 말은 신대륙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종교적인 열성도 청교도 후손들에게서 식어져 가고 있었으며, 교회에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현상들은 새로운 영적 각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1730년대를 기점으로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와 조오지 휘필드(1714-1770)같은 인물들을 통해서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게 하셨다. 휘필드의 영향은 미국 장로교에도 크게 미쳤다. 그 결과 장로교인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놀랍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런 발전과 함께 장로교는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는데, 그것은 영적 대각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 때문이었다. 영적 대각성 운동에 대하여 두 가지 입장이 나뉘어졌는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New Side(신파), 부정적인 사람들은 Old Side(구파)라 하였는데, 이들은 1741년 구파의 구성원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대회를 열고, 신파의 구성원들은 뉴욕 대회를 열어 각각 결별하고 말았다. 그 결과 미국 장로교는 최초로 나뉘어지면서 1758년 다시 통합될 때까지 두 개의 진영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전반적인 분위기는 대각성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장로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대부분 신파에 있었기 때문에, 1758년 두 측은 결국 신파를 중심으로 다시 합의를 하여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3) 독립전쟁기의 교회
18세기의 마지막 25년은 미국의 혁명시기였다. 영국과 식민지 주들간의 갈등은 1775년 전쟁으로 발전되어,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고, 전쟁은 178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미국의 종교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종교의 자유였다. 그 동안 유럽의 대부분 교회들은 국가 교회의 형태로 국가의 간섭을 받아왔으나, 이제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므로써, 각 교파들은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장로교인들은 포함한 많은 미국인들이 이 기간 동안에 미국의 독립과 독립 전쟁을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장로교회는 사무관이나, 군인으로, 또는 군목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장로교인들은 영국에서 이민을 오게 된 동기가 종교적인 박해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히 높았다.
1780년대 미국의 종교적인 상황은 전쟁 중에 있는 국가처럼 자신들도 매우 어수선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독립은 교회에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도록 하였다. 교회들은 각기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체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도 마찬가지로 미국 장로교 총회를 구성하기 위한 대회를 필라델피아에서 모였다. 여기서 대회와 노회들은 공중 예배와 교리, 직제, 치리의 내용을 포함한 장로교회의 헌법과 함께 새로운 "미국 예배 모범"(American Directory for the Worship of God)을 채택하였다. 1786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는 노회 수를 12개에서 16개로 늘렸고, 4개의 대회로 편성하였으며, 총회를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789년 제 1회 장로교 총회가 모여, 뉴욕 제일 장로교회의 John Rodgers(1727-1811)를 총회장으로 선출하므로써, 역사적인 미장로교 총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은 미국의 정치적인 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다. 미국이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얻었듯이 미국의 교회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미국 내에서의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미국이 국가 체계를 위해 헌법을 제정한 것처럼 교회들, 특별히 장로교회도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교회 정치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4) 제 2차 대각성 운동
대각성 시기에 미국 전체는 종교적인 새로운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독립 전쟁 이후 전쟁의 시기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관심들이 식어져 버렸다. 합리주의적 사고가 확산되고, 이신론적인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도전들이 심화되고 있었다. 교회는 영적으로 침체되고 있었다.
이 때 기독교의 영적 각성을 위한 새로운 움직임들이 동부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제 2차 대각성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은 차츰 서부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데, 1795년 예일 대학의 학장 Timothy Dwight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의 물결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19세기 초 20년 동안 미국의 영적 상태를 새롭게 하였다.
특별히 이 운동은 서부로 전파되면서 크게 부흥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순회 전도자들이 나타나 설교를 하고, 야영집회와 영적인 체험 현상들이 나타나고, 특별히 이 운동의 영향은 장로교에 많이 나타났다. 이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부흥사가 바로 Charles G. Finney(1792-1875) 같은 사람이다. 이 운동의 결과로 선교 활동이 활발해져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으며, 많은 대학과 신학교들(Union, Columbia, McCormick...)이 장로교를 중심으로 세워지고, 초교파적인 연합 기관들과 자선 단체들이 조직되고, 기독교 신문이나 잡지들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장로교는 두 번의 중대한 분열이 일어났다. Cumberland지방에서 부흥운동에 대한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게 되는데, 찬성하는 세력들을 중심으로 컴버랜드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두 번째는 켄터키 지역에서 부흥회 지지 세력인 New Light파가 중심이 되어 이탈하기도 했다.
