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관련자료/간증

선교간증2

하마사 2007. 11. 10. 12:56

‘아- 사도 바울의 심정이 이러했겠구나’

 

쯔트라스트 뷰째, 보흐류빗 바스.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설레임으로 떠났다.

내가 한 영혼을 얼만큼 사랑하는가? 어떻게 외국인을 전도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7월23일 인천공항을 떠나 24일 알마티 공항에 도착, 공항에서 16시간을 버스로 이동하여 가라간다 은혜교회 숙소에 도착한것은 오후 1시3분이였다. 도착한 다음날 오후 8시20분 고속버스로 10시간을 달려 다음날 새벽 5시30분에 파브르닥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파브르닥 목사님께서 마중나오셨고 우린 다시 봉고택시로 30분을 더 가 악수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악수는 하얀 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물이 깨끗해서인지 석회석이 섞인물이어서 인지 모르지만 하얀 물이라는 지명을 가진곳이였다.

조그마한 시골도시로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어울어져 있는 조용한 이곳이 낮설지 않고 마음이 편안했다.

워낙 가라간다 교회에서 먼곳이였기에 우리 1순은 열흘동안 복음을 전파할수 있었다. 열흘동안 느꼈던 체험을 다섯가지로 나누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고 부끄러웠다.

밤새 달려 온 탓으로 오후에 땅 밟기를 먼저했다. 길거리에서 전도 할 수 없는 곳이므로 한발 한발 걸으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비한 영혼들을 만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기도하면서 걸었다.

도착 다음날 순장님의 예배인도로 하루를 시작, 4개조로 나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우리는 고려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행이 아킴(그 지방 지도자)의 제재가 없어 길거리 전도는 못해도 고려인집을 찾아 나서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카작인들은 친절했다. 물어보는 말에 대답도 잘해주었고 어떤 사람은 직접 고려인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다. 하루에 2시간 정도 걸으면서 다녔다. 저녁식사후 심방을 가자고 했다.

악수교회 교인인 바사가 친 어머니(발렌티나)집에 가자는 것이다. 믿지 않으시는 분인데 우리가 왔다고 초대하셨단다. 악수교회는 몇 년전만 해도 50여명의 성도가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떠나시고 전도사님들이 계속 바뀌면서 지금은 5-10여명도 안되는 성도만이 교회에 출석하므로 우리팀이 양육을 맡기로 하고 간 곳이다.

초대한 바사 어머니댁은 아파트였고 멋지고 아름다운 분이셨다. 친구(루다)분과 같이 계셨다. 순장님께서 나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무조건 순장님께 순종해야 함으로 떨리지만 차분하게 웃으면서 “쯔트라스트 뷰째(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해주었다(답례). 교육 받은데로 “저는 한국에서 온 엄주인입니다(미나 자붓 엄주인). 만나서 반갑습니다(오첸 쁘리앗 뜨나). 제가 여기에 온것은 카자흐스탄 분들이 우리 고려인들에게 너무 잘해줘서 고맙고 감사하며. 기쁜소식을 가지고 왔는데 듣겠느냐”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 죄에 대하여,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있다’고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했더니 너무도 순수하게 모든걸 다 받아들이고 친구분까지 예수님을 영접했다. 두분의 손을 잡고 더듬거리며 영접 기도를 했다. 두분께서 너무 쉽게 영접한 반면 나의 더듬거림과 훈련부족(통역이 끝나면 기도해야 하는데 통역이 끝나기전에 다시 내가 기도하고)이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고 주변의 모든 분께 부끄러웠다.


