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 사망

하마사 2011. 10. 6. 09:59

향년 56세.."'혁신의 아이콘이자 이 시대 최고의 CEO" 평가

애플Ⅱ·아이패드로 PC시대 이어 포스트PC시대까지 개척

디지털시대 새 라이프스타일 창조한 'IT업계 전설'로 남아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임상수 특파원 = '혁신의 아이콘(icon)'이자 이 시대 최고의 최고경영자(CEO)로 칭송받아온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가 영면했다. 향년 56세.

잡스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입양아,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서 축출과 복귀, 희귀암 발병과 투병, 스마트폰, 태블릿PC 아이폰과 아이패드 출시로 디지털시대 새 라이프스타일 창조, 화려한 프레젠테이션(PT) 등 숱한 화제와 함께 유명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파산지경에 이른 애플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IT기업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롤러코스터'와 같은 생을 마감하며 글로벌 정보기술(IT)업계의 신화로 남게 됐다.

애플은 6일 이사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애통한 마음으로 스티브 잡스가 오늘 사망했음을 알린다"고 발표했다.

애플은 "스티브의 영명함과 열정, 에너지가 멈추지 않는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풍부해지고 향상됐다. 스티브로 인해 이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고 말했다.

잡스는 1955년 태어난 직후 곧바로 입양된 후 리드대학에 입학했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1976년 '컴퓨터 천재'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알토스 소재 입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해 이듬해 개인용PC인 애플Ⅱ를 내놓으면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1985년 자신이 영입한 CEO 존 스컬리과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으며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아이맥에 이어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을 통해 디지털시대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잡스는 특히 1977년 애플컴퓨터Ⅱ로 PC시대를 열어젖힌 후 30여년 만에 태블릿PC 아이패드를 내놓음으로써 PC시대를 접고 포스트PC를 주도해 세계 역사를 스스로 개척하고 주도했다는 평이다.

잡스는 그러나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뒤 2009년 간이식 수술까지 받는 등 애플의 혁신을 주도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치열한 긴 투병생활을 했으나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잡스는 올해 초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까지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의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가 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칭송한 바 있다.

nadoo1@yna.co.kr

 

-연합뉴스, 20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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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애도 속에 그는 갔지만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 가슴에

6일 아침, 독자들은 좀 이상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난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인의 부음을 듣는 것 같다.'

2004년부터 췌장암을 앓아온 스티브 잡스가 56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6일 오전.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문자메시지로, 트위터로, 인터넷 댓글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같은 시각 미국·유럽·남미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문장은 짧았다. '아이 새드(iSad·슬퍼)'. 당연히 그의 히트작 아이패드(iPad)에서 온 말이다.

하버드대를 다닌 천재이자 기부·선행의 대명사인 빌 게이츠가 '모범답안' 천재라면,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망나니짓을 하고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의 시작은 삼류였다. 자기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대드는 직원은 가차없이 잘랐다.

그런데도 세계는 이 괴팍한 창조자에게 열광했다.

스티브 잡스는 소문자 'i'면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애플의 아이맥(iMac), 아이폰(iPhone), 아이팟(iPod), 아이패드(iPad)엔 모두 'i'가 붙는다.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다. 죽은 그가 'iHeaven(천국)'에 있을 것이란 농담도 그래서 나온다.

"나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본 적이 없다. 나는 룰을 만드는 사람이다." 당돌한 비주류 선언이었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그래, 나(i) 별거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나는 나다.

그가 40대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 "외부 세계는 당신을 특정한 이미지로 규정하고 그걸 더 공고히 만들려 할 것이다. 예술가로 살아가기란 점점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잘 있어, 나는 벗어나고 싶어'라 말하고 박차고 일어나야 해." 잡스 제품은 오만하고 낯설었다. 아이폰·아이패드는 배터리를 교체할 수 없다. 매끄러운 디자인을 위해서다. 소비자가 싫어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이런 뜻이다. 좀 깨지면 어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 잡스에게 '대세'란 의미 없고 따분한 것이었다. "나는 세계 최대가 아니라 최고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다." 잡스는 애플2로 PC(개인용컴퓨터)시장을, 다시 아이패드·아이폰으로 '포스트PC'시장을 만들었다. 경쟁자와 아등바등하는 대신 쿨(cool)하게 시장을 새로 창조했다.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로도 충분히 멋지다는 것, 커다란 회사명 대신 '애플' 마크 하나로도 디자인이 멋질 수 있다는 것, 전화기로 전화만 거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것도 스티브 잡스였다.

