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회의 역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중심으로)
최현민 목사
(한어부 기획팀장, 연세대학교 ·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성암교회)
- 목 차 -
1. 서론
2. 본론
A. 부흥회의 신학적 근거
B. 한국교회 부흥회의 역사적 과정
C. 부흥회가 현재의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3. 결론(제언)
1. 서 론
“한국교회는 그 활력과 성장으로 인하여 세계교회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이미 서구교회는 기독교 후시대(Post - Christian Age)가 되어서 기독교는 쇠퇴해 가고 있다.” 개신교 선교역사가 120년 가량되는 한국교회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거리마다 교회가 없는 곳이 없고, 인구의 20%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해도 큰 무리가 아닐 정도가 되었다. 세계교회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러한 단기간의 성장의 원인 가운데는 해방 이후의 사회적인 불안, 도시산업화 현상에 따른 인구의 도시 집중, 그리고 핵가족이라는 새로운 문화의 정착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과 신앙의 형성에 부흥회가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결코 없다.
특히 1907년의 대 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형태를 정립하고 신앙의 양상을 결정하게 한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심령 부흥의 표적이 되었다. 신자들이 가졌던 신앙체험은 한국기독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한국기독교인의 신앙성격이 되었다. 이 부흥운동이 있은 후, 교인들의 새 신앙경험은 가열한 시련을 당하였지마는 한국교회의 도덕적 심령적 세력으로 존속되어왔다. 현대의 한국 크리스챤들은 이 운동을 회고하고 추억함으로써 신앙생활의 샘터를 찾는다.” 이후 한국교회는 가장 유효한 전도방법으로 부흥회를 채택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곳이며 으레 1년에도 몇 차례 부흥회를 열어, 부흥회를 통하여 신자들을 위로했고 열심을 부여하고 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고 질적으로도 향상하여 교세가 늘어나고 교회가 불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부흥회를 통하여 자라고 부흥회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교세 확장이나 전도운동에 있어서 부흥회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것이며 그 공로에 있어서 지대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부흥회를 통한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지적 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흥회를 통해 교회성장과 영적 각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부흥회의 모든 단점을 넘어서는 큰 유익을 부흥회를 통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부흥회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으며, 부흥회가 성경적인 목회방법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어린이부흥강사로써 올바른 부흥회의 신학적 관점을 정립하고, 한국교회의 부흥회 역사를 잘 정립함으로 성경적이며 복음적으로 부흥회가 운영되어 어린이들과 믿음의 권속들에게 또한 교회의 바른 성장에도 기여할 수 있게 하는 일이 시급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필자는 부흥회가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섬기는 유익한 방편이며 더욱이 부흥회가 성경적 기초 위에 든든히 서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부흥회는 우리에게 맡겨진 선교적 지상사명을 이루려는 것이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본론
A. 부흥회의 신학적 근거
1. 단어 연구
부흥(revival)이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는 라틴어 re(다시) + vivere(산다)에서 온 말로써 “다시 산다”의 뜻이다. 다시 말해, 부흥운동이란 옛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이다. 처음에는 열성이 있었으나, 때에 따라 그 열심히 식고 의욕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구약성서에서 חָיָה (to live) 동사를 사용하여 부흥을 나타낸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חַיֵּיהוּ)”(합3:2). 그 외에도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하시겠나이까”(시71:20). “지존무상하며…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하려 함이라”(사 57:15) 등의 구절들이 부흥의 의미는 다시 살리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딤전 1:6에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라고 하며, 앞서 인용한 바 있는 계2:5에서는 “그러므로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한다. 다시 말해 신약에서의 부흥은 “불일듯하게 하다”, “굳게 하다”(계3:2), “처음 행위를 가지게 하다”, 그리고 “열심을 내다”(계3:19) 등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상의 의미를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은 “다시 살리는 운동이며, 처음의 열심히 되돌아가는 운동”인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이 침체하여 있고 생명력을 상실해 갈 때 활력과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 흔들리는 신앙을 굳세게 하는 것, 그리고 죄를 회개하여 영적인 각성을 갖게 하는 것 등이 부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흥운동이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헌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재 충만을 얻기 위해 굳어졌던 마음을 기도와 말씀을 통한 은혜 앞에 내어 놓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적인 심령의 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각성과 열심의 충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부흥운동은 기존 신자의 신앙 각성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을 회개시켜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운동을 포함한다.