둘째, 카자흐스탄 성도들의 정렬적인 믿음과 순수한 심령속에 하나님의 복음을 뿌리내릴수 있는 교역자들의 리더십과 의욕이 조금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가라간다 교회 숙소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기도가 6기30분에 있었다. 우리교회 두배정도 큰 교회였다. 1시간50분 정도 예배시간에 찬양과 율동, 통성기도를 온전히 서서 예배를 드렸다. 셩경봉독시간만 잠깐 앉았고 다시 찬양, 기도, 서로가 축복해 주고.....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었다. 특별히 우리가 왔다고 환영해주며 한분한분 서로 안아주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이슬람 국가에서 예수님을 믿고 이토록 뜨거운 찬양과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대견하기도 하였다. 나에게 온 예쁜 젊은 성도를 꼭 껴안아 주고 한참동안 서로 울었다. 눈에는 눈물이 나왔지만 우린 서로 웃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파브르닥 교회, 악수 교회, 레닌스키 교회 세곳 모두 이러한 모습이였다.

악수 교회는 파브르닥 교회 소속이였기 때문에 파브르닥 목사님께서 레닌스키 교회와 함께 주관하고 있었다. 악수 교회에서 우리들이 왔다는 소식에 옛 교인들이 심방해 달라는 초대가 많이 있었고 가는곳마다 친구분들이나 믿지 않는 친척분들을 꼭 모셔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케 하는 열정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영접한 그분들이 주일날 모두 오셔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가라간다 은혜교회와 똑 같은 모습이였다.

예배 후 기도해 달라는 그들의 순수한 믿음이 가슴이 저며 오도록 아팠다. 주일날 파브르닥 교회에서 11시 예배를 드리고 다시 악수교회에서 오후 5시에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후에는 한사람도 집에 가지 않고 안수기도를 받고 가겠다는 그 믿음, 아픈곳을 위해서,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며 기도해 달라고 한 그 아주머니의 모습, 아기를 낳기 원해서, 5살 짜리가 이 다음 목사님이 되고 싶다면서 정장 차림으로 기도 받기를 원하는 그 모습, 각기 다 다른 이유가 있으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뜻을 알았다. 사도행전 4장 28절 30절 말씀에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다음날 레닌스키 교회(악수에서 레닌스키 교회까지는 30분 이상을 가야한다)에서도 똑같은 광경이였다. 교회 이름만 있고 성도가 없는 교회였으나 우리가 왔다고 믿지 않는 분들을 모셔 놓고 예배를 드렸다. 작은 방에 40여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뜨겁게 안수기도를 했다.(악수교회나 파브르닥교회 레닌스키 교회는 예배당이 있는것이 아니라 가정집이 바로 교회이며 방이나 마루에서 예배를 드린다) 한명 한명 우리 11명의 선교사들이 눈물, 콧물, 땀방울이 범벅이 되어 기도한 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믿지 않는 이들이 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접 기도까지 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뜨겁게 갈망하고 있는데 정작 이분들을 이끌고 갈 교역자들의 열정과 계획이 부족한 듯하여 내 마음이 무척 아팠다.


세 번째,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과 개척교회를 돌아 보았던 그 심정을 이해 할 듯 했다.

떠나오기 전날밤 내가 맨처음 예수님을 영접시킨 발렌티나가 케익을 손수 해 가지고 왔다. 주일날 해 온 케익을 다른 교인들이 다 먹고 우리들이 먹지 못했다고 다시 해 온것이다. 너무 고마웠다. 감사하다고 했더니 내년에 또 올것이냐고 물어보는데 내 가슴이 뭉클했다. 난 약속은 못하지만 우리 기도하자고 했다. 떠나오는 날 파브르닥 교인과 악수 교회 레닌스키 교인들이 우리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해주었다. 식사후 헤어지는 기도모임을 가졌다. 찬양 기도 서로 축복해주고 한사람 한사람 껴안고 헤어지기 싫다고 모두가 울었다. 너무 많이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 파브르닥 교회 목사님이 고려인이지만 한국말을 잘못해 더듬거리며 내년에 ‘또 오실거냐’고 물어오는데, ‘아- 사도 바울의 심정이 이러했겠구나’ 하고 그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날 그들의 간략한 느낌을 소개한다.

