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교회갱신
조 종 남 목 사
(전 서울신대학장)
서 론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 교회는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각 교회마다 성도들로 가득 찬 모습을 보면서 온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이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신학교 숫자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1년에 무려 8,000명의 목회자가 배출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통한 사회사업, 학교 등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최근에는 해외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알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비판의 소리와 함께 새롭게 발전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의 풍조와 성공지향주의 등 한국 교회는 새로워져야 하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새로워지는 역사가 동반되지 않는 성장은 타락을 심화시키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도모하는 진정한 교회 발전은 ‘새로워지는 역사’와 ‘더불어 자라나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명한 신학자 칼 헨리는 말하기를 “참 복음주의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답게 드러나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갱신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앞서간 역사에서 교회 갱신과 새로워짐을 가져오는 부흥운동의 역사적 모델로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들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교회를 새롭게 하는 데 역사적인 모델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고 봅니다. 웨슬리야말로 18세기 영국의 부패했던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교회를 부흥시킨 신학자요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18세기에 교회를 새롭게 했던 요한 웨슬리의 신학과 그의 운동을 통하여 교훈을 얻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1. 교회 갱신의 모델로서의 웨슬리 부흥운동,
웨슬리 부흥운동의 영향-교회와 사회의 갱신과 부흥
18세기는 부패한 사회였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런던거리의 네 집 가운데 한 집이 술집이었습니다. 닭싸움, 도박, 술로 흥청거렸고 감옥은 죄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미국에 파는 노예 매매를 영국이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현실 속에서 교회는 모든 사회악에 대해서 침묵할 뿐 아니라 사회가 교회의 말을 듣지도 않았고 교회 자체도 타락해 있었습니다. 당시에 교역자들은 좋은 교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뇌물을 주고 교회를 옮기는 등 교회의 타락이 가속화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 만큼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 웨슬리의 갱신의 운동에서 기인했다고 일반 역사가는 말합니다. 그는 힘을 상실한 교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었으며 교회를 새롭게 부흥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의 영향은 영국 사회 전반에 미쳐서 철학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스나이더와 찰리 스트라같은 학자는 말하기를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 웨슬리의 신학과 운동은 새롭게 하는 운동이요 새롭게 하는 신학이었다고 합니다.
재발견된 웨슬리 신학의 성격-산신학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를 복음화하자고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세계의 여러 교파에서 연사들이 왔는데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의 말에 의하면 이들 연사들 가운데서 요한 웨슬리의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교회의 갱신과 세계의 복음화에 있어서 요한 웨슬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 웨슬리가 18세기의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노력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신학자로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경전이라 믿고 모든 신학의 근거가 성서에 있다고 믿는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가지고 신학을 정립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루터나 칼빈이나 요한 웨슬리나 똑같은 줄기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신학을 말하거나 교리를 말할 때에 두 가지로 분리해서 말해야 합니다.
첫째는 교리 및 신학의 대의와 둘째는 그 교리의 해석 내지는 적용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구원을 무엇으로 받습니까?” 라고 할 때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습니다.”라는 것은 모두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교회 및 신학의 대의입니다. 나아가서 그 은총이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그리고 그 은총이 역사할 때에 인간은 무슨 책임이 있고 무엇을 하느냐는 그 적용과 해석을 다루는 분야가 교회의 해석 내지는 적용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구분해 본다면 줄거리를 말하는 대의 부분은 모두들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적용과 해석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고 강조점이 다릅니다. 