옥스퍼드 교회사 사건은 이렇게 말한다. “부흥운동이란 종교적 예배와 실천의 한 형태로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대중의 종교적 열정의 폭발에 중심을 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집중적인 설교와 기도회에 의하여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정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러한 부흥운동을 일으키도록 갖는 대중 집회를 부흥회라고 칭할 수 있게 된다. 이 부흥회는 집중적인 설교와 기도회 그리고 열정적인 찬양 등으로 구성된다.
2. 성경에서의 부흥 사례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부흥운동의 사례는 사무엘에 주도하였던 미스바 회개 운동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겪는 국가적 재난의 이유가 영적인 데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블레셋의 위협 가운데서 불안과 공포로 떨고 있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따라서 사무엘은 전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회개와 부흥의 필요를 느끼고 온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다. 거기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다짐함으로써 백성의 영적 상태를 새롭게 각성시켰다. 이러한 부흥운동의 결과, 블레셋 군대를 대파하고 에벤에셀에 가기까지 이르게 된다.
또 다른 부흥 운동은 갈멜산 집회에서 보여진다. 여기서는 우상의 세력, 마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던 백성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외에도 요나에 의해 주도되었던 니느웨 성에서의 부흥운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부흥운동이었고, 요시야 왕과 에스라의 부흥운동은 말씀의 권위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개혁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부흥운동이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펼 때에 백성들이 일어나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몸을 굽히던 그러한 간절한 마음에서 벌써 부흥은 시작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부흥은 상당기간 깨달음과 회개와 헌신과 실천운동으로 계속되었다.”
신약성경 역시 부흥의 사례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특히 오순절 부흥운동이 대표적이다. 예수의 11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행1:12~14). 이 때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욜 2:28)의 예언대로 성령이 모인 사람들에게 임했다. 이 때의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약 3,000명의 사람들이 중생하였다. 그 결과 교회가 형성되고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었고(행4:32), 소유욕에서 벗어나 유무상통할 수 있게 되었다(행 4:32). 더욱이 예루살렘 교회가 급성장할 뿐만 아니라(행 2:47), 사마리아와 이웃 나라들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비 기독교인이었던 셀수스(약 AD 180년)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성장 이유를 잘 훈련된 기동성과 조직력에서 찾는다. 외부적인 박해가 그들의 단결을 더 강하게 했다고 말한다. 채드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정신, 그리고 노예들에 대한 평등한 대우 등을 교회성장의 원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성경의 대답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이 역사할 때, 죄인이 회개하고, 교회가 성장하며, 기적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기도할 때(행2:1), 말씀을 들을 때(행10:44~46)일어난다.
B. 한국교회 부흥회의 역사적 과정
1. 1907년의 대부흥운동
1903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원산에 모여 사경회를 연 일이 있었다. 이 집회에 참석한 하디(R.A.Hardie) 목사는 선교사업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원인을 자기의 부족으로 깨닫고 고민하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기도하던 중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이 소문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 목사를 청하여 집회를 열었다. 이 무렵 뉴욕으로부터 존슨 목사가 와서 이 집회에 참여하면서 당시 인도와 영국에서 일어난 세계적 대 부흥운동에 관하여 힘있게 전달하였다. “은혜를 갈망하는 교인들의 간구는 하늘에 닿아 1907년 1월 평양 중앙교회에서 모인 사경회 때에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낮에는 성경공부, 밤에는 부흥 전도 집회로 대 성황을 이루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는 천지를 진동하는 폭포 소리와 같았고, 한 날 밤에 일어난 성령의 대 부흥의 역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이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 부흥은 심오한 영적 체험의 기회가 됨으로써 그 이후 한국교회의 성격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부흥의 결과 한국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한국 교인들의 도덕 수준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복음 전도 열심에 불이 붙어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양적인 성장은 외면적으로 쉽게 분간될 수 있는 결과들 중의 하나이다. 장로교회에서만도 입교인수 29%의 증가를 보였다. 