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戰 참전용사의 벽' 제막식서 한국말로 애국가 부른 패튼장군 손녀
아버지도 6·25 영웅… 1953년 참전해 훈장받았죠
2004년 6월 25일 그날, 돌아가셨는데 참 신기하죠
애국가 동영상 수천번 봐
한국어 한두마디 인사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박정현 버전으로 연습했죠
미국 '재향군인의 날'이었던 지난 11일. 미 캘리포니아주 동부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패튼 장군 기념박물관'에서 우렁찬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은발과 금발이 섞여 사금(砂金)처럼 빛나던 중년 여인은 그녀를 둘러싼 600여명의 재향군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면서 '감사합니다'라는 한국어로 말문을 열었다. 또박또박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 애국가까지 부른 그녀는 미국의 전쟁 영웅인 조지 패튼의 손녀 헬렌 패튼(Patton·51)이었다. 패튼 재단 이사장인 그녀는 '패튼 장군 기념관 설립 25주년 기념식' 겸 '한국전쟁 참전 용사의 벽' 제막식 행사에 참가해 자신만의 '깜짝 선물'을 선보였다.
"수백 번도 더 연습했어요. 지금 한번 불러볼게요! 동~해 물과, 백, 두산이~. 어때요? 듣기 괜찮은가요? 저 안 틀렸죠?" 전화로 서로 통성명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그녀는 애국가부터 불렀다. 제막식 행사가 끝난 뒤 마침 미 LA 코리아타운을 방문해 친한 한국 친구들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있다고 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영화 연출과 성악을 전공했다더니 전화상에서도 마치 연극을 하듯 에너지가 넘쳤다.
"구글에서 '애국가(Korean National Anthem)'라고 치니까 Lena Park(가수 박정현)의 영상이 나오더라고요. 아마 수천 번도 더 봤을 거예요. 이상하게 그 음악을 듣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 있죠. 할아버지가 그랬거든요. 세계 어느 전쟁터를 가든 그 나라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는 그 나라 언어를 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요. 그래서 이번 제막식을 앞두고 애국가를 부르기로 마음먹은 거죠." 그녀는 구글에서 노래를 찾았다고 이야기할 때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국가'라고 말했다.
- 지난 6월‘노르망디 상륙작전 69주년’을 기념해 열린 환영식에서 헬렌 패튼(가운데)이 프랑스의 생트 마리 뒤몽에서 참전 용사의 가족들과 인사하고 있다. 헬렌 패튼의 할아버지 조지 패튼 장군은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해 승리로 이끌었다. / Corbis·토픽 이미지
문득 패튼 가문과 한국과의 연결 고리가 궁금해졌다. 1·2차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선에서 로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을 격파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패튼 장군이지만, 한국과의 인연을 찾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희 아버지(조지 패튼 예비역 소장)가 6·25에 대령으로 참전하셨어요! 1953년 초 참전해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은성 무공 훈장도 받으셨죠. 아찔한 적도 있었죠. 갑자기 변경된 작전을 수행하다 중공군의 포격에 거의 돌아가실 뻔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참 신기하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짜가 지난 2004년 6월 25일, 바로 6·25 전쟁 발발일인 거 있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에서 함께했던 친구들이 날 향해 손 흔들며 맞아주고 있다'며 활짝 웃으셨어요. 그래서 이번에 '한국전쟁 참전 용사의 벽' 앞에서 한국어 한두 마디로 인사하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그의 아버지는 6·25 참전 중에 직위 해제될 뻔한 적도 있다고 했다. 탱크를 디젤 오일로 반들반들하게 닦아놓으라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불복종'을 표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인'이 들어간 화기를 쓰기 때문에 디젤과 만나면 폭발할 수 있다는 걸 안 것이다. 덕분에 그는 수십, 수백명의 군인과 민간인의 목숨을 살렸다. 실제 다른 군인의 경우 디젤 오일을 잘못 다뤄 폭발한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철저했어요. 목숨처럼 아끼는 계급장을 걸고 뜻을 관철하신 거죠. 애국가를 연습하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이 났는지도 몰라요."
그녀는 애국가 2절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 부분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패튼 재단 이사장인 헬렌 패튼은 전 세계 참전 용사들을 찾아다니며 '전쟁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이들을 위해 요양 프로그램을 만들어 준다거나, 그녀가 소유한 패튼 출판사를 통해 참전 용사들의 삶을 담은 책들을 펴내고 수익금을 기부하는 등 각종 자선을 하고 있다.
그녀는 "전쟁은 참혹한 결과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는 게 아닌 용서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걸 어른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항상 전장으로 향하던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나랑 같이 놀아주면 안 돼요?'라며 '나쁜 놈들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매달렸다고 해요.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군인은 눈앞에 있는 적이 미워서 싸우는 게 아니라, 그 전선 뒤에,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싸우는 거란다. 증오심을 버리렴' 하고 달래줬다고 해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전쟁 괴물이 돼버렸겠죠."
헬렌 패튼은 '용서와 화해'의 상징이 바로 그녀 자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할아버지는 독일군과 치열하게 대치하며 생사를 넘나들곤 했는데, 그녀는 독일인 의사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인연이라는 게 참 신비롭고 무서워요. 결혼하고 한참 뒤에 알게 됐는데 2차 대전 끝난 직후 저희 할아버지가 제 남편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더군요. 제 남편의 할아버지는 당시 소련(러시아)에 포로로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 앞에 할아버지가 다가가 '평화 시기에 포로를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다. 모두 풀어준다'고 말했다더군요. 본능적인 끌림이 있었던가 봐요. 제 삶이 이런데 어떻게 누구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아버지의 일화를 하나 더 꺼냈다. "6·25 휴전 협정 중이었대요. 중공군 포로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군 배급 줄에 섰다네요. 이를 본 조리사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가누지 못해 식칼을 들고 포로를 향해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뛰었대요. 아버지는 흥분한 그를 맨몸으로 막으며 '이제 다 끝난 일이다! 그도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라고 설득했어요. 나중에 안 일인데, 그 중공군 포로의 아들이 아버지의 사는 곳을 수소문해 감사의 자필 편지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당시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는데도 과거의 그 기억만큼은 또렷했대요. 위독했던 아버지 상태가 그 편지 이후 한동안 상당히 호전되는 걸 보고 전율 같은 게 흘렀죠."
그는 가끔 '패튼'이라는 이름이 영광스럽지만 때로는 부담도 된다고 했다. 언제나 올곧은 길만 가야 하고, 남의 모범이 돼야 한다는 그런 강박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일부 미디어에서 가끔 할아버지를 '호전적인 전쟁광'으로만 밀어붙일 때는 서운함도 감출 수 없다. "할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긴 이야기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전쟁터에 놓여 있다.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와 싸우든, 직장에서 동료와 경쟁하든 싸우면서 커 나가기 마련이다. 싸우되, 폭력은 버려라.' 투사이되 정도(正道)를 지키라 당부하신 거죠. 전 그런 정신이 애국가 속에 살아있고, 이는 곧 한국인의 품성 속에 녹아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조선일보, 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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