여기에서 재발견된 웨슬리 신학의 위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웨슬리 신학의 첫 번째 특징은 성서가 모든 신학과 설교의 기본적인 Text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타야민은, 웨슬리의 신학과 설교라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 따른 학파 중 고대 학파나 근대학파, 모라비안파 등 어떠한 학파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이기 전에 신학에 있어서 유일하고도 순수한 원천인 성서를 통하여서 그의 교리와 설교의 메시지를 찾은 분이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풀이함에 있어서 이론적인 추리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뜨거운 신앙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런 신학을 개진함에 있어서 그는 설교를 통하여 전도하는 현장에서 신학을 전개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관심은 논리적으로 추상적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수립한 것이 아니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의 체험과 연관시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논리가 있다면 우리의 생활과 어떻게 연결시킬수 있겠는가 라는 면에서 와이코프라는 신학자가 말했듯이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해 오는 신학의 대의를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목회생활에 연관시키는 ‘산 신학(Living Theology)’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정통신학에 살과 피를 붙여서 적응성 있는 신학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웨슬리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이어서 산 신학을 수립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웨슬리 신학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근대에 이르기까지(1940년에 이르기까지) 웨슬리를 신학자가 아닌, 전도에 열심이고, 조직을 잘 활용한 분으로만 일반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느냐면 건전한, 새롭게 되는 설교나 신앙운동에는 언제나 건전한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최근에 요한 웨슬리의 신학이 재발견되면서 요한 웨슬리가 신학자가 아닌 전도자요, 조직의 행정가라고 불리어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792년까지 요한 웨슬리가 살면서 미국에 건네준 신학은 은총과 성서에만 근거했고 은총을 절대 강조하는 신학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인간이 응답해야 된다고 인간의 책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때에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주장한 내용이 인간은 도덕적인 인간이고 인간에게는 자유와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인본주의 입장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전통주의 신학에서는 사람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학이 나오게 되니 그것이 과장되어 인간의 자유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후대 감리교인들의 주장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은 약화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강조되고 인간은 마치 도덕적인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1935년 조지 세일이라는 학자가 요한 웨슬리의 신학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독일이나 영국에서 웨슬리에 대하여 연구해보니 웨슬리는 은총만을 강조하는 신학자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교수하는 사람은 신학자이고 목회하는 사람은 신학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철학적인 술어를 사용하면서 철학적인 책에 연관시켜 말하고 신학적인 술어와 연관시켜 말하면 거기에는 신학이 있고 쉽게 설교하는 사람에게는 신학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 사람들의 선입관 문제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체계에 의하여 신학을 수립했고,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요한 칼빈은「기독교강요」를 저술했다고 해서 신학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 웨슬리는 신학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공부한 다음 돌아와서 전도사 시절에(20~30대) 설교한 노트를 보았습니다. 강성수 목사님을 모시고 목회를 했는데 이 목사님이 병이 나서 제가 반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 노트를 보고서는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철학과와 신학과를 나온 젊은 전도사의 설교 원고를 보니 나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이 있었습니다. 설교가 철학적이요 학자의 이름만 인용했던 것입니다.
그후 저는 설교를 아주 쉽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당시에 제게 무슨 신학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지만 내 나름대로 아주 일관된 신학의 뒷받침이 있습니다. 그때의 설교는 신학적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설교는 신학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학적인 술어를 쓰고 신학체계를 쓰면 신학이 있다고 하고 쉽게 이야기하면 신학이 없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라는 도전을 받고 지나온 근대 신학 세계는 달라졌습니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것은 그럴듯하지만 거기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관념론적인 추상적인 논리에 대한 혐오증을 느끼는 신학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무슨 신학이 있겠느냐 신학적인 내용을 보려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보아야한다느니,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려면 호세아서를 읽어 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치심 그리고 모든 신학의 씨앗이 거기에서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쉬운 이야기 속에 정말 심오한 모든 신학의 씨앗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러분의 설교 가운데도 훌륭한 신학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전도나 목회 그리고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웨슬리가 훌륭한 신학자라는 사실이 재발견되었습니다.