6일 지구인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것은 그가 '다르게 생각하기(Think Different)'라는 새로운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걸 잡스 스타일이라 부른다.

애플Ⅱ·아이패드로 PC시대 이어 포스트PC시대까지 개척… 디지털시대 새 라이프스타일 창조한 스티브잡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조선일보, 20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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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21세기의 다빈치 떠나다

현대인의 삶을 바꾼 IT 거인의 56년
사생아… 이단아… 독재자… 혁신가… 영화바보다 더 영화같은 삶
생후 1주일만에 입양돼, 대학 중퇴 후 창고서 창업
애플 신화 만들어… 췌장암 이후 7년간 투병

"가장 위대한 혁신가를 잃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애플'의 창업자 겸 전 최고경영자(CEO)로 우리 삶을 혁신했던 스티브 잡스(56)가 5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기술·경영·디자인을 꿰뚫어 본 '이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뉴욕타임스)도 암과 벌인 7년 전쟁에선 승리하지 못했다. 2004년 췌장암 수술, 2009년 간 이식 수술을 받고도 보란 듯 다시 나타난 그였다. 잡스는 지난 2월 17일 미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자신에 대해 '6주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보도한 다음 날 오바마 대통령이 주재한 IT 기업 경영진과 만찬 회동에 참석했고, 3월 2일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에 나왔다.

5일(현지 시각)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애플스토어를 찾은 추모객이 젊은 스티브 잡스가 사과(애플)를 들고 있는 사진을 아이폰에 띄운 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AP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특유의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둥근 안경을 착용한 잡스의 흑백 사진으로 전면을 채우고 '스티브 잡스, 1955~2011'이라는 문구만 달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영민함과 열정, 에너지가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 덕분에 우리 삶은 윤택해지고 향상됐다"고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뒤 입양,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로부터 축출된 뒤 복귀와 재기, 희귀암 발병과 투병, 아이폰·아이패드 출시를 통한 디지털 시대 새 라이프 스타일 창조…. 그는 드라마의 상상력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었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입양됐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딸을 시리아인 유학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심슨 부친의 반대로 미혼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잡스는 '대학 진학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양부모 폴·클라라 잡스에게 맡겨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이 강해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집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약을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전자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학·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잡스는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공부를 때려치운다. 그는 중퇴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구하려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종교 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약 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히피 저항 문화에 휩쓸려 밥 딜런과 비틀스에게 빠져 살았던 잡스는 자퇴 후 다니던 전자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불교로 개종해 아내 로린 파월과 결혼식도 불교 의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1976년 다섯 살 많은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공동 창업한다. 사무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양부모 집의 창고였다. 잡스는 이듬해 개인용 PC 애플2를 내놓으면서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기가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동안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다. 그는 1996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디지털 시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PC 시대를 열었던 그는 PC 이후 시대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올해 1월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말했다. 그는 췌장암 판정 후 '죽음'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돕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기하는 것이다" "묘비에 '최고 부자 잠들다'는 글귀엔 관심이 없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굉장한 일을 해냈지'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서 "늘 갈망하고 늘 우직하게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잡스가 이끈 제품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신은 우리가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정말 많은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내십시오."(2006년 5월 NBC뉴스 인터뷰)

