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본질/봉사(섬김)

서울 원천교회의 작은 기적 '사랑의 쌀독'

하마사 2012. 9. 8. 09:45

 

퍼내도 퍼내도 계속 쌀 나오는 항아리의 '비밀'

누구나 쌀 넣고, 누구나 퍼가는… 서울 원천교회의 작은 기적 '사랑의 쌀독'
"이렇게 굶는 사람 많다니" 하루하루 줄어드는 쌀에 보람 느끼면서도 충격받아
누구나 마음놓고 퍼가도록 쌀독 옆엔 쪽문 만들어

서울 서대문구 원천교회 건물 내부 오른쪽 구석은 항상 불이 꺼져 있다. 여기엔 높이 1m쯤 되는 쌀독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옆엔 쌀을 담아갈 수 있는 비닐봉지가 준비돼 있다.

꺼진 불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누구든 쌀을 퍼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쌀독 옆에는 조그만 쪽문도 있어 쌀독을 찾는 사람이 교회 안쪽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쌀독은 지난 7월 생겼다. 문강원 담임목사가 "누구든 퍼갈 수 있는 쌀독을 만들어 밥 굶는 사람이 없게 하자"며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에 사람들은 "요즘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면서 문 목사가 괜한 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쌀독이 놓인 지 2개월이 된 요즘 교회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두 달간 교회 측이 쌀독에 넣은 쌀이 10㎏들이 100포대다. 교회 신도들이 개별적으로 집에서 퍼다 부은 쌀도 적지 않다. 최소 1t이 넘는 쌀을 누군가 퍼간 것이다. 비닐봉지 하나에 쌀이 2㎏가량 들어가니 어림잡아 수백 명이 '사랑의 쌀독'을 이용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제주형 목사는 "쌀이 부족한 사람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하루하루 줄어드는 쌀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쌀은 누가 퍼갈까. 교회 관계자들이 종종 목격하는 '쌀독 이용자'는 60대 이상이 많은 편이지만 20·30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 서대문구 원천교회에 있는 사랑의 쌀독에 한 여성이 쌀을 붓고 있다. 누구나 쌀을 넣을 수 있고,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는 이 쌀독에 교회 측이 지난 두 달 동안 부은 쌀이 10㎏포대로 100개다.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넣은 쌀까지 합하면 1t을 넘는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공짜 쌀에 눈독 들이는 얌체들이 많은 건 아닐까. 교회 관계자들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쌀이 없어지기 시작한 건 7월 10일 이후부터다. 이날 교회에선 서대문구 구청 관계자들과 사회복지사, 생계가 어려운 서대문구 주민들이 간담회를 했다. 간담회에서 주민들은 "당장 내일 먹을거리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곁에 있던 교회 관계자들이 "그러면 우리 쌀독에서 퍼가라"고 했다. 제 목사는 "한 30대 여성은 '남편 사업이 잘못돼 죽을 생각까지 했다'면서 '아이들 배고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진다'고 펑펑 울었다. 그분은 '오늘 우리 아이들 안 굶겠네요. 고맙습니다'라며 쌀을 퍼갔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들은 각 동으로 돌아가 교회에 있는 쌀독을 홍보했고, 이때부터 쌀독의 쌀이 줄기 시작했다.

사회복지사들은 원천교회의 쌀독이 우리 사회에 복지 사각지대가 여전히 많고, 이들을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서대문구 남가좌2동 주민센터 이현숙 주민생활지원팀장은 "갑자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돼도 승인까지 보통 두 달이 걸린다. 이 기간은 알아서 해야 하는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북가좌2동 주민센터의 한 사회복지사는 "쌀을 좀 줄 수 없겠냐고 찾아오는 사람이 일주일에 2~3명은 꼭 있다. 홀로 남았지만 호적상 가족이 있어 기초생활수급자가 못 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103만명이다.

제 목사는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와서 고개를 푹 숙이고 쌀을 퍼가시는 분이 많다. '몸이 아파서 내일 또 오기가 힘들어서 그러는데, 두 봉지 퍼가면 안 되겠느냐'고 하시는 분도 있고…. 그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