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실패·배신… 다 싫어 떠났지만, 그리웠다
드라마 '사랑했나봐' 안재모
'야인시대' 이후 계속된 실패… 그만둘 결심으로 사업했지만 자리 잡고 나니 연기가 그리워
과거의 인기는 그립지 않아요… 연기·가족·사업 다 감사할 뿐
10년 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호쾌하고 날렵한 액션 신을 보여주던 청년 김두한의 모습이 생생한 이들에게 요즘 안재모(34)의 연기 변신은 마치 된장찌개 뒤 후식으로 나온 슈크림빵처럼 낯설고 어색할 수도 있겠다.
MBC 아침드라마 '사랑했나봐'(연출 김흥동·이계준, 작가 원영옥)에서 그가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 '백재헌'은 순정 99%에 1%의 느끼함이 살짝 얹힌 듯한 대형 가구회사 미래전략실장. 작년 10월 첫 방송 된 드라마는 15% 안팎의 시청률로 아침 시간 안방극장 최강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고, 중년 남성들의 '김두한 신드롬'은 아침 드라마 애청자들의 '재헌 앓이'로 세대교체됐다. '사랑했나봐'로 오랜 부진을 털고 재기에 성공한 안재모를 최근 서울 여의도 MBC 촬영장에서 만났다.
"얼마 전 지방 팬사인회를 다녀왔는데 아주머님들이 난리가 났어요(웃음). 배우 입장에서 아침 드라마는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장르이지만, 요즘은 그 위력을 단단히 실감하고 있죠." '백재헌'은 악녀 최선정(김보경)의 핍박을 받으며 궁지에 몰린 여주인공 한윤진(박시은)을 일편단심 보듬으며 사랑을 키워간다. 6일 방송된 82회에서야 두 사람의 첫 키스 신이 나올 정도로 로맨스는 느릿하고 묵직하게 진행 중이다.
- 최근 서울 여의도 촬영장에서 안재모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야인시대’같은 강한 캐릭터보다 지금 출연하는 작품의 '로맨틱 가이' 이미지가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이명원 기자
"'야인시대'나 '남자의 향기' 같은 전작들에서 와일드하고 멋있게 사랑했다면, 지금은 로맨틱하고 따뜻하게 사랑하는 중입니다. 제 정서엔 이런 멜로가 더 맞는 것 같아요."
안재모는 10대 때인 1990년대 '나'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 '학교' 같은 청소년 드라마로 이름을 알리며 일찌감치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23세이던 2002년 '야인시대'를 통해 공중파 3사 통틀어 당시로선 역대 최연소로 연기대상(SBS)을 받으며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이후 출연작들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며 내리막길을 빠르게 걸었던 게 사실. 지금은 두 살짜리 딸과 한 살짜리 아들의 아빠이기도 한 그는 "'야인시대' 이후 잃은 게 많지만, 그만큼 많이 배웠다"고 했다.
"'야인시대'가 정점이었죠. 그 뒤 의욕적으로 임했던 작품이 실패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일도 있었죠. 남들은 평생 살면서 겪을 경험들을 전 너무 한꺼번에 겪고 혼란스러워서 2008년에는 연기를 그만둘 결심까지 하고 사업(홍삼 제품 유통)에 나섰어요. 거래처 트기엔 좋은 조건이었죠. '야인시대' 안재모가 직접 영업을 뛰는데 어느 사장님이 안 만나줬겠어요(웃음)?"
3년 동안 발로 뛰며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그를 찾아온 건 연기에 대한 갈망이었다. "스타 배우였다는 자존심 같은 거 다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주어진 역할이 무엇이든 열심히 하자는 자세로 임하다 보니 지금처럼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도 스타덤의 한가운데 있던 과거가 그립진 않으냐"고 묻자 그는 극중 '백재헌'처럼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기대상이란 건 평생 받기도 힘든 건데 한 번 받았으면 됐죠. 지금은 '뭐든지 감사하자'는 게 생활신조예요. 연기자로서의 삶, 내 사업과 내 아이들…." 안재모는 "20대엔 겁나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가 눈에 보인다. 정말 서른 이후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고 했다. "예전엔 길거리에서 시청자들이 흘끗 보면 쑥스러워했는데, 지금은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예요. 철이 들었거나, 넉살이 늘었거나 둘 중 하나겠죠? 하하."
-조선일보, 20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