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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목숨과 바꾼 하나님 영광, 충성스런 종 - 주기철

하마사 2012. 9. 30. 09:39

 

기독신앙인물 (크리스천 지성인과의 가상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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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朱基徹

(1897.11.25~1944.04.21) 한국

경남 창원 출생. 3.1운동에 참가한 후 1926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산, 마산, 평양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38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복역 중 옥사하였다.

 

 
 
Prolog. 목숨과 바꾼 하나님 영광, 충성스런 종 주기철 목사를 만나다. 
 
주기철 (朱基徹, 1897~1944)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다가 하늘나라로 떠난 목사님이다.
1897년, 덕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똑똑하고 착한 아이로 자라다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애국심과 신앙심을 키우며 인생의 기반을 닦았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뒤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기로 결심 했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예수를 따르는 참제자의 삶"을 보여주며 일제 치하에서 자포자기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와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신사참배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갖은 고문을 받다가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4월 21일에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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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목사님은 신사 참배의 시험을 뛰어 넘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목사님의 마음과 정신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듣던 대로 정말 겸손하신 것 같아요.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일제강점기라는 엄청난 고통의 시절을 보내셨는데요.
그 시절에는 기독교가 일반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나요?
 
A: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들어 우리나라를 강제로 삼켜버렸죠. 1910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으로 접어든 사건이에요.
나라가 망하자 전국 각처에서 통곡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어요. 정신 없는 시기였죠.
당시 우리 집안도 기독교에 대해 무지했는데 큰형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저는 4남 중 막내로 저만 어머니가 달랐어요. 형들은 그런 저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친형제처럼 대해줬습니다.
그 때는 정말 기독교인을 보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미 수백 년 전 우리나라엔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어요. 물론 일본군들과 함께 시들고 말았지만 작게나마 살아있던 작은 씨앗으로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거에요. 저는 형에게서 기독교가 무엇인지 듣게 됐어요.
그리고 직접 보기도 했죠. 형은 날마다 성경을 읽더니 나중에는 그렇게 좋아했던 술, 담배까지 끊어버리더군요.
형의 변화와 권고로 저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곧 예수님을 만났죠.
연이어 아버지도 마음을 돌이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다.
 
Q. 그렇군요. 그럼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다 신학을 공부하진 않는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A: 저는 17살 되던 해 오산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때 학생들 마음에는 울분과 분기가 가득했어요.
저도 힘 없는 나라로 인해 늘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투쟁의식도 강했죠.
그런데 어느 날 주일 밤이었습니다. 당시 큰형이 세운 웅천교회에서 간간이 설교를 하곤 했었거든요.
그 날도 제가 설교를 했었는데 큰형이 제 설교를 듣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어요.
처음엔 오산학교를 마치고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물었죠. 전 그 때 공부를 열심히 할 뿐 다른 생각은 없었거든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했죠. 형은 제가 장차 목사가 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저는 무척 놀랐어요.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말이었지만 형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어요.
하지만 저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오산학교의 선생님들을 보면서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다 제가 20살 때였어요. 3.1운동이 터지고 우리나라 땅이 대가 없는 피에 온통 물들고 있었죠.
그 때 아주 훌륭한 목사님 두 분이 가는데 마다 부흥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길선주 목사님과 김익두 목사님이요.
저는 당시 큰 실의에 빠져 있었어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히 하는 일이나 꿈이 없이 초조한 마음만 더해가던 때였죠.
집안 형편이 기울고 눈병도 생겨서 공부하는데 큰 지장이 있었어요. 그런 때 김익두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됐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명성이 워낙 자자했고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김익두 목사님은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무작정 만세 운동을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가슴을 치면서 회개해야 한다고, 민족의 죄를 자복해야 한다고 하셨죠.
그 말씀은 제 가슴을 울렸어요. 지은 죄를 다 털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라고 소리치는 목사님의 목소리 때문에 닫혀있던
제 귀가 열렸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었어요. 제가 큰 죄인임을 처음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제발 구원해달라고 간구했어요. 저는 그때까지 머리로는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적이 없었거든요. 저는 자복하면서 울고 또 울었어요.
한번 터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더라고요. 거듭난다는 말을 바로 그런 때 쓰는 것 같아요.
그 후에 저의 마음이 변화됐거든요. 그전까지만 해도 애국하는 꿈에 부풀어 있던 제가 하나님 일만 생각하게 되었죠.
동시에 새로운 꿈이 생긴 거에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가장 먼저 신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결혼을 하고 2년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Q: 집안 형편도 기울고 눈병까지 있는 상황에서 참 힘드셨을 것 같아요.
기울어진 형편이 신학교에 입학하는데 지장이 되진 않았나요?
 
