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본질/전도(선교)

[스크랩] II. 한반도에 복음을 전해준 하나님의 사람들

하마사 2007. 1. 12. 00:07

II. 한반도에 복음을 전해준 하나님의 사람들

1. Robert J.Thomas

그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생으로서 1863년 목사안수를 받고 영국 런던선교회 장로교 선교사로서 중국으로 파송을 받고 중국에 와서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천주교 신자를 만나게 되어 한국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불태우게 되었다. 1866년 7월 토마스선교사는 중국천진에 체류 중인 미국상선 제너랄셔만호가 한국에 상업차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런던선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때의 형편을 적어 보낸 것이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에 가슴 부풉니다... 런던선교회 이사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인간의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약 일주일후,셔만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평양으로 향진하였다. 이때 평양의 문정관이 무역은 국법으로 금하는 것이므로 물러가 달라는 부탁을 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향진을 하자 화승포로 사격을 하기시작하였고 대동강물이 줄어들면서 배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집중적인 불의 공격을 받게되어 모든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하였고 토마스목사도 더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책 몇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처 나왔으나 조선병사인 박춘권에게 붙잡혔다. 그는 그의 칼에 죽임을 당하기 전에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서 성경책 한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 이를 받지 않았다가 되돌아 갈 때 이것을 주워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교회에 영수가 되었다.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의 조사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현을 하였다.

 

9월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시고 산 많은 평양성민 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 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아니라,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그가 죽어 묻혀 있다고 생각하는 쑥섬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1932년에는 토마스목사의 이름 첫자 모양인 "T"자로 예배당을 지어 토마스목사 기념 예배당으로 봉헌하였다. 그는 흑암중에 있던 땅에 한줄기의 빛의 사자로 왔으며, 황무한 조선반도에 한알의 밀알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평양을 거룩한 도성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날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하리라"(사49:8)

2. John Ross 목사(중국선교사)

1874년 산동지역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존로스는 한국을 복음화하려는 비젼을 가지고 지금의 중국요녕성 단동지역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이응찬이라는 조선 청년을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해 첫 결실을 얻는다.

이후에 중국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위해 다섯명의 한국청년을 고용했는데 이들 모두가 기독교인이 된다. 이 청년들의 도움으로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국말로 처음 번역되었고,1887년에는 로스전서라고 불리는 "신약성경 예수 셩교젼서"가 출판되었다.

 

처음 발간된 낱권 성서들은 로스목사의 조력자인 다섯 청년들을 통해 배부됐고 김종성이라는 청년은 자기 고향인 집안현의 안현에 가서 수백권의 성경을 판매하며 전도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84년 로스목사는 김종성의 간청을 받아 안현에 가서 만주와 북한의 접경지역에서 최초로 회심한 한국사람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로스목사의 조력자였던 서상륜,백홍준과 이성하는 계속적으로 발간되는 낱권 성경들을 배포하기 위해서 중국과의 국경지대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 땅을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성경 배포 루트를 살펴보면 세가지 통로가 있었다.

 

첫째로, 적은 분량이지만 만주를 통해 들어온 것과, 둘째로는 선편으로 로스목사가 보낸 6천권의 성경이 인천지역에서 세관업무를 보좌해 주던 독일인 묄렌도프의 도움으로 서상륜에게 전달된 것고, 세째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영국성서공회와 협력해 활동하던 일본인들을 통해 부산과 김해로 반입된 경우였다.

1884년 서상륜과 백홍준은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에 최초의 장로교회를 설립했고 이어서 1885년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소래에 초가 집 하나를 이용해 일명 소래교회를 세워 7명의 첫 세례자를 탄생시켰다.

3. Horace G.Underwood 선교사

안수를 받은 목사로서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선교사인 그는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당시에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올트만 목사가 방문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없느냐고 하면서 그곳에 죽어가는 영혼 1천3백만을 위해 일할 선교사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때 언더우드는 인도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있을 때였다. 얼마후 아직 한국에 갈 선교사가 없어서 선교가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왜 네가 가지 못하느냐?"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후 북장로교회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공식임명하였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1884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하여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그곳에 미리 와있던 아펜젤라와 같이 1885년 4월 5일,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아펜젤라 목사는 그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사망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이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한국에 오자마자 우선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그들을 모아다가 학교로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술회한 바가 있다. 이곳이 나중에는 경신중고등학교가 되었으며 나아가서 지금의 연세대학교를 만들어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할 민족의 지도자들과 신학교를 통하여 많은 교역자를 배출하였다. 1887년에는 한국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그는 한국에 와서 성서번역 사업을 맨 먼저 실행한 선교사였다. 언더우드는 이미 번역된 것들이 중국어 단어로 가득 차있고,형편없는 인쇄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번역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펜젤러와 더불어 그들의 어학선생들의 도움으로 마가복음부터 번역을 시작하였다. 이 언더우드는 전도와 교육,구제,의료,성서번역등 누구보다도 다양하게 열정적으로 한국인을 위하여 헌신하였고 지금도 4대째를 이어 사역을 하고 있다.

4. 개별적으로 온 선교사들

한국에 와서 선교한 이들의 대다수는 대체로 교파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었지만,초창기에는 교파와 상관없이 와서 선교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치 군번 없는 무명용사와 같이 십자가 군병들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먼저 캐나다 토론토 YMCA가 1889년에 파송한 선교사로 Gale이었다. 그는 그해 12월에 내한하여 몇개월을 서울에서 머무르다가,북쪽으로 가서 선교거점을 확보해 보려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부산에 내려가 정착하면서 그곳에서 선교하였다. 그런 그는 생각을 달리해 토론토 대학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 북장로교회에 가입하여 선교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는 곧 서울로 되돌아아 서울에서 성서번역을 하면서 연동교회의 목사로서 일하였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하고 있을 때 역시 토론토 대학 YMCA가 의사 Hardie를 파송하여 부산에 있는 게일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게일이 부산을 떠나게 되자,그도 같이 서울에 올라와 그의 스승이었던 Avison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1898년에 토론토대학과 관계를 끊고 미국 남감리교회에 가입하였으므로,사실상 토론토대학의 한국선교 지원은 끝나게 되었다.

 

또 한 선교사는 독립 선교사로서 독특한 일을 행했던 펜윅이었다. 그는 캐나다인으로 침례교인이었다. 그는 정규교육도, 신학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해외선교를 독려하는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1889년 말에 한국에 왔다. 그는 서울에서 어학공부를 하다가 별로 진전이 없자. 한국인들 속에 살면서 직접 말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솔내로 내려가서 한옥 한 채와 땅을 사서 채소를 길러 먹고 한복을 입고 한식을 하면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이 현지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면서 선교를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쓰기를 "기독교 없이도 한국은 서양의 문화에 윤색되는 것은 덜 바람직한 일 이라고 민ㄷ는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문명만이 제일이라는 문화 제국주의적 환상에 빠진 사람이게 강한 제동을 건 것이다.

 

펜윅은 189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국순회전도단"(The Korean Itinerant Mission)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친구들로부터 후원회를 조직하여 1896년 그 대표로 다시 와서 함경도 원산에 정착하여 선교하면서 그는 외국인이 선교하는 것 보다도 현지인의 선교가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으로 "외국인에 대한 복음전파는 선발된 본국인 신자들이 가장 잘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유명한 선교이론가인 Rufus Anderson이 설파했던 "선교는 토착민을 훈련시켜 하라"고 했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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