윌리엄 홀든이라는 캐나다 루터란 신학교의 교장이 시카고에 있는 신학교의 방문교수로 있다가 웨슬리를 공부한 다음에 놀라운 글을 썼습니다. “내가 전에 알기에는 웨슬리는 전도자이고 부흥사여서 신학이 없는 줄 았았는데 웨슬리를 공부해 보니 그에게 능력 있는 신학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했습니다. 18세기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 메시지가 있었다고 하면 그 뒤에 건전한 신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웨슬리에게 신학이 없는 줄 생각하고 있었느냐 하면 웨슬리를 소개하는 그릇된 감리교인들 때문에 웨슬리를 잘못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웨슬리는 성서에 입각하여 그것이 체험적으로 이해되고 설교에서 개진된 건전한 신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오늘날 교회를 진정으로 새롭게 하고 발전시키는 메시지 속에는 건전한 신학이 뒷받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침에 있어서 제 나름대로의 주관이 있습니다. 1986년에 서 베를린에서 세계회의가 열렸습니다. 저는 이 회의에 참석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개회사를 하던 헨리 박사가 말하기를 “오늘에 요구되는 교회 지도자상은 무엇입니까? 목회자들, 설교자들에게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신학이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안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학자는 동시에 전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학 자체에 머물러서는 뜻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면에서 신학을 위한 신학은 신앙을 냉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제가 가끔 미국에 가면 가슴이 뜨거운 미국 친구들이 “조 박사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물을 때 조직신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뜨거운 신학을 얼마나 냉각시켰느냐고 반문합니다. 신학은 곧 전도에 직결되어야 하며 신학자는 곧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전도자는 동시에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과 전도를 겸한 이상적인 모델이 역사에 있어서 누구냐고 할 때에 나는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하고 그후에는 요한 웨슬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의 교회에서 요청되는 교회 지도자의 이상형은 전도자인 동시에 신학자, 신학자인 동시에 전도자여야 합니다.
2. 웨슬리의 부흥운동의 특징과 의의
성서 중심의 전도
가슴이 뜨거운 전도자 웨슬리의 메시지는 가슴 뜨거운 체험을 강조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의 신학의 개념은 우리에게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포함되고 호응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웨슬리의 전도운동 자체가 바로 가슴 뜨거워지는 체험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729년부터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를 재현시켜 볼까 하고 옥스퍼드에 있는 엘리트들을 데리고 거룩한 그룹을 만들어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찬예식을 하며 노방전도를 하고 감옥에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던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메서디스트라고 하면서 규칙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에 신개척지를 미국에 개척하는 중에, 그곳의 장군이었던 오거스 장군과 그 일행들의 꿈은 자기들이 미국에 가서 개척하는데 선교사업도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최고의 엘리트 목사를 데리고 가려고 찾았는데 그들이 찾은 사람이 바로 요한 웨슬리였습니다. 맨처음에 웨슬리는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하기를 영국에는 감독이 있고 제도가 있어서 소신껏 일을 하려고 할 때 제약을 많이 받는데 미국에 가면 소신껏 일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여 옥스퍼드의 엘리트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는 미국에 건너가는 중에 폭풍우를 만났고 조지아 주에 가서 선교에 실패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행한 학자의 메시지는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웨슬리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는데, 영국에서 간 모든 기독교인들이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독일에서 런던을 거쳐 미국에 가는 모라비안 교도가 25명쯤이 있었는데 웨슬리는 지금까지 그들을 무식한 친구들이라고 경시했었습니다. 그런데 푹풍을 만나서 죽게 된 지경에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관심과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포함하여 영국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 떨고 있는데 그들은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옥스퍼드의 교수가 자존심을 버리고 그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섭지도 않습니까?” 그때에 모라비안 교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예수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할 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웨슬리는 거기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러한 믿음이 없구나. 여름철의 믿음 즉 평탄할 때에는 큰소리를 치고 설교하는 믿음이 있지만 겨울철의 믿음 즉 죽음에 임박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이 믿음이 없지 않는가’하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웨슬리가 조지아 주 선교에 실패하고 이 믿음을 찾기 위하여 모라비안 교도를 찾아가서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쉽게 말하면 신학교 교수가 기도한다는 권사를 찾아가 어울린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믿음이 그리워 찾아간 것입니다.