그 외에도 교인들은 성수주일, 기독교 윤리의 엄수, 성경연구, 전도 등 주를 위한 헌신과 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이 대 부흥에서 얻는 힘으로 그 후의 거듭되는 일제하에서의 박해를 능히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한국교회는 매년 부흥회를 정기적으로 갖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부흥의 부정적인 결과에 대하여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부흥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어 바야흐로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화한 나라로 등장하려 했던 것은 그 배후에 한국 교회를 비정치적인 피안적 교회로 구현시키려고 하는 선교사들의 강한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연을 내포하고 있었다. …의외로 정치와 왕실의 비운에 접근하면서 선교사들은 본래적인 신앙형태로의 복귀가 숙제로 남게 되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 이 1907년의 부흥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은 너무나 성급하다. 무엇보다도 개인적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억지다. 대 부흥의 결과가 비정치화였다는 주장의 근거들 중 하나는 길선주 목사 등의 부흥사들이 일제에 대항한 무력 투쟁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폭력주의가 곧 정치적 무관심의 증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독립을 위한 전략에 있어서 무장 대항 외의 다른 길을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의 중심인물은 길선주 목사이다. 그는 원래 기이한 꿈을 꾸고 나서 대동강변에서 창일거사를 만나 차력술을 익힌 후 여러 유명한 도사들을 찾아 배우는 동시에 유사 종교를 통한 동양 전래의 수도에 전념하였다. 함께 선술을 배우던 친구 김종성이 마포삼열 목사를 통해 개종한 후 자주 자신을 찾아와 복음을 전하였다. 한번은 김종성이 간곡한 부탁과 함께 천로역정을 주고 갔다. 이에 길선주는 예수교가 참다운 종교인지 알게하여 달라고 여러날 동안 자기의 삼령심군에게 기도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회의에 빠졌고 마침내 중병에 들게 되었다. 친구의 말에 따라 “예수가 참 구주이신지 알게하여 주옵소서”하고 삼일 동안 기도하던 중 깊은 밤중에 맑은 음성이 들리더니 곧이어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선주는 너무도 두려워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시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나를 살려 주옵소서”하고 외쳤다. 그는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밤이 새도록 울며 눈물로 기도를 드렸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충만해지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정한 감사가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1903년에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산에 들어가 기도하고 교회에서도 기도를 하려고 아무리 애를 쓰고 기도를 해도 마음에 흡족함을 얻지 못하여 새벽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해 보았더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항상 체험하게 되었다. 그 당시 신학생들과 열심있는 교인들도 이 새벽 기도에 동참하게 되어 사람이 늘어 나자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른 후에 함께 기도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906년에 시작된 세계 교회 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벽기도회”의 시초가 된 것이다.
그가 1907년의 대 부흥의 장소가 된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를 참석하고 있던 중 일어서서 자기 죄를 자백할 때는 회중이 모두 크게 놀라워했다.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장벽은 별안간 무너져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해 주셨음이 알려졌다. 죄책감이 그 청중을 휩쓸고 말았다. 그 주일 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됐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도 끝나지 못했다. 그동안 수다한 교인들이 일어선 채로 울면서 자기 죄를 자백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교인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 감동의 격류는 며칠을 계속했다. 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슬픔의 폭발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넘치는 영혼의 찬양의 물결 같았다.
1907년의 대 부흥은 비단 사경회에 국한되지 않고 평양의 숭실대학, 장로회 신학교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성경학교와 중학교에서도 대 부흥이 일어나게 하였다. 이 부흥의 물결은 평양시내에서의 학교에도 밀려갔다. 김찬성이 인도하는 숭덕학교 기독회에서 3백여 학생들이 죄를 뉘우치고 통회자복 하였으며, 한 학생이 통회하자 그 불길은 다시 감리교의 학생들과 연결되어, 교파의 벽을 뚫고 격류처럼 파급되었다. 평양에서 열렸던 이 상경회가 끝난 다음 여기에 참석했던 자들이 각기 시골로 들어가서 이 부흥의 소문을 일반 교우에게 전달하였다. 이 소문이 전국에 전파됨에 따라 신령한 체험을 맛보고자하는 열망과 기대는 지방 신자들의 마음속에 간절하여졌다. 그 후 길선주가 서울과 경기도에서 사경회를 열어 성령의 도리를 가르침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서울 일대의 교회가 대부흥되었고 교회는 새로 몰려드는 세례교인과 기왕의 경건한 교인들이 경험한 신령한 중생으로 인하여 전무후무한 대 발전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대 부흥은 철저한 사경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초기 부흥운동이 건전한 것으로 전개된 것은 사경회 즉 성경강론이 심령부흥운동과 병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각처에서 개최한 사경회에 원근 각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모여 들어서 열심히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으로 먼저 신앙지식의 계몽을 받았던 것이다.
