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교회사자료

교회인지 절인지? 114년 된 성공회 강화 성당

하마사 2014. 1. 18. 20:15

주일 미사 알리는 범종 소리, 대문간엔 빛바랜 한자 편액 달려
예배당은 팔작지붕 얹은 기와집, 태극과 십자가 어울리는 서까래
백두산 적송 싣고 와 기둥 삼고 공존과 조화의 中庸 정신 가득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강화읍을 내려다보는 북산 자락에 일요일 아침마다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진다. 800년 전 몽골군에 맞서 도읍과 왕실을 옮겨 왔던 고려 궁지(宮趾) 남쪽 언덕이다. 거기 한옥 마당에서 종은 길게 여운을 끌며 아홉 차례 울린다. 절 범종 소리가 아니다. '거룩하시다'를 아홉 번 거듭해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뜻이다. 주일 미사를 시작한다는 신호다.

지난 주말 성공회 강화 성당을 찾았다. '강화 도령'이 철종 되기 전 살았던 집터 용흥궁과 마주 보는 곳에 돌계단이 나 있다. 늦여름 자줏빛 꽃 피우던 자귀나무가 마른 열매만 콩깍지처럼 매단 채 겨울을 나고 있다. 계단 끝에 세 칸 솟을대문이 버티고 섰다. 가운데 칸 지붕이 높이 솟아오른 옛 대갓집 대문이다.

대문 위와 양쪽 행랑 창엔 홍살을 세우고 태극을 달았다. 조상이 악귀 쫓고 길한 기운만 들어오라고 썼던 길표(吉表)다. 대문짝엔 향교나 사당 외삼문같이 상서로운 태극 무늬를 그려놓았다. 빛바랜 한자 편액 '성공회 강화 성당'만 아니면 영락없는 고택 대문간이다. 태극 문양도 눈 가늘게 뜨고 보면 둥근 곡선이 성공회 십자가를 그리고 있다.

들어서서 걸음 옮길수록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대문 안 세 칸 문은 절 천왕문처럼 생겼다. 왼쪽 칸에 매달린 종은 통나무 종메로 치는 우리 범종이다. 곡선 소담스럽고 소리 묵직하다. 종메로 때리는 부분 당좌(撞座)에 연꽃 대신 십자가를 새겼다. 원래 범종은 1914년 성공회 본부가 있는 영국으로 도면을 갖고 가 지어부었다고 한다. 일제가 전쟁 물자로 떼어 간 뒤 지금 종은 교인들이 돈을 모아 마련했다.

종각 겸한 내삼문 지나면 비로소 예배당이다. 날아갈 듯 우아하게 팔작지붕을 얹은 기와집이다.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편액이 절 대웅전 편액 보듯 전혀 생소하지가 않다. 초록 단청도 칠했다. 처마 끝 서까래 마구리들을 보면 더 기가 막히다. 둥근 마구리엔 태극을, 사각 마구리엔 십자가를 그렸다. 태극과 십자가의 어울림. 이보다 한국적인 성당, 이보다 이 땅에 잘 녹아든 교회가 있을까. 지나가던 스님과 불교 신자들이 '이상한 절도 다 있다'며 합장했다는 얘기가 우스개가 아니다.

법당 기둥에 경전 구절 써 붙이듯 다섯 기둥엔 주련(柱聯)까지 붙였다. '無始無終 先作形聲 眞主宰(처음도 끝도 없으시나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시다) 三位一體天主 萬有之眞原(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참된 근원이시라) 福音宣播啓衆民 永生之方(복음 널리 펴 백성 깨우치니 영생하는 길이로다)….' 이 기특한 문자 속이 도대체 누구 것일까. 생긴 것은 경전 같되 담긴 것은 하나님 섭리다.

십자가는 용마루 끝에 겸양하듯 자그맣게 서 있다. 용머리 열두 개가 추녀마루 곳곳에 잡상(雜像)처럼 올라앉았다. 예수 열두 제자를 의미한다. 뒤편 사제관도 태극 대문을 단 한옥이다. 사는 곳까지 한국인의 삶을 따라 했던 성공회 선교사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오태진의 길 위에서] 교회인지 절인지? 114년 된 성공회 강화 성당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예배당은 겉과 달리 서구 바실리카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 높은 장방형 공간에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회랑을 내 장엄하다. 1900년 성당을 지은 트롤로프 신부가 백두산 적송을 뗏목에 싣고 와 기둥으로 세웠다고 한다. 성당은 114년이 지나는 사이 조금씩 고치긴 했어도 처음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유리창도 백년 넘은 것이 많다.

앞마당 한구석에 보리수 두 그루가 10m도 넘게 솟아 있다. 백년 전쯤 영국인 신부가 인도를 거쳐 오면서 묘목을 갖고 와 심었다고 한다. 그 아래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무다. 성당 왼쪽엔 선비나무, 학자수(學者樹)로 부르는 회화나무가 거목으로 서 있다. 불교의 보리수, 유교의 회화나무까지 보듬는 품이 크다.

돌아 나오는 돌계단 난간에도 눈길이 간다. 범종과 함께 일제가 떼어 갔다는 쇠 난간이다. 지금 난간은 2010년 일본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새로 만들어 바쳤다. 곁에 기념 글이 있다.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참회하고 두 나라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다.'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 아래 온수리에도 1906년에 지은 성공회 한옥 성당이 있다. 유난히 높다란 솟을대문 천장에 종을 매달아 종탑을 겸했다. 온수리는 성공회 김성수 주교의 고향이다. 김 주교 집안은 할아버지가 온수리 성당에서 세례받은 성공회 가족이다. 김 주교는 어릴 적부터 강화 성당과 온수리 성당에 다녔다. 여든넷 김 주교는 온수리에 재활 공동체 '우리마을'을 세우고 장애아들과 여생을 함께하고 있다.

강화 별미 두부새우젓국을 먹으러 마니산 남쪽 음식점에 갔다. 세로로 긴 한옥 안, 대들보·서까래가 다 드러난 천장이 시원스레 높다. 오래전 성공회 분소였다고 한다.

16세기 영국에서 출발한 성공회는 '비아 메디아(Via Media)'를 가치로 삼는다. 종교개혁 이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지켜 온 '중용(中庸)의 길'이다. 편견과 고집보다 공존과 조화를 앞세우는 성공회 정신을 한옥 성당에서 실감 나게 봤다.

단군 설화 깃든 신성한 섬, 숱한 외침(外侵) 버텨낸 항쟁 기지, 바깥 문물 쏟아져 들어온 길목. 강화도는 역사의 땅이다. 그래서 온 섬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더니 성공회 성당 둘만 만나기에도 한나절이 짧다.
 
 
-오태진 | 수석논설위원

 

-조선일보, 2014/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