악수교인: 가라간다 은혜교회 축제에 갔었는데 그 축제가 바로 우리 악수교회 축제와 똑 같았다. 너무 감사하다.

파브르닥 교인 지안냐 : 다른나라 사람이 말도 통하지 않은데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감동 받았다. 하나님 사랑을 깨닫는것 같다. 자꾸 눈물이 난다.

파브르닥 교회 사모님 : 하나님께 감사하다. 많은 시간 같이 있지 못했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한것 같다. 많은 선교팀이 왔다갔지만 제일 기억에 남을것 같다.

악수교회 전도사 제냐 : 열악한 환경에 잘 참아주어 고맙다. 새롭게 태어난것 같다. 많은 힘을 얻었다. 열심히 하겠다.


네 번째, 선교사로써 해 주고 픈 일이 있었다.

120년 전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이 생각났다. 그때 우리나라의 열악한 환경은 지금 카자흐스탄 보다 더 했을때 우리에게 학교와 병원을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세워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 주었고 오늘날 그 기초가 우리나라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것처럼 카자흐스탄에 식생활과 위생생활에 대한것을 알려 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위생관념이 적어 행주를 삶지 않는다든가 비닐식탁보 위에 그냥 빵을 놓고 먹는 비 위생적인 방법, 주식이 빵인데 빵에 잼을 바르고 그 자리에서 다시 초코렛이나 과자를 먹는 습관 등 잘못된 것을 모두 알려주고 싶었다. 20-30대가 되면 치아가 거의 없고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은 황금이빨을 번쩍거리는 우리나라 칠십년전의 모습인데, 이 모든 것을 바꿔주고 싶다. 건강한 치아를 가지고 오랬동안 살수있는 그러한 예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들의 수명은 확실친 않지만 60살 정도라고 한다.


다섯 번째, 제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준 귀한 선교였다.

‘내가 한 영혼을 얼만큼 사랑하는가? 또 외국인을 전도할 수 있을까?’ 했던 염려와 두려움은 한낮 기우에 불과했다.

파브르닥교회, 악수교회, 레닌스키교회 세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 마다, 또 한분 한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수 있었던 일, 우리들의 기도를 그렇게 받기를 원했던 그 모습속에서, 아- 이 모든일은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구나, 나 같은 부족하고 부족한 나를 들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북을 주시기 위한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셨구나, 너무 감사했고 가슴 벅찬 일이였다.

나의 작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달려가 도와주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내 남은 여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우리 며느리가 7월28일 날이 아기 출산 예정일이었다. 4월달에 선교 신청을 할때 주변에서 며느리가 처음 아기 출산을 하는데 시어머니가 없어도 되느냐고 못가게 했다.

7월21일 토요일 며느리가 우리집에 와서 이제 진통만 있으면 산부인과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날 난 아기에게 할머니가 없어도 엄마 귀찮게 하지 말고 건강하게 태어나 이다음에 할머니와 만나자고 기도하고 떠났다. 늦어도 8월2-3일경에 태어날줄 알았는데 우리아기는 내가 8월6일 도착한 다음날 8월7일 할머니가 옆에 있는 자리에서 건강하게 태어났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언 16: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한 내편이 되셔서 손자에게와 며느리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도착한 다음날 태어나게 하신것이다. 할렐루랴

이토록 멋진 하나님, 하나님께 모든 삶을 맡기는 것이 가장 기뻐하신다는것을 깨닫게 해준 귀한 선교였다. 끝으로 많은 간증거리가 있으나 다 쓸수 없고 다만 그곳에 작은 불씨를 붙여주고 그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성령의 불꽃이 되어 카자흐스탄에 주님의 축복이 넘칠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던 발렌티나, 주나, 올리아(고려인), 올가, 지냐, 올기야, 리얀나(고려인 의대생), 리얀나 아빠, 갈라, 리나, 그 외 우리 선교사님들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던 모든 분들의 믿음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난 오늘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엄주인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