그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 앤과 사이에 딸 리사가 태어났지만 혈육임을 부인했다. 양육비도 주지 않아 미혼모 앤이 근근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성장한 딸이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서 당시 일을 언급했다. 생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매몰차게 외면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재자'나 '사소한 일에까지 목숨 건 관리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디자인·광고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300개 특허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카피 탄생에 관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아이패드(iPad)에서 따온 '아이새드(iSad)'라는 추도사가 퍼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을 인용하며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insanely great honor)'이었다"고 말했다. IT 분야 싱크탱크인 엔드포인트 테크놀러지의 로저 케이 소장은 "전체적인 영향으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에게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 앞에서 5일 밤(현지시각) 중국인 유학생들이 길바닥에 촛불을 세워 애플 로고를 만들고 있다. 이날 세계 곳곳에서 잡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AFP 연합뉴스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특유의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둥근 안경을 착용한 잡스의 흑백 사진으로 전면을 채우고 '스티브 잡스, 1955~2011'이라는 문구만 달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영민함과 열정, 에너지가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 덕분에 우리 삶은 윤택해지고 향상됐다"고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뒤 입양,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로부터 축출된 뒤 복귀와 재기, 희귀암 발병과 투병, 아이폰·아이패드 출시를 통한 디지털 시대 새 라이프 스타일 창조…. 그는 드라마의 상상력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었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입양됐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딸을 시리아인 유학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심슨 부친의 반대로 미혼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잡스는 '대학 진학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양부모 폴·클라라 잡스에게 맡겨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자랐다.

1983년 11월 당시 28세의 스티브 잡스(왼쪽에서 둘째)가 방한,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을 만났다. 73세였던 이 회장은 당시 잡스에 대해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 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제공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이 강해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집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약을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전자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학·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잡스는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공부를 때려치운다. 그는 중퇴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구하려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종교 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약 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히피 저항 문화에 휩쓸려 밥 딜런과 비틀스에게 빠져 살았던 잡스는 자퇴 후 다니던 전자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불교로 개종해 아내 로린 파월과 결혼식도 불교 의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1976년 다섯 살 많은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공동 창업한다. 사무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양부모 집의 창고였다. 잡스는 이듬해 개인용 PC 애플2를 내놓으면서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기가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동안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다. 그는 1996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디지털 시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PC 시대를 열었던 그는 PC 이후 시대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올해 1월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말했다. 그는 췌장암 판정 후 '죽음'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돕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기하는 것이다" "묘비에 '최고 부자 잠들다'는 글귀엔 관심이 없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굉장한 일을 해냈지'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서 "늘 갈망하고 늘 우직하게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잡스가 이끈 제품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신은 우리가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정말 많은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내십시오."(2006년 5월 NBC뉴스 인터뷰)

그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 앤과 사이에 딸 리사가 태어났지만 혈육임을 부인했다. 양육비도 주지 않아 미혼모 앤이 근근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성장한 딸이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서 당시 일을 언급했다. 생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매몰차게 외면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재자'나 '사소한 일에까지 목숨 건 관리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디자인·광고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300개 특허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카피 탄생에 관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아이패드(iPad)에서 따온 '아이새드(iSad)'라는 추도사가 퍼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을 인용하며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insanely great honor)'이었다"고 말했다. IT 분야 싱크탱크인 엔드포인트 테크놀러지의 로저 케이 소장은 "전체적인 영향으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에게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20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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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IT와 인문학의 천재적 결합…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혁신의 아이콘, 잡스]
기술과 경영의 융합 - 음악사이트 아이튠즈로 음악 비즈니스 모델 바꿔
공학과 예술의 융합 - 군더더기 하나없는 디자인, 아이폰 등 모든 제품 적용