A: 신학교를 가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더라고요.
저는 형편이 풀리기만 하면 기어코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저의 결심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얼마 안가 가정 형편이 많이 회복됐어요.
저는 용기를 얻어 더 큰 목표를 세웠죠. 목사님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예전에 큰형이 저에게 목사님이 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것이 현실로 다가온 거예요. 저는 아버지께 하나님의 일에 제 몸을 바치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아버지는 말리긴 하셨지만 끝까지 반대하진 않으셨어요.
아 눈병은 연희전문학교에 있을 때 갑자기 앓게 됐어요. 처음엔 눈에 피로감이 느껴지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시력까지 나빠지면서 칠판의 글씨뿐 아니라 노트에 적힌 글씨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학교를 잠시 쉬고 있을 때 많이 나은 거에요. 상당히 회복되었죠.
연희 전문학교는 신학교에 가기로 마음먹고 그만두게 되었고요.
 
Q: 그것 참 은혜로운 일입니다.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큰 어려움은 없었나요?
 
A: 학교는 비록 시설은 보잘것없었지만 저는 이기선 목사와 김익두 목사가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늘 떠올렸어요.
두 분을 상기시켜서 늘 스스로 기운을 냈죠. 신학교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다 외국인 선교사들이었어요.
어둠으로 뒤 덮인 이 땅을 위해 고맙게도 먼 나라까지 와 헌신하고 있었던 거예요. 첫 학기 과목은 주로 출애굽기, 공관복음,
사도행전, 사도론, 교회사, 현대신학 같이 어려운 것들이 많았어요.
교수님들 발음이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우리말을 굉장히 잘했어요.
그분들의 헌신과 수고 앞에서 저는 아주 작은 사람이었어요. 행실로 본을 보이신 분들이죠.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어 매우 기뻤어요.
성경은 신자들에게 있어 신령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삶의 기준이잖아요.
신학을 통해 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2학년이 되자 양산읍교회의 전도사로 파송을 받게 됐어요.
토요일이면 일찍 교회로 내려가 주일날 교회를 섬기고 월요일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다른 신학생들도 각처에 있는 교회로 나가서 임시로 전도사 일을 보았어요.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 여가 시간에 교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일을 보면서 남는 시간에 학교를 다닌 셈이에요.
학제는 3년이었지만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일에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대부분 졸업까지 4년은 넘게 걸렸어요.
심하면 8년 이상 걸리는 학생들도 있었어요.
저는 대다수의 학생들처럼 4년 만에 졸업을 결정하고 스스로 스케줄 관리를 했습니다.
그 결과 30살이 되는 해 졸업을 할 수 있었죠. 저는 예수님이 30살 때부터 공생애 사역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저에게 적용시키며 혼자 무척 흐뭇했습니다.
학교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한번 크게 곤란한 적은 있었어요.
졸업을 1년 앞둔 시기였는데 오산 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남강 선생님이 찾아오신 거에요.
그분은 청소년기 저에게 큰 도움이 되신 분이에요.
영적으로도 그렇고 지적으로도 그랬어요.
남강 선생님은 제가 졸업하고 교문을 나설 때 저에게 언젠가는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남강 선생님이 독립선언문에 가담하는 바람에 옥고를 치르게 됐죠. 알아볼 길이 분명 있었는데
학교 일과 교회 일로 찾아 뵙질 못했어요. 너무 죄송했습니다.
남강 선생님은 저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 부탁은 저를 더욱 죄송스럽게 했죠.
저에게 오산학교를 맡기려고 하셨어요. 오산 학교는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지켜온 학교였습니다.
저는 큰 감동을 받긴 했지만 목회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어요.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딱 자를 수밖에 없었죠.
그 때 죄송했던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Q. 목사님에게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단단한 목사님의 신앙에 본보기가 되어준 분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남강 선생님처럼 목사님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인생의 선배들이 또 있나요?

남강 선생님과 같이 오산 학교를 이끌었던 고당 조만식 선생님도 저의 참 스승이세요.
그분은 일본의 명치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식민지하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죠.
남강 선생님의 간청으로 세 번 만에 오산학교에 오게 되셨어요.
겨우 마음을 돌리셨지만 무려 9년 동안 오산학교의 교장으로서 우리에게 민족애와 신앙심을 길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민족애가 하나님 나라를 가리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많은 목사님들을 보내주신 것 같아요.
저를 회심케 한 설교를 선포하신 김익두 목사님이 그 중 한 분이세요.
김익두 목사님은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 목숨을 내놓고 설교를 하셨어요.
가는 데마다 부흥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어요.
연희전문학교에 있던 시절 만난 이기선 목사님도 저를 잡아주셨죠.
여러 문제로 힘든 시기였는데 그 분의 설교 말씀은 나태에 빠져 있던 제 태도를 채찍질했어요.
종말론적인 설교를 참 많이 하셨는데 낙심에 빠진 저의 마음을 돌이켜 주었죠.
그 분을 통해 중요한 것은 공부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Q. 어려운 때에 깨어서 사명에 힘쓰신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일본 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의 형편이 짐작이 갑니다.
 
