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한국교회역사탐방

[국민일보 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5) 강화중앙교회

하마사 2014. 3. 11. 17:09


외세… 박해… 꿋꿋이 견뎌온 세월 고스란히 반석이 되다

1900년 무렵의 빛바랜 사진 하나. 교회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100여명의 학생이 규모가 큰 초가집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처마 밑으로 격자창이 눈길을 끈다.

1914년 벽돌조 건축물 사진. 아치창에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인 가는 탑이 3층 높이로 솟구쳤다. 특이한 점은 탑머리에 팔작 한옥지붕을 얹고 있다는 것. 소나무 한 그루가 사진 왼쪽에 잡혔다.

1964년 같은 건물 흑백사진. 부쩍 자란 소나무. 탑 꼭대기가 팔작지붕 대신 십자가 첨탑으로 바뀌었다. 주 출입문엔 작은 십자가 달렸고 2층 격자창엔 확성기가 설치됐다.



1975년 벽돌조 형태를 유지한 증축 사진. 첨탑에도 창을 내고 첨탑 시작되는 네 귀퉁이에 작은 탑 모양을 내 고딕 건축을 본뜸.

2000년 철근콘크리트와 적벽돌을 이용, 노트르담대성당풍의 현대적 교회 완공.

강화중앙교회 건축사는 근대 100년의 한국교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 있어 강화도는 한국사의 축약이라고 할 만큼 격동 가운데 있었는데 ‘가까운 100년’을 지켜본 이 교회 역시 격동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지난 24일 강화읍 강화중앙교회(장영철 목사). 소위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蠶頭)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 교회는 옛 성읍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이 일품이다. 외세에 패퇴한 고려·조선의 왕조가 김포와 강화 사이에 흐르는 바다를 해자 삼아 왕권을 지키려 안간힘을 기울인 왕도의 땅.

북쪽 오랑캐는 수모 가운데도 막아냈으나 병인·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강화도 앞바다의 서세(西勢)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임진왜란 때 쓰던 포(砲) 사정거리 수준의 우리 수비군은 바다 위에서 강화 읍성까지 포격해 대는 양이(洋夷)의 철갑선 포를 막기란 애초 그른 일이었다.

조선은 강제 개항됐고 강화는 개항지 제물포의 영향권이었다. 복음은 이 무렵 선교사를 통해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전해졌다. 1800년대 말 조지 헤버 존스 선교사가 강화 입성을 시도하였으나 강화유수의 거부로 저지당한 후 전략을 바꿔 강화 북부(현 양사면 교산리)를 선교 대상으로 삼아 아랫녘으로 넓혀 나갔다.

“강화의 첫 교인이 이승환이라는 분입니다. 제물포에서 술집을 하던 분이었죠. 인천 내리교회에 다녔던 그는 강화 양사에 사는 모친이 위급하다는 얘길 듣고 고향으로 갔고, 돌아가시기 직전 선상에서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했어요. 서양 귀신을 섬기는 이방인 선교사를 마을 양반들이 접근을 못하게 했기 때문이죠.”

1893년 이 첫 세례교인은 강화의 겨자씨가 됐다고 이은용(강화중앙교회) 장로가 말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강화 최초의 교회 교산교회, 이어 홍의교회가 세워지고 성읍인 강화읍에 1900년 지금의 강화중앙교회(당시 잠두교회)가 반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앞서 얘기한 초가집 회당 사진은 인도자 박능일 등이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을 사서 첫 예배를 드린 천교하(川橋下·현 읍내 중심도로 자리의 하천으로 중앙시장 입구. 하천 다리 밑 동네를 일컬음) 기도처다.

이 기도처에서는 불과 1년여의 짧은 기간에 350여명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다. 성리학 기반의 왕도에 야소교의 이 같은 확장은 도무지 믿기지 않은 축복이었다.

“강화 복음의 원동력은 해방의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민중사회에 새바람을 일으킨 거죠. 우리 교회 ‘김씨부인’이란 분은 마태복음 18장 15절을 읽고 노비문서를 불사른 후 자기 종을 자유케 하셨어요. 초기 교인들은 특히 치유 은사를 입어 당시 신약을 개발해 병 고침에 나섰고요. 빚 탕감을 해주는 성서적 사회 개혁과 귀신들린 여인을 돌보는 은사가 강화 지역에 퍼지니 누가 복음을 믿지 않겠어요.”

강화기독교역사연구회를 이끌고 있기도 한 이 장로는 ‘신학월보(新學月報)’에 기술된 김씨부인의 행적을 담은 ‘우리나라에 드문 일’이라는 노비해방 글을 보여줬다. 언문을 모르던 김씨부인은 성경을 보기 위해 글을 깨치고 난 후 ‘종 두는 것시 또한 큰 죄인인줄 깨닷고’ 종 문서를 불살랐다. 그리고 월보는 ‘너를 종으로 알지안코 내의 딸노 아노라 하고 주일마다 한가지로 례배당에 열심히 다니시니…비복을 둔 사람들은 이 부인을 본바다 비복들을 놓아주고 자기도 노힘엇기를 바라노라’고 적었다.

