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지식인은 자국 정부 맹비난
한국선 대외문제·민족문제에 국민 정서 거스른 소신 못 밝혀
유태인은 나치 戰犯 추적 계속
우리는 일본인 전범 단죄 못해 '별것 아닌 민족'으로 얕보여
- 김대중 고문
일본에는 나라 전체가 혐한(嫌韓)으로 흘러가도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고 '다케시마의 날'을 반대하는 단체도 있다.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분위기 속에서도 안 의사를 세계적 의거인(義擧人)으로 추모하고 존중하는 일본인도 꽤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고 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위안부 문제에 용감히 소신을 밝히는 정치인도 있다.
이들의 발언과 태도를 접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한국의 어느 지식인, 어느 정치인이 예를 들어 "한국은 언제까지 과거사에 함몰돼 있어야 하는가" "위안부 문제는 이제 그만하자"고 언론에 공개 주장을 했다면 그는 과연 한국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이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5000년의 긴 역사를 통틀어 다른 나라를 침범한 일도, 다른 민족을 학대한 일도 없는 우리는 사과하거나 바로잡을 일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런 문제들에 사리와 분별, 역사의식과 민족의식, 진실과 원칙을 가지고 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주춤거리게 된다. 중요한 대외 문제, 민족문제에서 국민의 일반적 정서를 거슬러 소신을 밝힐 용기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른바 '함익병 사건'에서도 우리는 그런 기미를 발견한다. 한 지상파 방송의 예능 프로에 고정 출연했던 의사 함씨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안철수'를 비판하고 '독재'를 언급하고 여성의 헌법상 권리·의무를 건드린 죄(?)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급기야 프로그램에서 퇴출당했다. 한 전문 직업인이 일상의 문제, 일반적 관심사에 솔직한 의견을 개진한 것을 가지고 그것을 집단으로 매도하고 분풀이하는 우리 사회의 '떼거리 풍토'에서, 그것도 다름 아닌 국가적 관심사에 인기 없는(?) 발언을 했다가는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엄혹하고 비정한 국민적 검증 시스템을 거치지도 않고 '힐링' 한두 건(件)으로 국가의 지도자급으로 부상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비판한 그의 지적은 박수를 받을 만한데도 말이다.
우리는 국내 문제에는 속된 말로 피 터지게 싸운다. 한쪽이 OK하면 다른 쪽은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NO다. 정치, 이념, 경제, 사회, 문화 어느 분야에서도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다. 일부러라도 싸우고, 싸우기 위해서도 싸운다. 그런데 대외 문제에는 이견(異見)이 조그만큼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좋게 보면 우리끼리는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대외적인 문제에는 일치단결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쁘게 보면 우리끼리는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면서 밖에 나가서는 입도 벙긋 않고 풀 죽어 다니는 것에 익숙한 탓 아닐까?
지난주 외신은 2차 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다 된 시점에 과거 유태인 수용소의 경비대원이었던 94세 독일 노인을 체포해 법정에 세우는 독일 당국의 기사를 전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일본의 뻔뻔함이 돋보이는 사건이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도 있다. 유태민족은 지금도 유태인에게 잔혹 범죄를 저지른 나치 전범자들을 지구 끝까지 추적해 법정에 세워왔다. 그래서 독일은 그런 유태인의 끈질긴 단죄 의식(儀式)에 스스로 호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제가 강점기 때, 전쟁 때 우리 민족에게 가한 잔혹한 범죄를 끝까지 추적해 단죄한 경우가 없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또는 도용(盜用) 등 사기 수법에 당해 '친일적(親日的)' 언급이나 행동을 한 우리 측 인사들을 찾아내 매도하거나 매장하는 등의 일에는 열성이었지만 정작 일본 쪽 잔혹 행위자들을 추적하고 색출하고 증거를 들이대 법정에 세우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에는 그런 한국이 '별것 아닌 민족'으로 얕보였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새삼 과거사를 부정하며 우리를 모욕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제 닭 잡는 데'는 이골이 났어도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어떤 사건' 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와다 하루키 교수의 용기 있는 발언, 함익병씨의 퇴출 그리고 94세 독일 나치대원의 체포 등 지난 한 주 사이에 우리의 자존심과 존재감을 뒤흔들고 지나간 세 가지 사건은 우리를 새삼 초라하게 만들었다.
-조선일보, 201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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