1738년 5월 14일에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이지만 모라비안 교도가 참석하는 집회에 참석해서 마틴 루터가 쓴 주석의 서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고 말할 적에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그래 예수가 모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바로 내 죄를 사하신 구주시구나.’라고 고백하는 이 뜨거운 체험과 확신이 있게 된 다음에 훼슬리의 생애는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종교적인 배경, 교육적인 배경, 그의 경력도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웨슬리를 공부해 보면 이 가슴 뜨거워지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이 체험이 웨슬리의 사역에 큰 변화를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때가 차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을 무려 193회나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웨슬리의 사역은 달라졌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볼 때 교인들이 많이 모입니다. 교회는 교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체험 없는 신자로 가득 차는 것을 마귀가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맞는 것입니다. 재정적인 곤란이나 핍박이 교회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뿌리째 흔들어 망하게 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신앙 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장악할 때에 교회가 망하게 된 것을 우리가 봅니다. 여기에 우리 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명분뿐인,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이 변해서 가슴 뜨거운 체험을 하고 분명한 신자로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동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전도의 범주를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E-1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E-2는 타문화권에 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E-3는 타문화권에 가서 외국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신학자들이 새로운 낱말을 만들었습니다. E-zero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소위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진짜 신자로 만드는 전도입니다. 오늘 사역자들에게 무엇인가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을 믿고 세례 받은 진짜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을 믿는 정회원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에 비로소 너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이 될 때에 교인의 숫자는 많아지고 재정이 많아질 수는 있지만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와같이 웨슬리가 가슴 뜨거운 신앙을 체험할 때에 그는 전도를 하러 나갔습니다. 대학교수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이 가슴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될 때에 가장 큰 고민은 모라비안 교도의 말인, 믿으면 구원얻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문명 사회에서 어떻게 그냥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려울 때마다 성경을 살펴보고 원어로 연구해 보아도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초대교회가 그렇겠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리가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목회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행위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 양 목회를 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봉사하고 좋은 일을 할 때에 직분을 허락했습니다. 실제로는 행위로 말미암아 교인이 되고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양 가르쳐 왔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 웨슬리였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는 얻을 것 같은데 얻어지지 않아서 죽을 지경에 이르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을 체험해보니 내가 구원 얻는 것은 믿음으로 받은 것이고 선행은 그 결과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나오는 단순한 이야기들을 믿게 된 것입니다. 웨슬리가 이 뜨거운 체험을 하고 전도하는 신학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순순한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 진짜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가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가슴 깊이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 체험을 하고 나서는 진짜로 성경의 말씀이 맞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전도 사역을 4기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제1기는 1725~29년, 제2기는 1729~34년, 제3기는 1734~38년, 제4기는 1738년 이후입니다.
처음에는 세례 받고 교회에 나오므로 회개하라고 예수 믿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행위의 규범에 따라서 행동할 것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했더니 조금 나아졌습니다. 웨슬리는 말하기를 1738년 체험 후부터 처음부터 끝까지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결론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내용으로 설교했더니 사람들이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마른 풀에 불이 붙듯이 되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설교자들이 확신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복음을 전할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거창한 교파들의 교인들이 40~50%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신있게 전하는 교회들은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순순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 유일성에 근거해서 메시지를 확신있게 전할 때 사람과 교회가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성서 중심의 설교
웨슬리의 생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한때에 자신이 초대교회를 재건하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보다는 교부들의 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는 가슴 뜨거운 체험을 한 다음에는 이것을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교적 성경 이외에는 깊이 연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을 향하여 Homo Unius Libri(한 책의 사람)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웨슬리는 고대 교부들의 글과 신학책을 더 많이 읽은 것을 회개하고 성경 중심으로 돌아간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신학책을 공부하지도 말고 읽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분명한 메시지와 신학의 주된 재료는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볼 때 새로운 신학의 부흥이 가능케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그대로 믿고 외칠 때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웨슬리가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 기독교, 성서적인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내용도 거의 성경 구절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에 입각한 성경 중심의 설교였습니다.
웨슬리의 성서 해석의 원리
웨슬리가 가졌던 중용한 성서 해석의 원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해석 원리가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뱅겔의 성서주석을 참조했지만 복잡한 것들을 제외하고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되는 중요한 것을 간추려서 썼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중요한 성경 해석의 원리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인 관주성경의 활용법에 근거해서 해석을 하는데 그래도 분명치 않으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교리들을 조화있게 해석하도록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성경을 보면 예수가 모든 사람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등의 내용에 조화를 이루며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은 부정할 수 없는 기둥입니다. 그는 설교를 위한 준비로서 성경, 신학 강의를 위한 성경이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주실 뿐 아니라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니 내가 말씀을 듣겠습니다.’라는 자세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신도 훈련을 통한 총동원 선교
웨슬리는 평신도 훈련을 통한 총동원 전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에 들어와서 평신도 훈련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18세기까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만인제사장설인데 실질적으로 활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평신도가 설교를 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가 외쳤던 만인제사장 이론은 하나의 표현이고 실제로는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웨슬리 운동에서는 평신도들을 철저하게 훈련시킬 뿐 아니라 평신도들을 철저하게 동원시키는 총동원 선교를 한 것이 웨슬리의 선교운동의 특징입니다.
