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중일 감독과 삼성 선수들, 경기 끝나면 떠나는 관례 깨고 일렬로 도열… 두산 우승 축하
"삼성, 일등은 놓쳤지만 일류" 진짜 스포츠맨십 보여줘
두산이 종합 전적 4승1패로 삼성을 물리치고 정상에 오른 올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선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지난 31일 5차전 경기(13대2 두산 승)가 끝나고 우승의 희비가 갈렸던 잠실구장에서 류중일 감독을 비롯한 삼성 선수단이 3루 측 더그아웃 앞에 일렬로 도열해 두산의 우승을 함께 축하한 것이다. 이들은 우승 세리머니에 여념이 없던 두산 선수들을 향해 갈채를 보냈다. 메달 수여식, 감독상과 한국시리즈 MVP(최우수선수) 시상식에 이어 우승 트로피 전달식까지 약 20분 동안 진행된 행사를 끝까지 지켜봤다.
프로야구에선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준우승팀에도 시상을 했다. 하지만 우승 세리머니를 지켜봐야 하는 2위 팀의 '괴로움'을 고려해 1위 팀만 시상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꿨다.
삼성이 그라운드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준우승팀은 경기가 끝나면 바로 짐을 싸서 떠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한국시리즈 5연속 우승을 노리다 남의 축제를 구경하게 된 삼성 선수들의 심정도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삼성은 우승팀에 예우를 갖추는 길을 택했다. 샴페인에 흠뻑 젖은 김태형 두산 감독은 "시상식을 마치겠다"는 장내 아나운서의 방송이 나온 뒤에도 여전히 그라운드에 서 있었던 류중일 감독을 찾아가 답례의 악수를 했다. 삼성 선수단은 류 감독이 김 감독과 포옹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야 대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야구계 안팎에서는 호평이 나왔다. 인터넷에선 "(삼성이) 일등은 놓쳤지만 일류임을 보여줬다" "승자와 패자 모두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올해 한국 프로야구의 주연이 14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두산이라면, 그 주연을 빛낸 조연 역할을 삼성이 제대로 해냈다는 반응이었다.
달라진 풍경 뒤에는 류중일 감독의 결심이 있었다. 삼성은 2011년 아시아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 호크스(일본)를 꺾고 우승했고, 당시 류중일 감독은 시상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도열한 채 우승을 축하한 소프트뱅크 선수단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류 감독은 '같은 처지가 되면 꼭 그런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 리그인 EPL(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선 시즌 우승팀이 확정될 경우, 그다음 경기 상대팀 선수들이 경기 전 입장 통로에 좌우로 도열해 우승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평소 독설을 퍼붓던 상대라도 이날만은 우승팀 에 예우를 갖춘다. EPL뿐 아니라 해외의 유명 축구 리그에서는 이런 풍경이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한국 스포츠는 한국 사회의 1등 지상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2등은 별로 자랑스러운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팬들은 '아름다운 패배'의 가치를 발견한 듯하다. 우리도 이제 프로야구에서 전통으로 간직하고 싶은 그런 멋진 장면을 하나 가지게 됐다.
-조선일보, 201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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