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은퇴 선언…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 124승 등 기록
94년 한국인 첫 메이저리그行 97년부터 5년간 두자릿수 승리
IMF시절 국민에 희망 심어줘, 오늘 기자회견… 거취 밝힐 듯
'코리안 특급' 박찬호(39)가 마운드를 떠난다.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한국 프로야구 무대에서 19년간 투수로 활약했던 박찬호가 29일 한화 구단을 통해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가 등번호 61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는 모습도 이젠 볼 수 없게 됐다.
1994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박찬호는 단순한 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낯선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한 개척자였고, 야구 선수뿐 아니라 숱한 청년들의 롤모델이었다. IMF 외환 위기로 침체에 빠졌던 1990년대 말에는 온 국민이 박찬호의 활약을 지켜보며 힘을 얻었다.
◇공주 소년, 메이저리그에 가다
박찬호는 1973년 충남 공주에서 3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 중동초 시절 원래 육상부였던 박찬호는 야구부 감독의 권유로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박찬호는 훗날 "야구부원들이 매일 운동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을 봤다"며 "나도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내야수로 시작했던 박찬호는 공주중 입학 후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타고난 어깨에 노력이 더해져 나날이 공이 빨라졌다. 박찬호는 "매일 눈을 뜨자마자 팔굽혀펴기를 100개씩 했고, 틈만 나면 턱걸이로 팔과 어깨를 단련했다"고 기억했다.
- '코리안 특급'박찬호(한화)가 29일 구단을 통해 은퇴 의사를 밝혔다. 박찬호는 1994년 국내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7년간 동양인 최다승(124승) 기록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됐다. 사진은 박찬호가 지난 6월 10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넥센전에서 팬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전준엽 기자
고교 시절 박찬호는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불안한' 투수였다. 박찬호의 대학 동기(92학번) 중에는 임선동·조성민 등 초고교급으로 평가받던 투수들이 많았다. 그런 박찬호가 미국 스카우트들에게 포착된 것은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대회였다. 박찬호의 150㎞대 강속구를 눈여겨본 것이다.
이듬해 1월 박찬호는 LA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10억원)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박찬호는 한양대 2학년이었다.
◇박찬호, LA 다저스의 수퍼 스타로
메이저리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박찬호는 1994시즌 초 두 경기에서 4이닝 5실점(평균 자책 11.25점)을 기록하고 마이너리그로 밀려났다. 다저스는 1996년 박찬호를 다시 메이저리그로 불러올렸다.
- (왼쪽)'한국식 인사'로 화제 - 경기 전 주심에게 인사하는 박찬호.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오른쪽 위)전설의 시작 - 1994년 LA 다저스 입단식. ‘61번의 전설’이 시작됐다, (오른쪽 아래)2005년 박리혜씨와 결혼 - 2005년 11월 하와이에서 결혼. 아내 박리혜씨는 박찬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AP,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연합뉴스
박찬호가 꿈에 그리던 첫 승을 거둔 날은 1996년 4월 7일. 리글리구장에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구원 등판해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승리투수가 됐다. 미국 땅을 밟은 지 2년 만이었다. 그해 박찬호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5승5패(평균 자책 3.64점)를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1997년 박찬호는 잠재력을 꽃피웠다. 두자릿수 승리(14승8패)를 따내며 팀 동료였던 노모 히데오(일본·14승12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해부터 박찬호는 5년 연속 10승을 돌파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로 금메달을 따며 병역 혜택을 받은 박찬호는 탄탄대로를 밟았다.
2001년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뽑혔다. 몸값도 급증했다. 2001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박찬호는 5년간 6500만달러를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떠났다. 당시 역대 텍사스 투수로는 최고 몸값이었다.
◇잇단 부상… 시련 딛고 124승
다저스가 '영광의 무대'였다면 텍사스는 '시련의 땅'이었다. 박찬호는 2002시즌 개막 전부터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에 시달렸다. 그해 성적은 9승8패였다. 2003년(1승3패)·2004년(4승7패)은 최악에 가까웠다. 다저스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허리 부상 등이 겹쳤다.
2005년 시즌 도중에 결국 박찬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 됐다. 그해 박찬호는 12승(8패)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다시 고난의 행군이 이어졌다. 박찬호는 뉴욕 메츠(2007년), 다저스(2008년), 필라델피아 필리스(2009년)로 옮겨 다녔다.
2009년과 2010년 박찬호는 마지막 선물을 받았다. 2009년 필라델피아 소속으로 첫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고, 이듬해 뉴욕 양키스를 거쳐 입단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통산 124승째를 올렸다. 노모 히데오(123승)를 제치고 동양인 메이저리거 최다승을 거둔 것이다. 이를 끝으로 박찬호는 17년간 청춘을 바친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아듀 박찬호, 그의 다음 진로는?
지난해 일본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1년간 선수 생활을 했던 박찬호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 무대로 한국 프로야구를 선택했다. 그는 한화 구단이 제시한 연봉 6억여원을 모두 유소년·아마 야구 발전기금으로 써달라고 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정한 최저 연봉(2400만원)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 꿈을 잃은 청춘에게 보여주고 싶은 18년前 사진 한장… 박찬호 은퇴 선언… 19년간 달려온 ‘코리안 특급’이 종착역에 멈춰 섰다. 미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 1호,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그 최다승(124승·98패) 기록을 세웠던 박찬호(39·한화)가 29일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IMF 환란(換亂)’의 경제 위기에 지쳐 있던 국민에게 힘을 줬던 스포츠 영웅의 퇴장이다. 사진은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 모습.
