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한국교회역사탐방

[국민일보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3) 전남 함평군 함평읍교회

하마사 2014. 3. 11. 17:02

 


자운영 보랏빛이 지천인 곳… 예수 시대 성읍이 이랬을까?

청나라 사람 심복의 자서전 ‘부생육기(浮生六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전남 함평읍교회를 찾아가면서 다시 잡은 을유문화사판 부생육기는 15년의 ‘풍화’에 누레져 가고 있었다. 요절한 아내 운을 그리는 심복의 절절한 심정. 헛되고 헛되었을 우리네 삶은 그 어떤 관계도 영원하지 못하다. 사내라면, 슬기롭고 총명한 여자 운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여인’(잠 14:1)과 같다. 내게 함평은 지혜로운 여인 운과 같이 각인되어 있다. 함평의 복음화가 지혜로운 어머니 신앙과 같은 한 목회자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현재 함평군은 4만3000여명의 적은 인구임에도 97개 처소, 복음화율 25%를 자랑한다.

읍내 거리에서 보혈빛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순례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지난 주일 읍내 구석구석을 걸으며 예수 시대 성읍 풍경을 떠올렸다. 어디에 눈을 두어도 교회 첨탑이 보였다. 예수 탄생에는 하나님의 모성적 이미지와 부성적 이미지가 함께 있다. 함평은 모성의 이미지며 색으로는 이 지역에 유독 지천인 자운영 보랏빛이다.



그 이미지 중심은 함평읍교회(박광석 목사)다. 처소 하나가 세워짐으로써, 목회자 한 사람이 온유와 지혜로 지역 사회에 헌신함으로써, 생명의 말씀이 이 땅에 뿌리를 굳건히 내린 것이다.

사실 전남 서부의 복음 전파는 이 교회 김병두(1905∼2000) 목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942년 부임한 그는 59년 사임하기까지 목자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 시민운동가로서 교회를 통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또 한국전쟁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빨치산 출몰이 잦았던 지역에서 순교를 무릅쓰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백성을 구해냈다.

그가 부임하던 무렵 일제의 공출과 신사참배의 강요가 성도와 교회를 옥죄었다. 교회 첨탑 종을 대동아전쟁 군수물자로 내주어야 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에 직면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김 목사는 징용에 끌려가 6개월간 전남 화순탄광에서 징용살이를 해야 했다.

큰아들 김활용 목사(서울 방배동 이수교회 은퇴목사)는 “징용살이를 할 때 사진을 지금도 내가 갖고 있다”며 “교회에 복귀하셔서 일제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우연히 신문에서 본 일본인 후지모리 부흥사에게 편지를 썼고 그를 부흥집회에 모셔 교회와 성도를 보호하시는 지혜를 보이셨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던 해 9월 유치부를 확대해 유치원을 세우고, 48년엔 지금의 교회 자리에 예배당을 신축했다. 그런 기쁨도 잠깐, 한국전쟁 발발하고 이기섭 노현덕 장로, 박병연 이대수 박갑득 집사 등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좌익에 희생되는 화를 당한다.

문성수(77) 원로장로는 “당시 김 목사님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인민군이 교회를 접수하기 전 어머니 생신이라 해남 집에 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인민군이 교회를 사무실로 써서 교인들이 얼씬도 못했었다”고 증언했다. 김병두 목사는 “죽는 한이 있어도 교회에 가겠다”고 했으나 교인 홍순호(작고·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목사 부친) 윤인식(작고·전 국회의원) 등이 말렸고 한다.

그리고 그해 9월 수복이 되면서 부역자 선별이 시작됐다. 이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김 목사는 함무(함평·무안)지방선무공작대 대장을 맡아 빨치산 잔당의 투항을 권유하는 한편 좌·우익 간 피의 보복을 최소화했다. 홍·윤 외에 이원설(작고·전 한남대 총장) 등이 대원이었다.

김 목사에게 신앙훈련을 받은 아동문학가 김철수(60·함평 은광교회 장로)씨는 “김 목사님의 지목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던 때에 목사님께선 총칼 앞에 어쩔 수 없이 부역한 그들의 속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지목하지 않고 끌어 안으셨다”며 “훗날 전남 서부에 10여개 교회를 분립시키는 등 복음이 곳곳에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신 목사님의 은덕을 잊지 않았던 생존자들이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회 출신 박종삼 원로목사(1980∼2008년 시무)는 “김 목사님은 또 전쟁 직후 고아들을 위해 삼애원 자광원 성애원 시온원 등을 세워 신앙으로 키웠다”며 “이렇게 작은 군 단위 읍내에 아동복지시설이 4개나 된 사례는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 4개 시설은 지금도 각기 아동복지시설, 모자원, 양로원, 아동복지시설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쟁 이후 윤인식·홍순호 장로 등이 김 목사가 맡긴 복지시설에서 헌신하던 이들이다.

또 김 목사는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53년 교회 내 교육관에 함평광인고등공민학교를 세워 기독교 인재를 길러냈다. 가난한 농촌 청소년에게 중·고등과정의 이 학교는 꿈의 학교였다. 공민학교는 82년 농어촌 중학교 교육 의무화와 함께 폐교됐으나 그 인맥은 지금도 전남 서부 복음화의 바탕으로 남아 있다. 이와 함께 함평YMCA도 세워 크리스천 리더를 키웠다.