평양에서는 사경회의 개최와 동시에 면밀하고 조직적인 복음전도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아침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조직적인 축호전도에 나섰다. 그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가서 실제로 평양시내 집집마다 들어가 전도하였다. 이 운동의 넓은 범위를 보이기 위하여 한국교인들에 의해 활용된 두 가지 전도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전도 사업에 참여하기 위하여 시간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유급교역자를 채용할 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고 따라서 전도사도 많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들이 스스로 전도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내었다. 다른 하나님의 방법은 기독교 문서 특히 쪽 복음서의 배포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부흥운동이 비 기독교인을 신자화 하려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의 영적 생활을 소생시키려는 부흥이었다는 점이다. 비교인을 상대로 전도하는 일은 교인된 사람들이 이행할 책임이다. 그리고 부흥회는 신자들의 신앙체험과 영적인 생활을 깊게하는 기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교인상대의 부흥운동과 비교인을 신자화하려는 전도운동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또한 경시해서는 안 된다. 한 신자가 새롭고 또한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였던 더 높은 경지의 신앙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곧 신자로서의 자기 책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리하여 부흥은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새로 발견한 신앙 경험을 타인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새로운 충격을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신자와 교회가 부흥될수록 교인의 수는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부흥과 전도운동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다.
이 당시의 부흥회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부흥사 자신의 철저한 회개가 선행하였다는 것이다. 하디 목사의 자책하며 애통하는 심령이 이 사경회의 출발부터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길선주 목사의 죄 회개는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 자복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한번은 길목사가 큰 소리로 “나는 아간과 같은 도적놈이올시다.”라고 외치면서 과거의 죄악을 크게 뉘우치고 회개하였다. 그 내용인즉 어떤 날 길 목사 친구가 별세하기 전에 자기 집으로 길 목사를 불러 놓고 자신의 재산을 잘 처리하여 아내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길 목사는 100만원 상당의 그 돈을 횡령해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을 그가 청중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자 그의 회개를 들은 모든 성도들은 연대적으로 회개하게 되었다.”
2. 일제치하의 부흥운동
가. 김익두 목사
일제 치하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김익두 목사다. 김익두 목사는 황해도에서 1874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10여세 때 이미 상당한 필력을 지닐 정도로 선비교육을 잘 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으나, 낙방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실망한 부친은 얼마 후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 후 결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하던 차에 친구의 사기에 넘어가 가진 재산을 모두 뺏기고 빈손이 되었다. 하루 아침에 몰락해버린 그는 자포자기하여 술에 찌들린 방탕한 삶을 보내게 되었다. 성격조차 난폭해져서 시장에 가는 여자들은 성황당에 돌을 던지며 익우인지 억두인지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 정도였다.
그러한 생활 중 유창한 한국어로 설교하는 소안론 선교사의 죄와 용서에 관한 메시지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믿기 시작한 후 1년여 만에 성경을 100독하였고, 재령읍 교회 전도사로 임명된 지 2년 만에 원래 10명 교인이었던 것을 300명이 넘는 교인으로 성장시켰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종로서에 잡혀가 5일 만에 인사불성이 된 채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의 부흥회에서는 큰 이적들이 항상 일어났다. 처음에 그는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각각 기도했으나, 끝없이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어는 때는 집회 시간까지 방해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 “주여, 이 불쌍한 심령들이, 가엾은 동포들이 주님의 능력을 맛보고 그들의 일생을 주님께 의탁하고 의의 길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소서, 이 많은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주님께 기도드릴 수 없사오니 주님, 이들에게 동일한 은사를 베푸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한 후 같은 종류의 병자를 한 곳으로 모아 그들을 위해 한꺼번에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병 나음을 받았다. 그는 해방 후 6.25 전쟁 도중 인민군에 의해 순교 당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의 특징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는 부흥회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부흥회를 인도하기 전에 항상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준비하였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높아가더라도 결코 교만해지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태도를 지녔다.