5) 남북 교회의 분열, 그리고 재연합
제 2차 대각성 운동이 지나고, 미국 교회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내적인 문제도 아니요, 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미국 사회의 문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노예 제도였다. 노예문제는 급기야 남북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교회도 남북으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1837-38년 미국 장로교회는 또 다른 분열의 고통을 당하는데, 그것은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의 대립이었다. 분열의 원인은 신학과 교회 정치와 개혁 등의 입장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노예 문제가 큰 문제였다. 1836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가 신학파의 영향으로 설립되고, 프린스톤 신학교는 구학파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1837년과 1838년 총회를 거치면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 후 시민 전쟁(1861-65)이 다가오기 전인 1857년에 신파 장로교회가 다시 분열을 하고, 1861년 구파 장로교회가 나뉘어졌다. 그러다가 남쪽의 신구파가 1864년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로, 북쪽의 두 파는 1861-1870 사이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 부르게 되었다. 남쪽 교회들은 남북 전쟁 기간을 통해서 노예 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 섰고, 북쪽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싸웠다. 전쟁은 북쪽의 승리로 끝났으나, 그들의 상처는 쉽게 아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교 연합 운동은 계속해서 일어나 1906년에 PCUSA와 CPC(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가 다시 결합을 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까지 미국은 PCUSA, PCUS, 그리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회인 UPCN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등 세 계열이 장로교회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PCUSA와 UPCNA가 연합하여 UPCUS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남북 장로교 총회가 연합으로 모여 통합을 선언하므로써, 미국 장로교회는 모든 분열의 역사를 매듭짓고 새로운 출발을 이루게 되었다.
3. 미국 장로교의 예배
1) 장로교 예배의 신학
장로교의 예배 신학은 개혁교회의 사상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장로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했으며,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majesty)과 그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에 맞추어졌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부르심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사 6:1-8) 이런 기본적인 개혁교회의 근본 사상에 근거한 장로교 예배 신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로교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한다.
장로교회는 칼뱅의 전통에 따라 교회와 예배와 모든 생활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삼았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래서 장로교 예배에서 성경을 봉독하는 것과 설교를 하는 시간은 예배의 가장 중심 부분을 차지하였다.
둘째로, 장로교의 예배는 계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칼뱅에 의하여 만들어진 선택 교리는 인간들의 어떤 공로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인 선택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이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는 그 분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장로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인 교회로 들어오는 의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과 같다. 성만찬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식사(covenant meal)요, 주님이 임재하신 계약의 표징(covenant sign)이다.
셋째로, 장로교 예배는 성령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경의 권위를 확증시키는 분도 성령이시오, 선포되어지는 설교도 성령의 능력과 자유 안에서만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례전 신학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만이 성례전들은 유효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와 성만찬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도 성령님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하게 된다는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넷째로, 장로교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나 이해력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높고 비밀스러운 것들을 보게 한다. 믿음은 계시에 대한 통로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는 선물들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세례도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례는 믿음의 종속물이여...만일 세례가 믿음이 없이 주어진다면 이것은 사악하고 신성 모독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루어진 세례는 강력하고 실제저긴 은총의 수단이 된다. 세례와 함께 성만찬에 있어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다. 믿음에 의하여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로교의 예배 신학에 있어서 신자들의 믿음은 예배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칼뱅은 모든 예배의 근거를 사도행전 2:42에 두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드렸던 예배를 모델로 하여, "말씀, 기도, 성만찬, 교제(구제헌금)"를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틀로 생각했다.
이상과 같이 장로교 예배 신학은 말씀의 신학, 계약 신학, 성령의 역사, 믿음, 초대 교회의 진통에 근거한 역사적인 예배를 중요시 한다.
4. 미국 장로교 예배의 변천사
미국 장로교는 예배에 관한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배 지침(Directory of Worship)이고, 또 하나는 예배서(Service Book)이다. 예배 지침은 교회 헌법에 실린 것으로서 교회의 법적 권위를 가지고, 장로교 예배 신학과 예배를 위한 적절한 지침들을 제시한다. 이것은 예배 순서를 예시하지는 않고, 예배 순서를 위한 기준과 규범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배서는 예배 지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예배에 관한 순서(order)와 예문(text)들을 제시해준다. 개혁 교회에 있어서는 예배서가 예배 지침 보다 훨씬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미장로교의 예배의 변천 과정을 공부하는 가운데 한국 장로교 예배의 뿌리를 살펴보도록 한다.
