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300여명이 한 사고로 재난… 어른들이 젊음들을 지켜주지 못해
우리 모두 가해자로 자신에 분노… 건성건성 살며 규칙 지키지 않아
戰場 버리고 살길 찾아 도망갈 것… 작은 매뉴얼, 하찮은 규칙 지켜야
- 김대중 고문
일주일 내내 사고 원인, 구조 과정, 책임자 처벌,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국민의 눈과 귀를 울렸지만 중요한 것은 이 땅의 어른들이 그 젊음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로 귀착된다. 선장과 승무원들을 욕할 일이 아니다. 그 선장과 승무원들은 바로 나이고 우리이고 어른이고 국민 모두이기 때문이다. 이 마당에 누가 누구를 욕하고 때릴 것인가.
희생자들이 일반 어른들이었고 심지어 천안함처럼 군인들이었으면 애통과 분노는 컸을지라도 이번처럼 모두의 자책(自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희생과 전사(戰死)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고 그때는 우리가 우리의 분노를 되돌려줄 대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번 세월호 참사는 분노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 어른들 모두가 가해자고 살인자고 범죄자다.
범죄자의 심경으로 주말을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며 구조를 기다렸다. 그러나 구조는 없었다. 구조란의 숫자는 '174'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생환(生還)'이지 '구조(救助)'가 아니다. 그 바람에 자꾸 환영(幻影)에 시달렸다.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유쾌한 웃음소리, 찰랑거리는 여학생들의 머리카락, 날렵한 남학생들의 몸짓 그리고 그들이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 귀여운 얼굴, 건강한 미소…, 이런 것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 얼음 같은 물속으로 사라지는 끔찍한 환영들이 나를 괴롭혔다.
항해 잘못은 그렇다 치더라도 학생들을 갑판 위로만 나오게 했어도, 구명정만 제대로 풀렸어도, 승무원이 나서서 지도만 했어도, 아니 승선 때 탈출 요령에 대한 매뉴얼을 숙지시키기만 했어도 그 젊음들은 능히 어둠과 물을 걷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공연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 나이 또래의 손자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뒀다. 그것조차 죄스러웠다.
우리는 오랫동안 적당히 건성건성 살아왔다. 규칙이나 규정 같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무시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겨왔다. 우리에겐 매뉴얼이란 게 없다. 있기는 해도 너무 형식적이고 면피성이어서 있으나 마나다. 아무도 지키지 않으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우리는 몸은 현대에 살면서도 사고와 행동은 전근대적이다. 하기야 어렸을 때 논두렁길을 걷던 사람이 당대(當代)에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7000t급 여객선을 몰고, 최첨단 항공기를 타니 남들처럼 1세기 넘게 걸린 숙련과 훈련 기간이 없었음 직하다. 그러니 오늘의 상황이 어지러울 만도 하다.
문득 전쟁 생각이 났다. 만약 우리가 지금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나라에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이 세월호(號)의 침몰과 오버랩됐다. 이 세월호의 수준으로 우리 국민은 전쟁에 임할 수 있을까? 승리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모두 세월호의 선장이고, 항해사고, 조타수라면 우리는 당연히(?) 전장(戰場)을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갈 것이다. 우리의 미래와도 같은 젊은이, 우리의 생명줄과 같은 청소년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어른이고, 국민이고, 정치이고, 나라라면 과연 전쟁이라는 것 자체를 수행할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세월호 참사를 넘어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의 쓰촨(四川) 지진, 일본의 쓰나미와 후쿠시마 참사를 내다봐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민방위훈련 때 세월호의 선장처럼 '휴식'하고 있는 자세로는 우리는 또 다른 세월호를 부를 수 있다. 정부의 사후 대책면에서도 책임 전가, 우왕좌왕에 중구난방까지 겹치니 가히 총체적 재난으로 치부할 만하다. 우리는 평상시 재앙이나 자연재해 또는 엄청난 사고에 대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거나 훈련을 게을리하다가 한번 사고가 나면 온 나라가 달려들어 작살을 내고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대충대충, 건성건성으로 되돌아간다. 작아 보이는 매뉴얼과 규정, 하찮아 보이는 교통 규칙을 무시하는 데서 '제2의 세월호'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조선일보, 201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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