A: 일본의 수탈 정책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우리나라 전역에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는 마치 물이 새는 배와 같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속수무책으로 보였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3년 8월, 평안도 일대에 대홍수가 났습니다.
대동강이 25척이나 불어나 평양 시가지를 덮쳤어요.
그 해에 일본에서도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이 우리나라에 지대한 피해를 입혔죠.
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 사람들을 헐뜯는 해괴망측한 유언비어가 난무하더니 우리 동포 수천 명이 일본인의 손에 학살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불행은 계속되는 것 같았어요.
2년이 지나고 이번엔 기근이 찾아옵니다.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는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렸어요.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전국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살인 사건만 해도 3백건이 넘었으니 하루에 한 명씩 살해당하는 꼴이었어요.
또한 그 해에 검거된 강도와 절도범은 7천 명이 넘었어요. 저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농담조차 할 수 없었어요. 우리 민족의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 가슴이 아팠거든요.

Q: 주기철 목사님은 진리를 향한 열정과 교회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했던 분으로서 당시 우리나라의 큰 등불이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말입니다. 그 분 말대로 목사님은 진리를 향한 열정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신사참배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것도 견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A: 신사참배에 관하여는 어떻게 합리화할 여지가 없어요.
명백한 우상숭배인 동시에 우리의 민족정신을 강탈하는 악랄한 술책이니까요.
교회가 바로 서서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국민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 양심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 세상은 유한한 것일 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죽기를 두려워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겁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죄악과 싸우시다 끝내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우리도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 마땅해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 부인이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흘려 들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 일본군이 무슨 문제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더러 광신자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고리타분하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Q: 목사님이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를 맡기 시작하자
신사 참배가 더 심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나요.
 
A: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습니다.
1938년 2월에는 김일선 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신사참배를 찬성한다는 결의안을 통과해 버려 많은 교회가 곤욕을 치루었어요.
일본의 협박은 점점 우리의 목을 죄어왔습니다. 천주교는 오래 전에 신사참배에 무릎을 꿇게 됐죠.
그리고 여름에는 평양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가 신사참배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문을 닫게 되었어요.
그 밖에도 수많은 신자들이 핍박을 견디다 못해 차례로 신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치졸한 방법으로 우리의 신앙 양심을 수탈했던 겁니다.
일본인들은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하고 나설 이기선 목사님과 저와 채정민 목사님을 검거해 감옥에 가둬버렸어요.
당시 이기선 목사님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사참배 반대를 부르짖었고 채정민 목사 역시 그의 일에 가담하고 있었어요.
결국 제 27회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에 찬성을 결의하게 됩니다. 아무도 반대편에 손을 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목적을 달성한 평양 경찰서는 홀가분하게 우리 일행을 석방했죠.
저는 장로교가 저지른 일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그 후에도 더한 유혹과 회유로 일본인들은 제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노력을 가하더군요.
목사를 그만두면 저만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도 넘어가 주겠다고 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절친한 친구 목사 한 명이 저를 찾아와 피하라고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 말이 예수님도 위급할 땐 몸을 피했다는 겁니다. 그 친구는 저를 위해서 그런 말을 했지만
그것은 사탄의 계략이었을 것이 분명해요. 저는 덕분에 그 일로 내가 무너지는 순간이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순간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Q: 목사님의 투철한 신앙심이 존경스럽습니다.
목숨까지 내놓고 예수님을 따른 그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사 참배와는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 사탄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A: 네, 저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죽음의 권세야말로 사단의 최대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권세를 꺾고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우리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솟아납니다.
주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그분을 의지하여 얼마든지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들이 끝까지 이 땅에서의 고난을 견딜 수 있게 기도할 것입니다.
한 순간의 고통을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도록 이어지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우리 성도분들은 오랜 고통이 주어지더라도 끝까지 인내하길 원합니다.
마지막 여러분을 향한 저의 기도제목은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의를 내동댕이치면서까지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의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죽음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천 번, 만 번 죽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맙시다!
 
도서명 : 예수의 양 주기철 - 홍성사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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