나. 이용도 목사
1930년대의 한국 교회는 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지식의 황폐 그리고 심각한 정치적 위기가 합쳐져 망망한 바다에 표류하는 것과 같았다. 이에 따라 신앙의 내면화가 그 절정에 이르러 신비적 열광으로의 전향과 비현세적인 침잠에 의해 영혼의 안식을 구하는 성향이 팽배해지게 되었다.
이용도는 감리교 협성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다. 재학시절부터 가슴깊이 새겨진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감격과 열정으로 전국에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교파의 구별없이 부흥회를 인도했던 저명한 부흥사이기도 했다. 그의 부흥회는 1931~32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부흥회는 당시에 암약하기 시작한 사회주의의 거물들을 회개시키고 하고 명망있는 목사, 지방의 군수, 순사, 타락한 목사 할 것 없이 모두가 통회하고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의 설교는 남달리 비장했으며 말이 무척 빨랐다. 마치 기관총에서 나오는 총알처럼 거침이 없이 사람의 심중을 쪼아 마음을 찌르고 가르기 때문에 그의 설교 앞에서는 죄를 두고는 결코 참을 수가 없고 흐린 마음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죄를 갖고 있다가는 금방 천벌이라고 내릴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그의 설교는 결코 한두 시간에 끝나지 않는다. 대개 3,4시간이고 어떤 때는 선 자리에서 6,7시간도 줄기차게 말씀을 전하기도 하였다.
민경배는 이용도의 신비주의를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신비주의”라고 칭한다. “그가 25세 되던 해, 뜻밖의 각혈 때문에 신병을 돌보려 정양하고 있을 때, 그곳의 한 작은 교회에서 설교 부탁을 받았다. 그때 그는 강단에 서서 아무 말도 못하고 목메어 흐느껴 울었다.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내려 왔다. 이것을 본 교인들은 다 그 감동에 눌려 다들 흐느껴 목메어 울었던 것이다. 말과 분석이 없어도 통했던 백의의 슬픔은 다만 한 정서로 마음이 상통하는 한 통로만 필요로 했다. 그 날의 설교 제목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날자도 그의 일이게 명기되어 있지 않다. 눈 앞을 압도해 오는 고난의 십자가상, 그것은 1930년대의 한국 겨레의 비운과 교회의 참담한 시련으로 해서 더욱 처절하게 가슴에 메어 왔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늘 시무언(是無言)이라고 불렀다. 이에 관하여 그는 일기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무언, 겸비, 기도, 순종, 이것을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아 잊지 맙시다. 나의 별명을 시무언이라고 함은 말 없음이 옳다는 의미와 메시야 오시기를 기다려 일생을 성전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만나서 즐거워하던 시므온을 그리워하며 그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황해노회에 의해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았다. ①재령교회를 훼방한다. ②여신도들과 서신 거래를 자주한다. ③불을 끄고 기도한다. ④교역자를 공격한다. ⑤성서조선이란 잡지를 선전한다. ⑥그러므로 그는 무교회주의자요, 교회를 혼란케하는 자이니 황해 노회 지경 안에서는 청하지 말 것. 이와 비슷한 결의문이 평양노회에서도 가결되었다. 그는 1933년 10월 2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의 동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사랑의 융합을 통해서 ‘주님과의 혈관적 연결’을 이룬다고 믿고 있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를 고난 당하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진수는 믿음보다는 사랑에 있다는 확신이 그의 생을 지배했다. 요한복음을 가장 소중한 성서라고 권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무조건의 사랑을 표방하면서 심지어 사탄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며 불경이나 사회주의 책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강조하는 한편, 신학과 교리의 기독교를 비난함으로써 신비주의의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3. 해방 후의 부흥운동