1) 16-17세기의 예배
16세기의 개혁 교회들은 예배서들을 사용하였다. 쯔빙글리, 부처, 칼뱅 등은 회중들을 위한 예배 형식들을 모두 준비하여 사용하였다. 칼뱅의 후예인 존 낙스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기도 예식서"(The Formes of Prayers)를 발간하여 사용하였고, 그것은 곧 "공동 예배 순서집"(The Book of Common Order)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예배서"로 말미암아 영국 국교회와 정부측과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던 청교도 간에 갈등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는 스코틀랜드와도 갈등을 가져 왔다. 영국 국교회와 정부는 자신들의 예전으로 영국 전체를 통일시키려고 한 반면에, 대륙의 종교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를 개혁하려 했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교회는 국교회의 예전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다. 이런 결과는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심화되었고, 드디어는 청교도 측의 승리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1644년에 그 유명한 "The Westminster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를 만들게 되었다.
이 예배 지침(모범)은 미국 장로교 예배 지침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게 될 때, 이들은 미국 장로교회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은 신대륙에 이주하여 예배서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 대신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기초로 하여 예배를 드렸다. 식민 시대의 미 장로교회는 1644년도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788년 미국 장로교를 위한 개정판이 나와 총회에서 채택되어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2) 19세기의 예배
19세시 중반에 미국 장로교와 기타 개혁교회들 사이에는 하나의 새로운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예전 전통을 회복하고, 예배서를 활용하는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이 때 장로교에서는 개인적으로 예배서들이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 좋은 예가 1855년 Charles W. Baird(1828-1887)가 "장로교 예배서"(Presbyterian Worship)를 발간한 일이다. 이러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북장로교의 출판사들을 자극하여 예식서들을 발간하려는 움직임을 일게 하였다. 그러나 예식서가 정식으로 먼저 나온 곳은 1894년 남장로교에서였다. 북장로교는 9년 후에 총회에서 예배서를 요청하는 긍정적 반응들이 나오게 되었다.
3) 20세기의 예배
(1) 공동 예배서(The Book of Common Worship, 1906, 1932, 1946)
1903년 북장로교(PCUSA)는 예배서에 대한 요구가 차츰 증대되어가자 예배서를 발간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6년에 "공동 예배서"가 출간되었다. 이것은 미국 장로교회로 하여금 예배를 만드는데 있어서 예전적인 순서(order)와 예문(text)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1906년 공동 예배서는 미국 장로교 예배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주일 아침과 저녁 예배 순서를 포함하고, 그리고 성만찬 집례, 교회력에 따른 절기, 세례와 입교 문답에 대한 순서와 예문, 시편송과 찬송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06년판은 1932년에 다시 개정되었는데, 여기서는 절기에 대한 예문이 첨가되고, 기초적인 성서일과가 포함되었다. 특별한 것은 남장로교 총회가 이것을 사용하도록 승인하였다는 사실이다.
1946년이 이 공동 예배서는 다시 개정되는데, 여기서는 에큐메니칼 예전학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의 예배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들이 반영되었다. 이것은 주일 낮 예배와 밤 예배 그리고 성만찬 집례에 관한 자료들이 더 보강되었다.
(2) 예배서(The Worshipbook, 1970)
1955년 북장로교 총회는 또 다른 개정판을 요구했다. 여기는 남장로교 뿐만 아니라. Cumberland 장로교회도 함께 참여하여, 1970년에 "The Worshipbook Services"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가, 2년 후에 "The Worshipbook-Services ad Hymns"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의 공헌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용어를 현대화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주일 예배를 말씀과 성만찬 예배로 분명하게 규정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예배서는 제 2차 Vatican 공의회 이후 각 교회들이 예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하게 됨으로써 다시 개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3) 1993년 공동 예배서 (Book of Common Worship)
1980년 미북장로교 총회는 새로운 예배서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Cumberland 장로교회와 함께 새로운 예배서를 만들려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북 장로교회가 연합하는 일이 1983년에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연합된 미 장로교회(PCUSA)는 1989년에 예배 모범(지침)을 다시 개정하고, 이 예배 모범과 조화를 이루는 예배서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993년에 출간된 가장 최근의 미 장로교의 예배서인 "Book of Common Worship"이다.
