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이영양증 앓는 서울 상암高 성준용군]
손가락·얼굴·눈밖에 못 움직여 친구들이 필기해 주고 책 넘겨줘
암산으로 푼 수학만 1등급 놓쳐 "도움받은 만큼 남에게 희망주고 싶어"
서울 상암고등학교 6층의 한 교실. 2학년 안가현(18)군이 수업을 듣다가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옆자리에 앉은 성준용(18)군의 교과서를 넘겨주기 위해서다. 준용이는 혼자서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온 몸의 근육이 퇴화하는 병, 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손가락과 눈동자, 얼굴 근육뿐이다. 그래서 준용이는 책상 대신 악보용 거치대에 교과서를 올려놓고 오로지 눈으로만 공부한다.
"귀찮지 않으냐고요? 전혀요. 오히려 저한테도 도움이 돼요. 준용이 책장 넘겨 주려면, 졸면 절대 안 되니까요." 가현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준용이에게는 수업 시간마다 '손'이 되어주는 여러 친구가 있다. 학교가 지정해 준 '도우미'들이다. 상암고는 장애 학생 35명이 전교생 1020명에 섞여 공부하는 통합학교다. 도우미들은 과목을 나눠 돌아가면서 준용이의 공부를 돕는다. 노트 필기를 잘하는 김준기(18)군은 필기 도우미다. 김군은 "내가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움을 받을 때도 많다"며 "영어 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단어가 생길 때 준용이한테 물어보면 잘 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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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은 준용(가운데)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힘들어도 수업 한 번 빠지지 않는 성실한 친구’ ‘기분 나쁠 수 있는 장난도 받아주는 너그러운 친구’‘그냥 무조건 친구’…. /김지호 객원기자
준용이는 엄마가 42세 때 낳은 늦둥이다.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제힘으로 몸을 뒤집지 못했다. 병원에 간 엄마는 선천성 근이영양증이라는 진단을 듣고 오열했다. 의사가 말했다.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민할 건, 앞으로 뭘 해줄지입니다." 엄마는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준용이를 위해 초·중·고 모두 일반학교에 보냈다.
준용이의 현재 몸무게는 24㎏. 또래보다 40㎏이나 가볍다. 전동 휠체어에 욕창 방지용 방석을 깔고 앉아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이나 수업을 듣기에는 턱없이 약한 체력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한두 시간 보건실에 누워있기도 한다. 보다 못한 엄마는 '고등학교는 다니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준용이는 단호했다.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못하게 살 수는 없어요. 고등학교 갈래요." 엄마 이은영(60)씨는 "아이를 씻긴 뒤 안아서 차에 태우고 학교로 데려와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체력적으로 버거울 때도 있지만 준용이가 워낙 학교를 좋아해 힘든 줄 모른다"고 했다.
준용이는 우등생이다. 지난 3월 모의고사에서 언어 98점, 영어 100점, 세계사 48점(50점 만점), 사회문화 50점(50점 만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했다. 손을 움직이지 못해 암산으로 풀어야 했던 수학만 제외하곤 모두 1등급이다. 교내 논술대회에서도 늘 최우수상을 받는다.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다.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준용이는 인문사회교육토론 동아리(YESEA)에서 활동한다. 올 초 동아리 신입생을 뽑을 때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1학년 후배들 교실을 돌면서 직접 동아리 홍보를 다니기도 했다.
지난달 발간된 준용이네 반 학급 문집에 준용이는 이렇게 적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건 억울하지 않아요. 난 할 수 있는데, 남들이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때 억울하죠."
그의 꿈은 스포츠 칼럼니스트다. '몸이 아프지 않았으면 야구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야구광인 데다, 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준용이가 말했다.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잖아요. 그런 만큼 나도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근이영양증(筋異營養症)
유전자 이상으로 인한 선천성 근육 질환이다. 근육이 점차 위축되며 근력이 떨어지고, 관절도 변해 결국 걸을 수 없게 된다. 근육의 남은 기능 유지와 관절 경직을 예방하는 재활 치료가 중요하다.
-조선일보, 201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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