웨슬리는 신자들에게 문을 넓게 열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앞으로 다가올 진노를 피하기 원하는 사람은 다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역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역자들은 철저하게 매 예배 때 마다 그의 신앙을 확인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신자들을 환영하였습니다. 이들을 12명씩 그룹을 이루게 하여 속회로 모이게 하였고 그중에 20%는 더 철저하게 훈련시켰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고 은혜받은 지도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특수한 핵심 구성원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교회 운동에 철저하게 헌신하고 웨슬리에 절대복종하여 재산까지 공동체를 위하여 내놓는 핵심 구성원이 된 것입니다. 이들 세 그룹이 돌아가면서 신자들을 훈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배출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 명의 안수받은 목사 아래 45명의 평신도 전도자를 따르게 하여 순회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전도가 평신도가 활동하는 선교구조로 바뀌어야 된다는 말을 합니다. 미국의 감리교가 침제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이와같은 band movement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평신도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들을 훈련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활동하도록 하여 총동원 체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1989년에 필리핀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2차 로잔대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평신도인 중국의 ‘류’라는 사람이 전도신학에 대한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그가 발표한 내용에서 전도자의 타입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는 개구리형이고 다른 하나는 도마뱀형입니다. 개구리는 목사라고 합니다. 개구리가 어느 장소에 있다가 파리가 지나가면 덥썩 낚아채 가듯이 목사는 개구리형에 속합니다. 그리고 도마뱀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파리를 찾아가서 잡아 먹는 것처럼 평신도는 도마뱀형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2~13절에 보듯이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을 훈련시킨 다음에 전도자로 세워서 주님의 몸을 세우는 데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활동은 평신도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목회자와 전도 대상자와의 커뮤니케이션 갭의 문제입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신도와 평신도는 대화가 통합니다.
제가 한번은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영락 장로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 최장로라는 분이 있는데 공부를 많이 했고 특별히 청년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신학공부를 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식사를 하면서 하는 말이 청년부에 교회 중직자의 아들이 있는데 그가 해서는 안될 이상한 짓만을 골라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권고하기 위해서 심리학 책을 보고 데리고 가서 식사도 사주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도무지 듣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그 청년과 친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에게 친구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아무리 권면했는데도 듣지 않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말했더니 자기가 한번 이야기 해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애를 써도 안 되던 것이 친구가 가서 얘기했더니 그냥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기들끼리는 통하는데 우리와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소한도 교회에 나와서 목사의 말을 이해하는 신도들이 스스로 도마뱀식의 전도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자각을 하고 움직일 때에 대화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의 문제점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없다는 것입니다. 유명하고 전통이 있는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다른 데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를 동원해서 훈련시켜 각 구석구석까지 복음이 전달되도록 선교구조를 과감하게 바꾸어 시행해야 합니다.
사회참여를 통한 행동의 선교
웨슬리는 처음부터 말로 전도하는 것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사업 그리고 그들에게 직업을 구해주고 정치가들의 부정을 지탄하는 운동을 같이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의 선교의 메시지의 중심이 성결에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그가 이와같이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참여를 통한 행동의 선교를 수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12명으로 구성된 속회에서 1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데 이들이 모일 때에는 언제나 빈손으로 오지 않고 헌금을 가지고 왔으며 1시간은 봉사를 했습니다. 자기의 신앙점검과 예배 그리고 돈을 가져왔고 봉사를 했습니다. 이때에 돈은 건축헌금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사용되어지는 돈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말과 행위가 조화된 선교였습니다.
최근에 조경철 목사가 번역한 마크 브르트의「요한 웨슬리 사회윤리」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요한 웨슬리는 처음에 방직공장을 사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주일날에는 예배를 드리지만 다른 평일에는 고아원과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곳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예배와 구제사업을 동시에 행했습니다. 웨슬리는 병원을 설립하고 노예제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데 있어서 선각자적인 역할을 한 분이라고 에드워드는 말합니다.