5. 미국 장로교 예배 순서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미국 장로교 예배서에 나타난 예배 순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대로 미 장로교회의 예배 예식서는 1906년부터 시작하여, 1932, 1946, 그리고 1970년, 1993년 판으로 되었다. 그 중에 1906, 1932, 1946년판은 거의 차이가 없고, 그 이후에 1970년과 1993년은 대폭 수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는 그 중에 대표적으로 1946년과 1970년 그리고 1993년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The Book of Common Worship(1946)
1946년 "공동 예배서"는 크게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예배를 위한 준비로서 예배자와 집례자의 준비, 개회 기도와 성가대 기도문을 제시한다. 2장은 공중 예배를 위한 순서들을 주일 아침 예배, 특별 예배, 저녁 예배, 아동 예배, 청년 예배, 연도 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3장은 성례전과 교회의 예식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유아 세례, 성인 세례, 입교, 타교인의 수찬, 성찬 준비, 성만찬, 환자에 대한 성만찬과 심방시의 성경, 결혼, 장례, 목사 후보생 승인, 목사의 안수와 취임, 장로의 안수와 취임, 집사의 안수와 취임, 교회 건축 및 봉헌, 오르간이나 성물 봉헌 등을 취급하고 있다. 4장은 기도에 관한 것으로서, 교회력에 따른 기도와 국가 기념일에 따른 기도, 특별 용도나 은혜를 위한 기도, 봉헌 기도, 축도, 용서를 위한 기도, 가족 기도, 등을 예시하고 있다. 마지막 5장에서는 성서 일과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주일 낮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참고로 본 예배서는 주일 낮 예배에 관하여 5가지 형태를 예시하고 있다)
주일 낮 예배 성만찬 예배
예배의 부름 예배의 부름
경외의 기도(Adoration) 기원
십계명
죄의 고백 죄의 고백
용서의 확인 용서의 확인
시편송 영광송이나 송가 또는 찬송
제 1성경 봉독 서신서 봉독
찬송이나 교송 복음서 봉독
제 2 성경 봉독
신앙고백 신앙고백
찬송이나 교송 찬송
감사기도 설교
간구 찬미
중보의 기도 봉헌
성도의 교제 초대사
봉헌 성물 현시(uncovered)
찬송이나 교송 성찬 제정사
설교 예비 기원
찬송 떡을 들어 쪼갬(성체분할)
축도 잔을 듦
집례자 수찬-장로수찬-회중수찬
감사기도
찬송
축도
2) The Worshipbook(1970)
"예배서"는 미국의 Cumberland 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PCUS), 그리고 북장로교회(UPCUSA)가 연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서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미국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만든 장로교 예배서라는데 그 의의가 크다. 그리고 이 예배서는 현대 영어를 예배에 사용하도록 채택하였으며, 찬송도 현대적인 것들로 하였다.
예배의 구성은 첫째, 예배를 위한 준비에서 예배 전 기도, 십계명 등을 기록하고, 둘째, 공중 예배를 위한 순서에서는 성만찬을 포함한 예배, 세례를 포함한 예배, 성례전이 없는 예배에 대한 순서를 먼저 제시하고, 다음으로 순서에 대한 해설이 이어진다. 해설과 함께 된 내용은 주일 예배, 세례, 입교, 성만찬, 아침 기도회, 저녁 기도회, 애찬식, 결혼식, 장례, 안수와 취임식 등이다. 셋째는, 연도가 한 장으로 취급되면서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공동예배서"와 다른 점이다. 연도에는 산상 수훈, 고백의 기도, 중보 기도, 감사 기도, 교회를 위한 기도,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 교회의 이름들을 위한 기도,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국가를 위한 기도, 근로자를 위한 기도 등이 제시되어 있다. 넷째로 교회력에는 강림절, 주현절, 사순절, 종려주일과 성주간,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절, 오순절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로 기념일로서 새해, 교회 연합 주일, 세상과 나눔 주일, 종교개혁 주일, 추수감사절, 국가 기념일 등에 관한 예배를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성서일과, 기타 기도문, 가정에서 사용할 기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일예배 성만찬 예배
예배의 부름 예배의 부름
찬양의 찬송 찬양의 찬송
죄의 고백 죄의 고백
용서의 선언 용서의 선언
응답송 응답송(영광송, 찬송, 시편송)
성령 임재 기도 성령 임재 기도
구약 봉독 구약 봉독
신약 봉독 신약 봉독
설교 설교
신앙고백 신앙고백
회중을 위한 기도 회중을 위한 기도
평화의 인사 평화의 인사
봉헌 봉헌
감사의 기도 초대사
주기도문 감사기도
찬송 주기도문
위탁 성만찬
축도 응답송
찬송
위탁
축도
3) Book of Common Worship(1993)
이 공동 예배서는 1983년 남북 장로교회가 연합한 후, 1989년에 예배 모범을 개정하고 여기에 맞추어서 나온 예배서로서 그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서의 특징을 보면,
첫째, 예전적이면서 자유로움을 인정한다(form and freedom). 예배의 순서를 제시하되 어디까지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에큐메니칼적이다(ecumenical convergence). WCC의 B.E.M. 과 함께 이 예전은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셋째, 개혁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reformed and catholic). 이 예배는 종교 개혁가들의 정신을 따르면서도 기독교의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다.