해방 후 당시의 교계는 6.25로 인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태부족하여 이단들에게 발흥의 여지를 제공하게 되었다. 더욱이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전 국가적인 고통과 절망등은 열광적이요 종말적인 신앙이 유행할 환경이 되었다. 종말적 사상을 강조한 이단들은 철저히 내세적이며,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체험을 강조하여 나름대로의 만족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혼란의 와중에 기성교단 역시 큰 혼란을 겪는데 그것은 장로 교단의 분열이다. 1950년 4월 21일 총회때에 경남 지방을 발판으로 교회의 개선을 시도했던 소위 고신파와 서울의 근대주의적 신학의 조선파간의 투쟁으로 결국 1951년 5월 24일 총회에서 고려파가 분리되어 나갔다. 또한 36회 부산 총회에서 총회 산하의 오직 하나의 직영 신학교인 총회 신학만을 인정한다고 함으로써 조선 신학교의 합법성을 부인하자 자연히 두 개의 교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성결교에서도 1942년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결성된 미국 복음동지 협회회 이른바 N.A.E.라고 하는 교파들이 분리되어서 결국 성결교도 기독교 성결교회와 예수교 성경교회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해방 후의 교계는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이 함께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북에서 내려온 이들의 대부분이 기독교도들이었으므로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부흥의 전기를 이루었다. 더욱이 전쟁의 상처가 휩쓸고 간 국민의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심령적 상태가 되어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대교파의 분열 역시 교회의 성장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상호 경쟁적으로 교회의 수가 늘어나고 교인 수도 증가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한국 교회는 전쟁과 분열의 상처 그리고 이단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흔히 부흥집회를 활용하였다. 대한 예수교 장로교 총회에서도 1952년을 ‘전도와 총동원의 해’로 정하였고, 이에 모든 성도들이 호응하여 상당한 부흥을 가져왔다. 감리교에서는 웨슬레 기념 250주년을 맞는 1953년을 특별 부흥전도의 해로 정하고 부흥의 기세를 크게 드높였다. 이외에도 세계적 대부흥사인 밥 피어스(Bod Pierce)와 빌리 그래함과 같은 인물들을 초빙하여 대 부흥집회를 개최한 것이 수많은 결신자를 얻게 하였다. 대규모 전도부흥집회는 1970년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1973년의 빌리그래함 한국 전도대화의 대회장인 한경직 목사의 말처럼 “5000만의 복음화”를 위해 교파를 초월하여 온 성도들이 힘을 합하던 시기였다. 1974년에는 국제대학생 선교회의 후원아래 한국대학생 선교회에 의해 주도된 엑스플로 74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새벽 기도회, 낮공부(전도요원 훈련), 저녁집회, 철야기도회 등으로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 인원 650만 성도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C. 부흥회가 현재의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1. 한국교회 부흥회 및 부흥운동의 특성
이상과 같이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부흥운동 속에는 신비주의적인 면과 금욕주의적인 면이 있다. 1930년대에 일어났던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는 대표적인 것이다. 근래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에서도 신비체험을 강조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부흥운동 속에는 1907년대에 있었던 것과 같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경회를 통하여 성경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부흥회 기간 중 교인들은 죄를 통회자백하고 새 삶을 살게 되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 부흥운동 속에는 신앙의 힘에 의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갖게 하는 특징이 있다. 특히 고통을 당하고 실패한 자들에게 노오만 빈센트 필(N.V.Peale)의 적극적 사고 방식은 실제로 성공의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
넷째, 부흥운동 속에서 고난과 가난, 고통 등의 문제를 신에게 맡겨버리고 내세에 소망을 갖게 하는 타계주의 사상과 재림사상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특히 해방 이전의 부흥운동은 일제의 지나친 핍박으로 이 사상은 더욱 강했던 것이다.
다섯째, 부흥운동 속에는 예언자적 비판주의 정신도 강하게 나는 일이 있다. 죄와 타협을 불허하고 불의를 버리며 신의 공의를 강조하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생활을 강조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특히 1945년 이후에 일어났던 부흥운동 속에는 일제시대 신사참배한 자들을 정죄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었다.
여섯째, 부흥운동 속에는 한국 민족성 속에 잠재하고 있는 기복사상과 물질적 성공이 강조되고 있으며, 신앙적으로 이기주의적 요소가 다분히 섞여 있으며 일부 부흥사들이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물질적으로 이해하여 기복신앙 중심으로 성도들을 이끌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것 같다.