이 교회가 2011년 3월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1911년 류서백·남대리(한국명) 선교사 등이 함평에 들어와 박화윤 이문겸 등을 전도해 예배를 드린 곳이 지금의 교회 뒤편 내교리 언덕배기 초가삼간이다.

문성수 원로장로와 옛 교회터를 찾았다.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교회터는 밭과 잡목숲으로 변해 그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무화과나무가 몇 그루 남아 있고, 지형이 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가 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이 당시 사택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있던 집인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교회 흔적이네요. 48년 지금의 교회터로 신축 이전하면서 내리교회에서 함평읍교회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모두 숨거나 쉬쉬하면서 신앙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이처럼 외진 곳에 처소가 있었어요.”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 교회는 부동산의 가치 때문에 옛 선교유적을 밀어버리고, 시골 교회는 유적 보존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일꾼이 없어 폐사지처럼 버려두고 만다. 점점 이렇게 구술할 사람들마저 귀해진다.

읍내는 인적이 드물다. 50∼70년대 장날이면 어깨를 모로 두고 걸어야 했던 북적임은 ‘함평나비축제’때나 볼 수 있다. 아무렇게나 피던 자운영 꽃도 대단지 꽃밭으로 관리된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 이 지역 모교회의 보혈빛 신앙은 한 마리의 양이 있는 한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다.

함평=글 전정희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hjeon@kmib.co.kr

따라 걸어 보세요

함평읍교회 본당 앞에 향나무 대여섯 그루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48년 예배당 건축 당시 심었던 나무인데 당시 어느 장로가 일본에서 수입해 심었다.



이 같은 조림은 일본강점기 근대건축 양식에서 두드러진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전남 영광군 법성면의 ‘기꾸야여관’ 목조건축물 앞에도 이와 똑같은 일본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몇 해 전 기꾸야여관 집주인이 “향나무에서 뿜어내는 진액 성분이 바람에 날려 목조 주택에 착색되는데 이것이 기름 먹인 것처럼 검게 보이게 한다”면서 “방수, 방충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며 목조 건축물 앞에 일본 향나무가 심어진 이유를 알려줬다. 현 교회 건축물은 바로크양식의 본당 건물과 르네상스양식의 교육관이 나름 매력이 있다. 사찰 집사가 울리는 종은 60여년이 됐다.

교회를 둘러보고 읍내를 한 바퀴 돌 것을 권한다. 인구 8000여명 소읍거리는 향수를 자극한다. 70∼80년대로 돌아간 느낌. 지도상에 나타난 4개의 복지시설은 전쟁 직후 미국 원조를 받아 함평읍교회가 세웠다. 시온원은 지금은 함평 학교면에 소재지를 두고 운영 중이다. 기산봉에 올라서면 무등산과 서해바다가 보인다. 총 6㎞ 도보 1시간30분.

함평읍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함평읍까지 오전 한 차례, 오후 두 차례 고속버스가 있다. 함평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면 교회까지 걸어서 10분 거리. 군청 방향 표지판을 보고 걸으면 된다. 그곳 시내버스 100번을 이용해도 된다. 기차는 읍내에서 떨어진 호남선 학교역에 내리면 되나 읍내까지 올라와야 하므로 되레 불편하다. 자가용의 경우 서해안고속도로 함평IC를 나와 10분이면 읍내에 닿는다.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166 (061-323-5649).

근처 맛집 육회비빔밥 전문점 ‘초록식당’

명품 한우의 고장인 함평의 유명하다는 고깃집에는 대부분 불판이 없다. 그날 도축한 소가 생고기 그대로 식탁에 오르기 때문이다.



함평읍교회에서 걸어서 10분. 함평읍 기각리 5일시장 입구에 합평읍교회 이금희 집사가 운영하는 육회비빔밥 전문점인 초록식당(061-322-5287)이 있다.

함평에서 20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해온 이 집사는 “전국 제일의 한우고기로 알려진 ‘함평천지한우’ 중에서도 2∼3년생 일등급 암소고기만을 당일 구입해 사용한다”고 자랑한다.

이곳 육회비빔밥은 싱싱한 육회에다가 생채무침, 호박, 김가루, 콩나물에 집에서 직접 담근 태양초 찹쌀고추장이 주재료이다. 여기에다가 매일 아침 새로 짜온 참기름도 넉넉히 넣어 썩썩 비벼야 제 맛이 난다. 신선한 육회에 묵은 김치를 한 조각 얹어 한 숟가락 가득 입에 넣으면 여행의 피로도 어느덧 사라진다. 비빔밥에 목이 조금 멘다 싶으면 무와 등뼈를 넣고 밤새 곤 맑지만 깊은 맛의 선짓국을 떠먹는 맛 또한 일품이다.

비빔밥이라 굳이 밑반찬이 필요치 않을 텐데 남도음식의 특징인 풍성한 인심이 식탁을 풍요롭게 만든다. 양파김치 호박왕새우볶음 마늘종무침 콩나물 열무겉절이 꽃게무침 등이 맛깔스럽고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특히 목포에서 당일 배송해 버무려진 꽃게무침은 달달한 인공조미료에 길들여진 우리네 혀끝을 행복하게 만든다. 육회비빔밥 6000원∼1만원, 생고기·육회는 300g에 3만원.

곽경근 선임기자

 

-국민일보, 2010/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