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문화계 '블랙리스트'

하마사 2016. 10. 14. 09:17
4억5000만 부 팔린 '해리 포터' 작가 조앤 롤링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는 변변한 수입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며 때론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버텼다고 한다. '해리 포터' 원고도 처음엔 열두 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이런 롤링의 등을 두드려 작가로 크는 길을 열어준 게 스코틀랜드의 신인 창작 지원금 제도였다. 지금 롤링은 '세계 최고 부호 클럽' 멤버다.

▶예술이 고난과 궁핍을 먹고 자란다는 건 옛날 얘기다. 선진국들이 재능 있으나 여건이 어려워 꽃을 못 피우는 예술가들을 위한 제도를 두고 있는 것은 그래서다. 우리나라도 문예진흥기금을 운영하는 문화예술위원회가 있다. 예술가 지원에는 철칙이 있다. 투명하고 공정하며, 될성부른 나무를 골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문화예술위원회는 만족할 만한 점수를 못 받아왔다. 투명성·공정성은 둘째 치고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논란이 따라다녔다. 

[만물상] 문화계 '블랙리스트'

▶1997년 예총(藝總)은 문예진흥기금을 5억8000만원 지원받았고 민예총(民藝總)은 5000만원 받았다. 당시 예총과 민예총 회원 수는 10대1 정도였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예총에 대한 지원은 동결된 반면 민예총 지원은 꾸준히 늘어 2002년 3억5000만원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민예총 지원액은 예총과 같은 수준이 됐다. 2006년 민예총 산하단체에 대한 지원은 22억원으로 예총 산하단체가 받은 19억원을 오히려 넘어섰다.

▶현 정부 들어서도 문예진흥기금 배분을 둘러싼 논란은 심심치 않았다. 심사에서 해당 장르 1등을 하고도 지원을 못 받았다거나 심사위원들에게 특정 작가의 작품을 선정하지 않도록 주문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어제 급기야 청와대가 "○○○에겐 지원금을 줘선 안 된다"며 구체적으로 이름을 적시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내려 보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규모가 9473명이나 된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문화계에선 그 말을 잘 믿지 않는 것 같다.

▶보도에 따르면 '지원 불가' 대상 중엔 세월호 관련 선언이나 선거 때 문재인·박원순 후보 지지에 이름 올린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정치나 이념을 좇는 예술가 중에 예술성이 뛰어난 이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긴 하다. 그렇다 해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에 우호적이냐, 아니냐를 잣대로 누구는 되고 안 되고를 찍어 내려 보낸다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성과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일에 정치가 끼어들어 시시콜콜 이래라저래라 하는 한 진정한 문화 융성은 싹트기 어렵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