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산에서 본 '이종용표 호접몽'
충주댐 건설 예상, 바위투성이 山을 청풍호변 ES리조트로 개발한 이종용
망하기 일보 직전 아내와 네팔行 부부간 믿음으로 이겨내고 성공
‘살아보니 아내밖에 없더라…’사업의 道 아닌 ‘부부의 길’ 역설
- 문갑식 선임기자
금수산(錦繡山)은 충북 제천시 수산면에 있다. 1015m 높이인 산은 원래 '백암(白巖)'이라 불렸다. 정상 부근 흰 바위가 있는데 거기 붉은빛으로 산, 물, 구름 같은 모양이 새겨져 다른 이들은 화암(畵岩)이라고도 했다.
어느 날 단양군수로 있던 퇴계(退溪)가 봉우리에 올랐다. 때는 가을, 산은 비단을 수놓은 것 같았다. 이황은 손수 붓을 들어 이름을 지었다. 비단 금, 수놓을 수. 이 이름은 평양의 진산(鎭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금수산 앞에 청풍호가 들어설 줄 이황도 몰랐을 것이다. 사철 절경 아닌 때 없지만 물안개 피어오르면 선경(仙境)이 바로 예다. 흰 봉우리 밑 기슭에 용소(龍沼)가 있고 주변이 한여름에도 얼음 언다는 얼음골이다.
해마다 이곳에서 연말이면 축제가 열린다. 금수산에 틀어 앉은 ES리조트 직원들 송년회다. 전국에서 모인 직원들은 청풍호 보이는 야외에서, 초청받은 지인들은 그 위 레스토랑에서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다짐한다.
3년 전, 그 즐거운 모임에서 이종용(李鐘龍·71)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선언을 했다. "앞으로 우리 리조트의 회장은 내 아내다. 나는 사장으로, 회장님 모시고 열심히 일하겠다." 그야말로 뚱딴지 같은 일갈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이 노(老)경영인이 하혈(下血)을 시작했다. 대장암이었다. 병원에 실려갔을 때 그는 생명에 대한 집착보다 자기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자찬했다고 한다. "아프기 전에 물려주길 잘했지, 그럼…."
돌이켜보면 금수산과 이종용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줬다. 1976년 여름 그는 제천 구멍가게에서 마을 이장과 막걸리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 땅 찾아다니기 2년, 이장이 8만7000평 바위투성이 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평당 30원씩 270만원, 그는 이 땅을 얼마 전 담석수술 후유증으로 세상 뜬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남들 눈엔 쓸모없는 악산(惡山)이지만 그에겐 충주댐 건설이 끝난 뒤의 광경이 그려진 것이었다.
경북대 사회학과 나와 땅콩 농사짓다 섬유회사까지 거친 '돈키호테'는 그날부터 금수산에 살며 산을 일궜다. 함부로 나무 베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살리는 게 목표였다. 그는 여기 스위스의 풍광을 옮겨놓고 싶었다.
방 한가운데 암반(岩盤)을 그대로 드러냈다. 바닥 뚫고 나온 소나무를 천장 뚫고 하늘로 솟게 했다. 어디 하나 손대지 않은 객실, 그야말로 자연 속 쉼터다. 번잡한 놀이시설은 물론 고기냄새 풍기는 음식점도 없다.
환경(Environment), 우아(Elegant), 최고(Excellent)의 리조트를 짓겠다며 'ES클럽'이란 작명까지 하자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했다. "당구장 차렸느냐"는 얘기부터 "클럽이면 술집이냐"는 질문이 숱하게 쏟아졌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부부는 그로부터 여러 시간 침묵한 채 산길 걸으며 서로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이 못한 말, 내가 전하지 못한 사연, 거기서 빚어진 오해, 의심의 증식, 주변의 구구한 억측, 그리고 그 총합(總合)… 바로 불신.
부부의 믿음은 만난(萬難)을 이겨낼 수 있는 기사회생의 묘약이다. 네팔 다녀온 뒤로 그는 분양권 값을 올리고 45세 이상으로 회원 자격을 제한하는 강수(强手)를 뒀는데 이게 오히려 대박을 쳤으니 모를 게 인생사다.
성치 않은 몸으로 제천에 이어 통영, 제주에까지 사업을 넓힌 그는 항상 직원들을 만나면 이렇게 외친다. "나가자! 쳐들어가자!" 이름난 해외 유명 휴양지에 한국형 리조트를 수출하겠다는 선전포고가 그 두 마디다.
염천(炎天)이 금수산에 내려앉은 날 3년 만에 만난 이종용으로부터 '사업의 도(道)' 아닌 부부의 길을 오랜 시간 들었다. 머리끝을 달구던 태양을 거센 소나기가 덮고 다시 석양이 나타나다 어둠에 사라진 시간이었다.
"살아 보니 아내밖에 없어요. 자식들이야 그만큼 키워줬으니 제 인생 살면 그뿐이고…. 지금도 그때 내린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 멀리 있는 아내를 가리키며) 얼마나 힘차 보여. 이젠 내가 갚아야지."
우리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때론 가슴 깊은 울림이, 때론 소나기와 섞인 짭짤한 물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뭔가 삶의 경지(境地)를 목도하는 듯했다. 몸 성치 않은 그를 붙잡고 묻고 답하고 또 묻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청풍호 물안개 걷히듯 '이종용표 성학십도(聖學十圖)'는 뇌리 속에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젯밤에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인가. 하릴없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만 교훈으로 남은 것인가.
-조선일보, 201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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