교회는 잠두의숙(현 합일초등학교) 설립과 같은 교육, 노비해방과 생활개선 등과 같은 사회계몽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여기에 당시 강화진위대장이었던 이동휘(1873∼1935·임정 국무총리) 등과 같은 지식인이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며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강화의 반석교회가 됐다.

이들에 의한 민족정신은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강화진위대가 해산되자 교인과 주민 등이 의병 봉기했고 이 과정에서 김동수 영구 형제, 그들의 사촌 남수 권사 등이 일제에 의해 순교했다. 또 3·1운동 때는 결사대장 유봉진 권사 등이 주도해 읍 장터에서 시위를 벌여 100여명이 체포되고 43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조봉암(1898∼1950·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오영섭 고제몽 등 이 교회 출신 ‘예수교도 8인조’ 사건의 독립운동도 복음을 안고 이뤄졌다. 6·25 때는 백학신 목사가 아들과 함께 납북되는 가운데서도 예배는 끊이지 않았다.

현재 강화도는 이 같은 선교 역사에 힘입어 30%대의 높은 복음화율을 보인다. 120여곳의 교회가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군단위에서 충남 당진읍교회와 함께 2000명 이상이 모이는 큰 교회로 꼽힌다.

윤치문(70) 원로장로는 “사경회를 하면 부속 섬 목회자와 교인 등이 우리 교회 교인 집에서 나무로 불을 때 밥해 먹어가며 교제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며 “강화는 감리교만 4개의 지방으로 나눌 만큼 신앙적으로 큰 섬”이라고 말했다.

어느 시인은 벽돌 건물에 반해 벽돌 하나를 빼어 베개 삼아 자고 싶다고 노래했다. 또 건축가 고 김수근은 “나는 벽돌이 지니는 따뜻함을 사랑한다. 벽돌은 한 장 한 장 손으로 쌓아야만 하고 이것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라고 했다.

아기자기한 초기 벽돌교회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강화중앙교회. 현대 교회건축의 화려한 맛은 없지만 그들의 신앙만큼이나 우직하며 따스하다.

■ 따라 걸어 보세요

강화중앙교회 안에는 역사자료관과 순교비가 있고 1900년 무렵 심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교회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교회가 신식교육을 위해 설립한 잠두유치원과 합일초등학교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교회 밑에 자리한다. 읍내를 관통하는 48번 국도에서 교회로 향하는 골목 입구는 1900년 첫 예배를 드리던 천교하터다.

교회를 출발해 성읍 동문을 향해 가다 왼쪽으로 돌아서면 특이한 한옥 2층 팔작지붕이 나오는데 이는 성공회강화성당이다. 한옥지붕에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한국기독교 초창기 교회건축양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 건물. 근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김동수 권사 3형제 순교터’는 이동휘 권사 등 강화중앙교회 교인이 중심되어 의병을 일으키자 친일파 일진회가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교인 색출에 나서 죽음으로 몰아간 장소. 김 권사 등 4명은 의병을 일으킨 ‘폭도의 수괴’로 지목돼 서울로 압송되던 중 지금의 더리미 갯벌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일본도에 희생됐다. 18㎞로 6시간가량 소요된다.

■ 강화중앙교회 가는 길

서울 신촌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이용, 읍내 터미널에 도착하면 된다. 터미널에서 교회 입구까지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걸으면 왼쪽에 24시간 편의점이 나타나고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산 언덕에 교회가 보인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서울 기준으로 김포공항 방향 올림픽대로∼48번 국도∼강화대교를 건너면 된다. 강화대교에선 4.3㎞ 지점.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549(032-934-9421).

■ 근처 맛집해물찜 전문점 ‘서해왕해물찜’

강화산성 탐방의 시작점인 강화읍 남문 건너편에 강화중앙교회 이호승 집사가 운영하는 해물요리전문점 ‘서해왕해물찜’(032-934-1465)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식당의 주 메뉴는 상호 그대로 왕해물찜이어서 정말 해물찜 한 접시에 상이 가득 찬다. 강화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이 식당은 주인 나름대로 맛의 비결과 원칙이 있다.

이 집사의 맛에 대한 비결은 신선한 재료를 구입해 자신만의 노하우로 적절하게 배합하고 숙성하는 데 있다. 청양고추를 비롯해 각종 식재료를 고유의 특성에 맞게 다져 여러 날 냉장과 냉동의 과정을 거쳐내면 재료 특유의 풋내나 비릿한 맛이 없어지고 깊은 맛과 향을 낸다고 한다.

이렇게 재료의 특성에 맞게 숙성시킨 양념을 문어 낙지 오징어 새우 꽃게 가리비 고니 미더덕 등 15가지 해산물에 콩나물을 알맞게 배합하고 센 불과 약한 불을 조절해 익혀내는 것.

싱싱한 해물과 매콤하게 간이 밴 콩나물 맛에 얼얼해진 입안은 간척지 쌀로 유명한 강화쌀밥 한 숟가락과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오이냉채로 달래면 된다. 찜 요리를 다 먹은 후에는 남은 양념재료에 묵은 김치, 참기름, 김가루를 넣어 비벼낸 볶음밥 또한 별미.

해물찜은 3만5000∼4만9000원. 지리해물된장찌개(7000원)와 어린이를 위한 해물치즈돈가스(4000원)도 준비되어 있다.

강화=글 전정희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국민일보, 2010/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