2. 부흥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
오늘날 한국교회는 부흥회에 대하여 찬반양론의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고 있다. 목사를 위시한 교회 지도자들 간에도 대립된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일반 교인들 사이에도 그러한 경향이 농후하다. 이제 그들의 상의한 견해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흥회에 대한 올바른 방향제시를 위해서 목회의 일선에서 부흥운동과 맞부딪히고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부흥회가 필요한가 혹은 아닌가 하는 것을 결정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견해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현재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평신도가 갖는 견해를 살펴보는 것이 부흥회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바람직한 과정일 것이다.
가. 부흥회를 찬성하는 입장
첫째, 현대교회가 특히 해방이후로 너무 세속화하였기 때문에 성령의 불이 꺼지고 열심히 식어 졌으니 다시 옛날의 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부흥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현대교회가 지나치게 지식 중심적이기 때문에 신앙 그 자체까지도 이성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열기가 식어지고 전도하는 열기가 떨어져 있으므로 부흥회를 통해 이를 다시 소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일부 열심있는 성도들이 오늘의 교회에서 아무런 위안과 힘과 기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단에 대한 유혹이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하여 광신파의 집단을 따라 이교도에 빠지는 성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교회는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가 끝난 후, 신사참배와 박해의 와중에서 극도로 약화되어버린 한국교회를 새롭게 강화하고 성장 시키기 위한 계획으로서 부흥회를 생각하였던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견해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넷째, 우리의 신앙생활이 부흥회에서 체험할 수 있는 특수한 은혜의 맛을 빼고는 의미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약화를 방지하고 개인적 신앙에서 은혜의 경험을 맛보게 하자는 것이다. 또한 일반 성도들이 가지는 심리적 요소도 전인치유의 관점에서 무시할 수 없다. 하나의 관습 혹은 황홀한 신비를 동경하고 그러한 현상을 통하여 자신의 아픔을 해소하는 심리적 경향 때문에 부흥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부흥회를 개최하는 목적은 먼저 교회 성도들의 심령 부흥을 위해서이며 그 다음으로 교인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서 불신자를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흥회를 개최한 이후 그 부흥회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열매들은 어떠한 양상을 보이는가? 역시 통계에 의하면 교회의 성도들이 봉사에 열심을내었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수가 증가했으며 전도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교인 수가 증가했다. 교회 성장이 부흥회를 통하여 40%이상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35%, 그리고 교회성장이 부흥회에 20%이상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57%나 된다는 것은 부흥회에 대한 한국 성도들의 견해가 여전히 긍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 부흥회를 반대하는 입장
첫째, 부흥회는 주로 감정의 흥분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감정의 흥분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한국 교회에 부흥운동은 그 출발과 동기 자체가 순수한 의도적인 복음전도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회불안, 위기의식과 같은 외적 충격과 현실 부정을 달래는 카타르시스적 신앙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므로 그 특징은 성경진리와 신학적 이론에 입각한 복음이해와 해석을 결여하고 있는 반면에 감정과 심령의 흥분이란 흔히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쉬워, 참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둘째로, 부흥회는 의지가 박약하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들로 하여금 광신상태에 빠지게 만들어서 그 결과로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부작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현대 한국에서 발생되고 있는 여러 가지 유사기독교 운동이나 광신집단이나 혹은 탈선적인 행동들의 이유를 이 부흥회에다 둔다.
셋째, 부흥회는 현실에 입각한 윤리적인 생활 개혁에 비교적 관심이 적고 차라리 현실 도피적인 감정유희로 사람들의 마음을 유도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견해는 마치 부흥회에서 이루어지는 도취 경험을 아편 중독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한번 중독된 자는 늘 부흥회만 전적으로 따라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흥회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해독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 부흥회는 독단과 과장과 심리적인 강한 자극을 통하여 교우들의 마음을 점령함으로 부흥사를 영웅시 내지는 초인화 하는 경향으로 흘러 본 교회 담임목사를 하나의 무능하고 무력한 지도자로 경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교회 분열 혹은 담임목사 배척 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어느 열심있는 부흥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가진 어느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 때 교인들의 마음이 자못 흥분하여진 판이었는데 한 연로한 장로가 일어나서 그가 이번 부흥사를 통하여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이와 같은 은혜는 예수를 믿은 이후로 처음 받아본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주장하기를 자기의 담임목사가 부흥사와 같은 영력을 소유하기만 했다면 교회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담임목사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하소연했다. 그 후 그 교회는 담임목사를 둘러싼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들이 부흥회를 반대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부흥회에 대한 찬반 양론들은 모두 부분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부흥회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부흥회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수용하여 문제점을 최대한 개선할 수 있다면 구태여 부흥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흥회의 효과 있는 운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건전한 신앙체험을 갖게 해주는 가장 좋은 기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오늘 한국 교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사부흥회, 부흥전문가, 값싼 감정흥분의 강요, 비윤리적인 광신, 지나친 독단, 과장, 그리고 자기 자랑 등을 지양하고 참되고 올바른 부흥회를 일으켜야 될 필요를 절실히 느낄 뿐이다.
