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70년 만에 갚은 여관비

하마사 2015. 9. 15. 18:23

경북 영양군엔 2003년까지도 신호등이 없었다. 그만큼 외진 고장이고 그곳 사람들 운전이 점잖다. '청정 문향(文鄕)'으로 이름나 외지 사람들이 찾아들면서 첫 신호등이 생겼다. 영양에서도 산골, 북쪽 일월면에 주실마을이 있다. 386년 전 터 잡은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동네 복판 종택(宗宅)에서 큰 시인, 올곧은 학자 조지훈이 태어났다. 대문 앞에 서면 정면에 삼각형 봉우리가 솟아 있다. 붓처럼 생겨서 문필봉(文筆峰)이다.

▶그 기운을 받았는지 일흔 가구 마을에 교수 열넷, 교장 열아홉이 나왔다. 종택 옆집과 뒷집에선 지훈(芝薰)·조동탁과 항렬이 같은 역사학자 조동걸, 금석학자 조동원이 났다. 국문학자 조동일까지 주실마을이 배출한 3대 인문학자다. 풍수 덕분만은 아닐 테고 집안 가훈을 보며 머리를 끄덕인다. '재물·사람·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다. 비굴하게 머리 숙이지 않고 꼿꼿하게 살자는 다짐이다. '지조론'을 쓴 조지훈의 기개가 달리 나온 게 아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어느 노(老)학자가 70년 만에 여관비를 돌려준 이야기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주실마을이 낳은 사학자 조동걸이다. 국학진흥원장, 한일역사공동위 한국 위원장을 지낸 원로다. 그는 서울로 유학해 양정중과 덕수상고 야간부를 다녔다. 신문 배달과 사환을 하며 고학했다. 양정중 1학년 조동걸이 광복을 맞아 1945년 9월 고향으로 갔다. 안동에서 트럭을 얻어 타고 청송 진보까지 와 날이 저물자 운전사 따라 여관에 묵었다.

▶그는 여주인이 차려준 저녁까지 잘 먹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여관비 낼 돈이 없었다. 이튿날 새벽 도망쳤다. 그는 빚을 갚으려고 오래전 진보를 찾았다. 여관 자리엔 제과점이 있었다. 여든세 살 학자는 결국 진보 면장에게 편지와 50만원을 보내 진보 여관들에 써달라고 했다. 그는 10여년 전 암 수술을 받은 뒤 여러 병을 앓아 중환자실을 드나들었다. 지금은 한 의료 기관에서 요양 중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그마한 복숭아밭을 꾸렸다. 1949년 관리인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사주겠다 하곤 이내 세상을 떴다. 조동걸은 2004년 그 관리인을 수소문해 200만원을 부쳐줬다. 아버지 약속을 대신 지켰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후회, 그것은 잠에서 깨어난 기억'이라고 했다. 나이 들수록 크건 작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른다. 낯 뜨겁고 께름칙하다. 누구나 실수하고 뉘우치지만 그냥 품고 살기 일쑤다. 노학자는 기어이 고백하고 참회하는 용기를 냈다. 그 뒤에 가훈 '삼불차'가 있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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