오늘의 교회사역에 있어서 신뢰성(credibility)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웨슬리가 강조했듯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입니다. 18세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믿음으로 구원은 받는데 행동을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의 이원성이 문제입니다. 심지어 18세기에는 도덕 폐기론까지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무슨 짓을 하든지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웨슬리 운동은 encounter로 나갔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주장했지만 그것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의 새사람 됨을 강조했습니다.
로잔대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선교의 과제를 보고 모델을 본다면 우리의 선교의 과제는 말로 전도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참여도 동시에 있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논리적 우위성은 전도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회참여에 대한 부르짖음이 없었는데 웨슬리의 사역에서 만큼은 사회참여가 대단히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성결의 은혜로 이끄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는 매우 좋게 나타났습니다.
물론 저의 선입견이 있지만 오늘 한국 교회가 사회참여를 부르짖고 사회봉사를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거나 그것이 없이 사회참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다시 19~20세기에 사회복음이 가져왔던 자리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걱정이 생깁니다. 웨슬리는 수많은 사회봉사와 사회 정치운동에 참여했지만 그의 핵심은 늘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지는 거듭남과 성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사회참여는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지는 거듭남과 성결과의 조화가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성걸을 강조한 부흥운동
신학이 없는 건전한 메시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신학의 특징은 첫째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을 강조하고 인간의 완전한 타락과 죄를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총만이라고 하면서도 이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 전하는 전도의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구원을 받지만 동시에 특권으로서 성령의 증거로 인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신앙생활의 원동력(dynamics)을 주었습니다. “당신의 구원에 대한 확증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로마 가톨릭에서는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사를 드리지만 마음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반대로 모라비안 교도나 신비주의자들은 뜨거운 체험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이 마귀에게서 오는지 성령의 체험으로 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거기에 한편에서는 당신이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되었다는 신학을 주장하여 인간의 신앙의 확신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이들 배경에서 웨슬리의 놀라운 공헌은 성령의 증거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점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령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이룩하신 분이라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체험을 통해서 보니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성령의 특징 하나는 성령은 증거하는 사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 이하에 보면 “그의 영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증거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림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현재의 고난은 장래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같이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확신이 있기 때문에 힘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성화의 교리입니다. ‘은총으로 인하여 받는 믿음’의 강조와 더불어서 ‘사랑의 역사’를 통합시킨 것입니다. 결국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거듭난 신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갈등 속에서 삽니다. 한 예로 로마서 7장 15절 이하의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바 악은 행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내 속에 죄의 세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고백하는 것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 7:24)라는 갈등의 외침입니다. 이 갈등 속에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느냐에 따라 학파의 해석이 나누어집니다.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케직파의 주장에 의하면 이 갈등은 영화를 받은 다음에 해결되므로 거듭난 사람들은 그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어떤 학파는 그것은 믿기 전에 상태라고 보면서 믿은 후에는 극복된다고 주장합니다. 웨슬리의 주장은,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볼 때에 성경이 외치는 진리는 인간이 죄가 많아서 큰일났다고 말하나 죽는다는 내용은 없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외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5절에서 육과 영의 긴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리로다.”라고 말하며 승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로마서 8장 1절~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하면서 이 갈등에서의 승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웨슬리가 강조하고 해석하는 성결입니다. 당시의 모든 메시지는 거듭나라고 외치는 데서 끝났지만 웨슬리는 주장하기를 거듭났으면 그곳에 머무르지 말고 더 높은 데로 나아가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의미로 말하면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아서 승리를 얻고 내재적인 죄에서 씻김을 받아야만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웨슬리는 거듭나지 않고 깊은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안타깝게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성결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이 그 결단에로 나아갈 때에 교회는 부흥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는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성령운동, 성령 오순절 운동의 영향을 받은 교회이기 때문에 감리교든 침례교든 성결교회든 성령의 충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웨슬리는 성령 충만을 이야기하면서 내재적인 죄에 대한 갈등을 벗어난 승리요, 승리의 삶임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자들을 참된 기독교인으로 만들 뿐 아니라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며 활동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라 말합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믿음과 행위의 이원성 때문에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면 성결의 은혜와 생활로 연결되는 성결의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이 성결의 메시지를 온전한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윤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상적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결을 신비적인 단순한 성결로 보지 않고 윤리적인 생활과 연결된 성결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4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고 한 것은 곧 윤리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에 나타난 성결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깨끗함을 받지만 동시에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알고 과부를 돌보아 줄 수 있는 생활과 연결된 성결을 강조합니다. 이 성결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교회에서 부흥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실제로 사회의 갱신과 사회에 공헌하는 역할을 했다고 모든 학자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웨슬리가 주장하는 성결론의 특징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인정받고 힘을 얻는 것과 동시에 성결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개인의 윤리 생활 사회생활로 자연스럽게 뻗어나가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도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정말 존경받는 교회가 되려면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웨슬리의 교회를 보는 시각은, 교회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를 타락한 교회라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사람과 목회자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전통적으로 공교회이므로 주어진 거룩함, 객관적인 거룩함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시며, 거룩한 목적에 서 있기 때문에 교회는 객관적으로 거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거룩한 교회는 역사 속으로 들어오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락했습니다.