3. 결론(제언)
부흥회를 묘사하는 말들 중에 ‘축복성회’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복을 주시되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축복을 내리시는 분이자만, 은혜받는 성도들은 복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나누어 주는 자들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를 잘 보여준다. 오순절 성령이 임한 뒤 그들은 자기의 물건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자기 자신을 전부 희생해서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요즘 같이 만사형통의 복을 받을려고 달려드는 자들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에서 지상의 축복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한번도 찾아 볼 수 없다.
복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성경에서는 블래스드(Blessed)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고 할 때에 연상되는 단어는 해피니스. 명사로 해피니스, 형용사로 해피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성경에 사용된 단어는 해피니스가 아니라 블래싱이라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블래스드 혹은 블래싱이라는 단어를 성경은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해피니스와 어떻게 다른가? 해피니스라는 단어는 해픈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해피니스라는 해픈 투 해픈. 우연히 어떤 일에서 발생하다. 만약 행복이 그런 것이라면 행복은 어떤 우연의 선물이라고 밖에 정의 할 것이다. 성경은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해피니스가 아니라 블래싱 인 것이다. 블래싱은 앵글로 색슨단어에서 블리드 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블리드, 즉 피라는 뜻이다. 피에서 복이 나온다는 의미이다. 피흘림이 없은면 사함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으며 우연히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피가 없이는 복을 받을 수가 없다. 따라서 블래싱이라는 단어 뒤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있는 것이다.
부흥회는 축복의 통로이다. 바른 신학위에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그 선포 되어지는 말씀이 곧 성령님이시다. 말씀의 임재가 능력으로 은사로 나타나서 부어지는 것이다. 은사를 위한 집회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집회 도중에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저항 할 수 없게 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은혜이지만 단지 은사를 베푼다는 목적으로 집회를 한다는 것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은사보다 은혜를 먼저 두는 것이다.
부흥회는 매우 중요한 이 시대의 요청이다. 특히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아도 나타나고 있지만 한국교회의 성장에 큰 이바지를 한 것과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부흥회가 되도록 강사들이 노력해야한다.
미래의 주인공은 어린이들이다. 지금 교회학교의 감소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 현실속에서 어린이 부흥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한다. 그리고 부흥운동의 역사를 계속 이어 나가야 한다.
교회학교의 감소와 위기의 원인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훈련받은 전문적인 영적교육지도자가 없이 학교 운영 체제를 따라가고 있다.
둘째, 복음적인 열정과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결여된 교사들의 봉사가 문제이다.
셋째, 다중매체의 새바람에 끌려가는 신세대에게 상대적으로 매력과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기존의 상투적인 프로그램과 교육기재의 한계점이다.
넷째, 교회학교와 지원체제(목회구조와 가정 그리고 기독교 학교)간의 협력관계의 단절현상 등이 교회학교의 감소율에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 외에 교사의 자질, 교재(공과), 교육환경(시설, 장소, 시간 등), 교육행정 등 전반적인 교육여건이 제대로 뒷받침이 되고 있지 않으면서 계속 학교식의 교육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간과 할 수 없는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교회학교의 분위기를 쇄신하거나, 직무 환경을 개선해 봉사하는데 만족감과 헌신감을 높여 교육의 질을 높이거나, 능률적인 교육 환경도 제공해 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교회교육의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을 교사들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에, 교회교육의 성장을 돕고, 교회학교의 위기를 극복 하고자 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다. 바로 이 노력이 어린이 부흥회가 되어야 한다. 어린이들의 영적인 부흥을 부흥회를 통하여 일으켜야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될 것이다.
출처: 기독교미래교육연구소 카페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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