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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칼럼]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하마사 2015. 4. 10. 09:29

日常과 '잘사는 삶'에 매몰돼 죽음을 추악한 것으로 배제해
삶은 끝이 있기에 의미를 갖고 죽음 성찰해야 삶이 풍요로워
'품위 있는 최후' 맞을 수 있게 延命치료 사전 선택제도 절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우리는 공론(公論) 영역에서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담론은 금기가 되었다. 현대는 철저히 삶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더욱 그렇다. 2014년 43만명이 태어나고 26만명이 죽었어도 탄생에 비해 죽음은 현저히 경시된다. 단순 계산으로도 매일 712명이 사망하지만 죽음은 세월호 같은 큰 사건을 제외하고는 뉴스나 부고장을 통해 풍문(風聞)으로 전달되는 숫자에 불과하다.

죽음이 풍문이 되고 만 것은 일상성이 우리네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단 채 나날의 일상에 매몰된 우리에게 모두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나만은 예외일 줄 알았다'는 게 한국인의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땀 흘리는 우리의 몸부림은 결국 한 가지 목표로 수렴된다. 현세적(現世的)인 '잘사는 삶(well-being)'에 대한 불타는 욕망이 그것이다.

부(富)와 성공에 대한 열망은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룬 사회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이래 웰빙은 건강과 의미 추구의 꿈까지 게걸스레 흡입하고 있다. 그 결과 삶은 갈수록 고상한 가치로 승격된 데 비해 죽음은 추악한 그 무엇으로 배제되어 왔다. 우리가 삶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반면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상황은 많이 다르다. 독일이나 미국은 죽음의 문제를 공론장의 주요 의제로 삼을 뿐 아니라 초·중·고와 가정에서 토론 주제로 다루는 걸 권장하기까지 한다.

이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여기는 사회적 수용도의 차이를 낳았다. 지난해 우리나라 사망자 26만명 가운데 73%는 병원에서 임종했으며 암 환자는 90%에 가깝다. 미국 38%, 호주 52%에 비해 월등히 높다. 병원 사망이 많은 데는 여러 현실적 이유가 있다. 아파트 거주 비율이 높아 병구완과 장례가 어렵기도 하려니와 말기 중환자를 가정에서 다루기도 쉬운 일이 아니며, 의료보험제의 허점도 있다. 하지만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인의 병원 사망률은 일상에서 삶과 죽음을 칼같이 나눈 후 죽음을 삶의 현장에서 최대한 격리하려는 우리네 마음의 습관을 보여 준다.

2014년 사망자 중 사고나 급성 질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경우가 아닌 20만명은 만성 질환으로 투병하다 임종을 맞은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수많은 환자는 중환자실에 고립되어 연명 시술이란 이름 아래 무의식 상태로 고통스러운 검사에 시달리다 모니터를 비롯한 각종 기계와 튜브에 포위되어 가족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한다. 지난 20년 동안 말기 암 환자와 가족들을 연구한 윤영호 서울대 의대 부학장이 "가장 비참한 임종(臨終)을 맞는 나라는 단연 한국"이라고 단언할 정도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며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 때 존엄이 지켜진다. 스스로 삶을 책임지는 태도는 죽음도 책임져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이는 만약 내가 현대 의학적으로 회복 불능 상태가 된다면 어떤 연명 시술을 받을 건지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는 대신 결정해 줄 사람을 지정한 사전 의료 의향서를 미리 작성하는 것을 뜻한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채 현대 의학의 생명 연장 기술로 유지하는 연명 시술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의학의 독재'에 가깝다. 따라서 사전 의료 의향서는 최후 순간까지 우리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살고 죽음까지 책임지는 인간다운 방식이다.

회복 불가능한 말기 단계 환자의 품위를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호스피스와 완화 의료도 삶의 완성을 도와주는 소중한 제도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정부가 오는 7월부터 호스피스, 완화 의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키로 한 것은 고무적이다. 호스피스, 완화 의료 제정법을 향한 움직임도 당파와 이념을 뛰어넘는 통합적 시민운동으로 승화되어 가는 중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진정한 문명사회로 나아가는 작지만 거대한 발걸음이 아닐 수 없다.

삶이 유의미한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을 풍요롭게 하며 '잘사는 삶'은 '품위 있는 죽음(well-dying)'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한국 사회의 풍문과는 달리 죽음은 매 순간 우리네 삶 속에 깊이 녹아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비출 때 비로소 같이 빛난다.


-조선일보 칼럼, 2015/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