박찬호를 영입한 한화는 순식간에 최대 관심 구단이 됐다. 전성기가 지났지만 박찬호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뜨거웠다. 올해 초 박찬호의 등판 경기는 7연속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프로야구 첫 700만 관중 시대를 앞당겼다. 불혹을 앞둔 나이에도 박찬호는 녹슬지 않은 실력을 발휘했다. 올해 최종 성적은 5승10패 평균 자책 5.06점. 미국·일본 무대를 포함해 통산 130승(113패)째를 채웠다.
한화 구단은 내년에도 박찬호가 팀에 남아주길 바랐다. 한화 후배들도 한목소리로 박찬호의 잔류를 요청했다. 박찬호는 11월 초부터 3주간 미국에 머물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개인 훈련을 하다 보니 오히려 지난 몇년간보다 몸 상태가 좋아 은퇴를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박수 칠 때 떠나는 길을 택했다.
박찬호는 30일 오전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향후 계획을 밝힐 전망이다. 19년간 쉼 없이 달려온 박찬호가 꿈꾸는 두 번째 인생은 무엇일까.
-조선일보, 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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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기자회견
"저는 참 운이 좋은 녀석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서 뭣도 모르고 야구를 시작했어요. 친구나 선배보다 잘해보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서울의 대학도 들어가고, 메이저리그 진출이라는 영예도 얻고…. 한국 야구 역사상 저만큼 운이 좋았던 선수가 또 있을까요?"
박찬호(39)는 지난 30일 오전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지난날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며 "그간 도와준 여러분과 가족, 동료,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스스로에게는 "지금껏 견뎌줘서 수고했고, '장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 박찬호가 30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30여년 야구 인생을 정리했다. 박찬호는 1시간30분가량 이어진 회견에서 “이게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꿈을 위해 새로운 설계를 할 것”이라고 했다.
박찬호는 작년 12월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입단 기자회견 때처럼 한화 구단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넥타이를 하고 나왔다. 회견장에는 취재진 100여명이 몰렸다. 미국 메이저리그 홈페이지도 이날 '아시아 출신 최다승 투수인 박찬호가 은퇴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1994년 한국인 1호로 미국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박찬호는 19년간 프로 생활을 하며 영욕(榮辱)을 모두 경험했다. 그때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던 것이 바로 그의 유니폼이었다. 박찬호는 은퇴 기자회견에 그간 모아뒀던 옛 유니폼 13개를 손수 챙겨 왔다. 그는 "사실 국가대표 유니폼과 다저스, 한화 등 몇 가지만 뽑으려고 했다"며 "그런데 뽑아 놓고 보니 다른 유니폼들에 너무 미안하더라"고 했다.
박찬호는 회견장 앞에 걸린 유니폼과 마치 대화를 나누듯이 하나하나씩을 소개했다. "공동묘지 훈련 등 스토리가 많은 유니폼"(공주중), "가장 많이 생각나는 파란색 유니폼"(LA 다저스), "태극 마크를 달고 금메달 감격을 누렸던 유니폼"(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참 눈물 많이 흘리게 했던 유니폼"(텍사스 레인저스)…. 사연이 없는 유니폼은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입었던 오렌지색 한화 유니폼을 바라보며 박찬호는 "오랫동안 꿈꿨던 유니폼"이라고 했다.
- '한국 야구의 전설'을 쓴 13개의 유니폼… 박찬호가 30일 은퇴 기자회견에 손수 가져 온 유니폼 13개. 왼쪽부터 공주중, 공주고, LA 다저스,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2001 메이저리그 올스타전(내셔널리그 소속),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6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표팀,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일본 오릭스 버펄로스, 한화 이글스 유니폼. /이덕훈 기자
가장 기뻤던 순간에 대해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첫 승보다는 마지막 124승을 했을 때"라며 "오랜 절망을 딛고 이룬 성과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로팀에서 한 번도 우승을 못한 것에 대해선 "물론 월드시리즈 우승은 못했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2009년)에서 내셔널리그 우승은 했다"며 웃었다. 박찬호의 오른손 약지에는 그때 받은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박찬호는 "한국 무대에 올 때부터 1년을 목표로 잡았는데 시즌이 끝나니까 아쉬움이 많았다"며 "한화 구단과 후배들도 잔류를 부탁해 바로 은퇴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은퇴를 결심한 까닭에 대해 박찬호는 "내년부터 하려 했던 계획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부터 야구 행정과 경영, 구단 운영 등에 관심이 많았고 미국에서 이를 더 공부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찬호는 앞으로 메이저리그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구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것으로 보인다. 파드리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전 LA 다저스 구단주)는 다저스 시절부터 박찬호의 '양아버지'로 통했다. 박찬호는 최근 3주 정도 미국에 머물 때도 오말리 등 파드리스 구단 관계자와 수차례 만났다고 한다. 박찬호는 "특정 구단 소속으로 일하는 것은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지금 이 자리에선 분명하게 말씀 못 드리지만 앞으로 천천히 하나씩 (내 진로가) 알려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박찬호는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연말을 보낼 계획이다.
-조선일보, 20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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