1744년 8월에 교수로서 옥스퍼드에 있는 큰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그는 “교회는 다 부패했습니다. 영국교회도 부패했습니다. 옥스퍼드도 부패했습니다.”라고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런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제지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초대교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을 때부터 교회는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거룩성을 대변하는 사도성과 사도적인 메시지가 변질되어 선포되는 경우가 많고 교리가 많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교회가 타락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순순한 믿음의 교회를 구성할 때에 거기에서 벗어난 신자들을 보면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교회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8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시온산을 내려다보며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들이 역겹고 메스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곳이 예언자가 모인 시온산입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인정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부분적이나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락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집어치울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교회관 때문입니다.
스라랴서 8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온산에 거하시겠다고 하시며 그 동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일컫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거룩하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원하는 한 그 교회는 거룩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제가 일반 대학교에서 단과대학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엉망이었습니다. 교수들이 모여서 집어치우자고 합니다. 사제지간에 예절도 없고 법도 없는 이런 곳이 어떻게 대학일 수 있습니까?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을 여전히 대학교라는 부릅니다. 여전히 그곳에서 대학 교육을 하고 있는 한 그곳은 대학교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한 그 교회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명은 거룩한 누룩의 사명입니다. 거룩한 교회로 세우시고 부르실 뿐 아니라 지금 부패한 그곳에서 성결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에 그 부르심에 호응해서 온전히 성결케 만들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결 론
한번은 칠보산에서 젊은 교역자들이 철야기도회를 하는데 말씀을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었습니다. 거기에 대학원을 졸업한 학생들이 10여 명 와서 첫날 저녁에 기도를 하는데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새벽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해서 숙소에 돌아가 말씀을 준비하고 다음날 새벽에 예배드리려고 왔는데 거기에 모인 젊은 전도사들이 예배를 시작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예배를 시작하자고 종용했더니 한 전도사가 말하기를 목사님 오늘 아침에는 솔직히 예배드릴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성심껏 일하는 것은 통하지 않고 줄을 잘 잡아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친 내용은 이상적인 것이고 현실에서는 정치를 잘해야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예배드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주여 저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하고 고민하는데 성령께서 로마서 11장 1~5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고 했는데 그들이 그 꼴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버렸느냐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버리셨느냐 하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엘리야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승리 이후, 이세벨이 엘리야의 제사장들을 잡아 죽이고 엘리야마저 잡으려 할 때 그는 호렙산으로 피신합니다. 시내산에 들어온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고 하며 죽여달라고 간청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겨놓았다고 용기를 줍니다. 남은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이래도 되느냐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는 부르심에 응하여서 새롭게 된 남은 자를 남겨놓았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한때는 모든 사람들을 쓸어버릴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될까봐 남은 자를 남겨 놓으시고 역사하신 분이십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남은 자를 남겨놓으시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타락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겨놓으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이것은 정말로 안 되겠습니다.”라고 안타깝게 부르짖는 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위하여 남은 자를 남겨놓았느니라.” 하시며 그를 통하여 세우신 교회를 거룩하고 새롭게 하는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타락했지만 동시에 거룩한 교회요, 진정 거룩한 교회, 새롭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남은 자가 주 앞에 헌신함으로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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