넷째, 지역적이면서도 우주적이다(local and universal).이 예배는 미국 회중들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기독교 예배의 우주성을 갖고 있다.
다섯째, 이 예배서에는 다른 예배서에 포함된 안수나 취임, 기타 절기에 따른 예배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진 이 예배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 전 기도, 십계명, 예배 인도자를 위한 기도
(2) 주일 예배: 주일 예배 순서와 각 순서에 따른 세부 예문이 제시되고 있다
(3) 교회력: 교회의 절기에 따른 예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4) 세례
(5) 매일 기도회
(6) 시편송
(7) 기도(연도)
(8) 결혼식
(9) 장례식
(10) 목회 예식: 환자 사역, 불참자에 대한 성찬 등
(11) 성서일과
그리고 주일 예배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일 예배 성만찬 주일 예배
모임(Gathering)
예배의 부름
오늘의 찬송 또는 개회 기도
찬송, 시편 또는 영가
죄의 고백과 용서
평화의 인사
송가, 시편, 찬송 또는 영가
말씀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
첫 번째 성경 봉독
시편송
두 번째 성경 봉독
교송, 찬송, 시편송, 송가 또는 영가
복음서 봉독
설교
초청
찬송, 송가, 시편송, 또는 영가
신앙의 확증(신앙고백)
(목회 예식: 세례등)
회중의 기도(중보 기도)
평화의 인사
성만찬
봉헌 봉헌
성만찬 초대
감사기도 대감사기도
주기도문 주기도문
분병
회중의 수찬
파송
찬송, 영가, 송가 또는 시편송
위탁과 축복 기도
이 예배의 몇 가지 특징을 보면, 첫째로, 찬양의 형태를 다양하게 하여 찬송가나 시편송이나 영가나 송가 중에서 선택하여 부르게 함으로써, 예배 인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놓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개혁 교회의 전통에 따라 죄의 고백과 용서가 예배의 시작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가 앞부분과 뒷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점은 회중과의 교류적인 측면에서 좋다고 본다. 셋째로, 칼뱅의 전통에 따라서 성경 봉독 전에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가 있으며, 성경은 현재 전세계의 개혁교회가 함께 쓰고 있는 "공동 성서일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를 따라 세 번 나누어서 봉독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설교 후에 초청의 순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대각성 부흥운동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다섯째는 봉헌, 신앙고백, 찬송 등의 모든 순서들을 설교 후에 둠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께 응답하도록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섯째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예배가 성만찬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 형식에 있어서는 성만찬의 순서를 갖는 예배처럼 짜여져 있다는 점이다. 즉 성만찬이 없는 때에라도 그 예배의 순서에서 봉헌 후에 감사기도를 넣음으로써, 원래 주일 예배는 성만찬이 있는 예배가 원칙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칼뱅을 비롯한 모든 개혁가들이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이다.
III.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장로교 예배의 신학과 그 역사에 대해서 공부했다. 결론은 장로교예배는 개혁교회 전통에 가장 우뚝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말씀을 중심으로 서 있다는 것이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그토록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말씀과 성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회복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개혁교회의 전통에 가장 굳게 서 있는 미국 장로교회의 예배를 전수 받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그 실제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미장로교회의 예배의 모습 내지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부흥운동과 특별히 19세기에 미국 대륙을 풍미했던 Frontier Tradition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은 미국에서의 두 번에 걸친 대각성 부흥운동과 19세기의 "변방전통"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버렸고, 바로 그 변질된 예배의 전통이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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