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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손해보기

하마사 2007. 9. 8. 08:46
  • [시론] 예수 믿고 손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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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민 연세대 교수·신학
    입력 : 2007.09.07 23:00
    • 도무지 예수를 믿고 손해볼 요량이 전혀 안 보인다. 한국 기독교의 선교나 전도 용어는 ‘예수 축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수를 믿으면 이익이 오고, 부자가 된다. 기도한 대로 성취되고, 못 나을 병도 나을 것이다. 기독교회에 입회하면 형제자매로 공동체가 되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어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익은 한량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 손해가 없고, 최소한 보험에 드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이런 논리로 이룬 전도의 성과도 정체되거나 감소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내부의 급성장과 더불어 해외 선교의 꿈에도 부풀었다. 대단히 빠른 전환이며, 기적 같은 변화이다. 그런데 참된 선교가 지닌 진정한 헌신이나 성숙된 희생보다는 과시와 우위라는 양적 성취의 추구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일각에선 한국 기독교의 해외 선교 프로그램이야말로 ‘신제국주의 선교’라고 혹평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지척의 이웃이 지닌 고통에 인색하고, 직접 속해 있는 사회의 그늘에 고개를 돌린 채 해외 선교의 허영에 부풀어 있다는 비판에도 직면해 있다.

      올해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치는 대부흥운동이 100주년 되는 해이다. 1903년부터 시작되어 1907년 절정에 이른 이 사건의 의의는 한마디로 교회와 크리스천의 잘못에 대한 진솔한 회개와 반성이었다. 당시 한국 주재 선교사 하디는 자신의 ‘교만’과 ‘마음의 포악함’ 그리고 ‘신앙의 부족함’을 자책했다. 선교 대상인 한국인들에게 취한 오만했던 태도를 고백한 사건이었다. 선교사의 죄책 고백은 한국인 지도자 길선주의 회개와 고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회개운동이 교회의 갱신과 그 결과로서의 부흥을 가져다 준 것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선교 수용 이후 최대 성장의 절정에서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위기는 한국 기독교의 교만과 독선, 이기심에 연결되어 있다. 한국 사회 다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 헌신적 공동체로서의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대로라면 서구의 기독교가 걸어 간 길과 같은 한국 기독교의 좌절을 지켜보아야 할지 모른다.

      기독교의 개혁은 메시지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다. 한 통계에 의하면 현재 한국 교회 강단의 80% 이상 설교가 ‘예수 축복’의 주제라고 한다. 예수를 믿은 자가 치르는 피땀 어린 파종(播種)은 없고 그 열매의 단맛만 거두는 축복의 메시지만 난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역사 안에는 대속(代贖)과 수난자로서의 전통도 강하게 남아 있다. 단적으로 3·1운동 당시 기독교는 소수였으나 이 운동의 결과로 짊어져야 했던 책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거기에는 당시 한국 교회의 건강한 메시지가 가장 큰 힘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일이 이익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참 은총의 길로 가는 것이라는 성숙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죽어야 될 자리, 손실을 보아야 할 자리가 있다면 예수를 믿는 자들이 먼저 나서야 할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

      기독교는 위기가 기회가 되는 종교이다. 작은 모퉁이에서부터 ‘예수 믿고 손해 보기 운동’이 전개된다면 한국 기독교의 희망은 살아날 수 있다. 진정한 운동이 벌어지면 한국 사회가 크리스천과 교회를 더는 이기적 집단으로 보지 않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운동의 과정에서 저 100 년 전 이 땅의 선교사들이나 크리스천들처럼 회개운동도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크리스천들이여! 바로 이 역사 안에서 십자가를 먼저 질 용기가 있는가? 다른 이에 앞서 겸손히 나아가 손해볼 자신이 있는가? 여기에 참으로 손드는 자 열만 찾는다면(창세기 18: 32) 한국 기독교에 빛 다시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