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억류됐다가 석방된 재미동포 케네스 배(48) 선교사는 1일 국민일보와 단독인터뷰를 갖고 “북한에 지하교회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배 선교사는 “이는 억류 당시 북한 측 간부가 직접 확인해준 말”이라며 “그는 ‘그것(지하교회) 때문에 문제다. 보위부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느라 혈안이 돼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배 선교사는 이날 서울 용산구 이촌로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잊지 않았다’(두란노) 출간 기자간담회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억류 소감 등을 밝혔다.
그는 2012년 11월부터 2년간 노동교화소와 병원을 오가며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30여명의 직원들과 가정사와 일상생활을 소재로 대화를 나눴으며,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기도 했다.
배 선교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북한 주민들이 외부 세계와 너무 단절돼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면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남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안 믿었다”고 말했다.
기도제목 편지의 인사말인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주씨 성을 가진 자가 누구냐. 배후를 대라’는 심문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나중에 친해진 직원 한 명은 ‘우리 지도자는 자력갱생하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뭘 주신다고 하니 부럽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배 선교사는 북한 정부와 주민은 별개로 봐야 한다며 남북 대화와 교류, 북한 취약계층을 향한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북한 정권이 맘에 안 든다고 기독교인마저 북한 주민을 외면하고 고립시키는 데 동조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변화를 일으키려면 더 많은 소통과 교류가 절실한데, 진심어린 말 한 마디가 그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배 선교사는 현재 북한에 억류 중인 3명의 한국국적 선교사와 캐나다동포 임현수 목사 등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를 촉구했다.
그는 “임 목사님은 병원과 교화소를 오가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며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그들을 지킬 것이고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속적인 사랑을 보일 때 북한이 변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확신한다”며 “억류 735일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소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소망의 끈을 함께 붙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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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선교사는 북한의 노동교화소와 병원에서 성경을 계속 읽었다. NIV영어성경의 밑줄 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들었던 땅이었다. 자신들의 이념과 체제를 주입하려 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로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어떤 비난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너무 모른다고 했다. 자신을 억류한 땅의 주민만은 긍휼히 여기자고 했다. 책을 썼다. 억류기가 아니었다. 세상 어디라도 끝까지 찾아가시는 하나님 사랑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북한을 ‘잊지 않았다.’
케네스 배 선교사는 최근 ‘잊지 않았다’를 출간하고 735일의 억류생활을 공개했다. 그는 반공화국 적대범죄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언도받았다. 6·25전쟁 이후 노동교화소로 보내진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북한에서 17차례나 통독한 영어성경을 보여줬다. 교화소와 병원에서 줄곧 읽고 기도했던 성경이었다. 갈색 가죽 커버는 빛이 바래 있었다. 성경을 펼치자 검은색 볼펜으로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끝 모를 나날을 견디며 읽었다고 했다. 특히 시편 91편을 자주 묵상했다고 했다. 석방 5일을 앞두고 영혼 깊은 곳에서 떠올랐던 스바냐 3장 20절 본문도 읽어줬다. “그때에 내가 너를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At that time I will bring you home)”.
◇수감번호 ‘백공삼 번’, 나는 선교사다=억류의 원인은 외장하드였다. 외장하드엔 6년간의 선교편지와 사진, 동영상이 가득했다. 강도 높은 심문 과정에선 동영상들이 문제가 됐다. ‘불온한 자료’ 중 하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제작한 북한 다큐멘터리 영상이었다. 그 외에도 6년 간 중국에서 사역하며 주고받았던 선교 편지와 사진, 동영상 자료 등이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일명 ‘여리고 작전’이 문제가 됐다. 기도운동의 이름이었으나 북한 당국은 이를 실제 군사작전 계획으로 보고 배 선교사를 위험한 범죄자로 확정했다.
교화소에선 그가 유일한 죄수였다. 수형번호는 103번. 간수들은 ‘백공삼’ 번으로 불렀다. 아침 6시에 기상해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 6일간 일했다. 콩심기 등 농사를 지었다. 도랑을 파거나 교화소 내 석탄 창고에서 석탄을 퍼 날랐다. 여름에는 하천에서 돌을 주워 나르거나 땅을 팠다. 두세 달 만에 체중이 줄었고 영양실조로 평양의 외국인전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석방에 대한 희망도 간헐적으로 보였지만 번번이 어긋났다. 2013년 8월 로버트 킹 특사가 마지막 희망이었으나 북한 정부는 돌연 그의 방북을 거절했다.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해 9월 24일, 배 선교사는 무릎 꿇고 일생일대의 기도를 올렸다. 집에 갈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기도였다. 그때부터 배 선교사는 자신을 심문하는 검사와 간수들, 교화소장, 의사, 간호사 등 30여명과 스스럼없이 지냈다. 가족 얘기부터 일상생활, 미국과 남한 이야기 등을 나눴다. 교화소는 상담소였고 선교지이자 목회 현장이었다.
간수들은 이런 말도 했다. “당신은 죄수이고 우리는 간수인데 왜 당신이 더 기쁜가. 어디서 희망이 나오는가.” 하지만 그를 안타깝게 한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었다.
“한 조사관은 하나님은 들어봤는데 예수는 못 들어봤대요. 그러면서 예수가 남조선에 사느냐, 중국에 사느냐고 묻더군요.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그곳에 예수 이름이 없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의 발치에서=배 선교사는 “하루하루를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면서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이를 한 문장으로 답했다. “고난은 더 이상 주님께 나아가는 장애물이 아니었어요. 고난은 주님의 심장으로 달려가게 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는 억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로 2012년 12월 12일을 꼽았다. 그날은 북한이 광명성 3호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날이었다.
“협조만 잘하면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로켓 발사로 모든 기대가 깨져버렸어요. 하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가장 어려운 날이 가장 큰 소망을 붙잡은 날이 됐지요.”
그의 소망은 북한과 세계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 내에 NGO를 설립, 탈북민 대상 사역을 계획 중이다. ‘4R’로 요약했다. 구출(Rescue) 회복(Restoration) 부흥(Revival) 귀향(Return)이었다.
그는 억류생활 틈틈이 노트 3권 분량을 기록했다고도 했다. 북한의 언어와 성경 묵상, 향후 계획 등이었다. 하지만 석방 당시 모두 빼앗겼다. 이번 책은 틈 날 때마다 들여다봤던 노트의 기억을 되살려 출간됐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국민일보, 201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