다빈치 자화상
세계적인 경제전문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작년 2월 애플의 태블릿PC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스티브 잡스 CEO를 표지모델로 등장시켰다. 표지 속의 잡스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성경 대신 아이패드를 들고 있고 '잡스의 성서(The Book of Jobs)'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잡스의 얼굴 뒤에는 예수처럼 후광이 비쳤다. 잡스의 표지 사진은 당시 신성모독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적어도 IT업계에서는 잡스가 구루(스승)를 넘어 거의 신격화될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잡스가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매킨토시 컴퓨터(1984년), MP3 플레이어 아이팟(2001년), 아이폰(2007년)·아이패드(2010년) 등을 통해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빚을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잡스를 직접 만났던 이석채 KT 회장은 올해 1월 기자간담회에서 "잡스 CEO는 혁명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이며, 그가 아프면 인류의 손실"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인문학과 IT의 '융복합'의 진수를 보여준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계 IT업계는 2000년대 초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콘텐츠가 하나의 서비스로 결합하는 IT 융복합화를 구호처럼 외쳐왔다. 융복합화의 비전 아래 일본 소니가 1980년대부터 할리우드의 대형 영화사와 음반사를 인수하며 콘텐츠 분야에 뛰어들었고 일본 1위의 이동통신업체인 NTT도코모는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해 미국과 유럽의 이동통신업체 지분을 인수하며 자신들이 창안한 휴대폰용 콘텐츠 서비스 '아이모드'를 확산시키는데 안간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음악 콘텐츠와 하드웨어 사이의 장벽을 깨뜨린 인물은 당시만 해도 '실리콘밸리의 이단아'라고 불렸던 스티브 잡스 CEO였다. 그는 소니처럼 수조원씩 투자해 음반사를 인수하는 대신 '아이튠즈'라는 음악 거래사이트를 만들어 단번에 온라인 음악 유통 시장을 장악했다. 엔지니어이면서 비즈니스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잡스였기에 온라인 음악거래 사이트라는 독창적인 비즈니스모델을 창안해 유통망을 장악한 것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IT 전략컨설팅업체 델파이그룹의 토마스 쿨로폴루스 CEO는 "애플의 MP3 플레이어 아이팟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콘텐츠 중에서 애플이 직접 개발한 것은 하나도 없다"며 "애플은 이미 개발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기능적으로 잘 통합(integrate)하고 여기에 음악 콘텐츠를 결합해 새로운 서비스를 창안했다"고 말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0년쯤 그린 ‘인체 비례’ 그림에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합성했다. 잡스는 테크놀로지와 콘텐츠를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든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래픽 이철원기자 burbuck@chosun.com
철학과 서체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인문학적인 소양은 아이팟과 아이폰의 탁월한 사용자 환경(user interface)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아이폰이나 아이팟 포장에 사용설명서가 없어도 누구든 쉽게 아이폰을 조작할 수 있고 아이폰으로 보여주는 글자들이 매끄럽고 세련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편집광적인 완벽주의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앤디 그로브 전(前) CEO는 "(집요한)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변화무쌍한 IT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편집광처럼 자신의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앤디 그로브의 교훈을 철저히 지킨 인물이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적인 CEO이면서 누구보다도 디테일(detail)에 강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도 조명이 켜지는 순서와 위치, 조도에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다. 그가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제품 포장지의 손잡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컴퓨터 디자인을 다시 하라고 한 적도 있다.

잡스는 탁월한 직관력(intuition)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팟이나 아이폰 등 회사의 사활이 걸린 제품을 출시할 때 단 한 번도 소비자 조사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시장 분석이라는 마케팅의 기본 이론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그의 논리는 "소비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혁신가는 무지(無知)한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국내 IT 업계 한 대표는 "잡스는 자신이 내세우는 제품이나 기능을 소비자들도 좋아하게 만드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면서 "심지어 그가 억지를 부려도 애플의 팬들은 그를 두둔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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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일은 완벽하게 판단은 냉혹하게… 그의 집엔 아인슈타인 초상화가

잡스의 경영과 삶

아인슈타인

고(故) 스티브 잡스의 경영철학은 '극단적인 완벽주의'로 요약된다. 지난해 12월 영국의 경제전문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잡스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FT는 그의 성공 비결을 '강박증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분석했다.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얽매다가 불완전한 제품을 만들곤 하는데, 잡스는 특유의 완벽주의로 독창적이면서도 흠이 없는 물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잡스의 십계명은 '완벽하게 업무를 챙겨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만큼 완벽함을 중시했던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최소주의자)

애플 제품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스마트폰 아이폰은 나사 구멍 하나조차 반듯하게 들어맞아 있고, PC 아이맥은 부품을 이어붙인 흔적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잡스가 '최소의 디자인이 최선의 디자인'이라는 명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팀 쿡(Cook) 현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애널리스트들과 만난 자리에서 "애플은 사내의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에 대해 매일같이 '노(No)'를 연발하는 회사"라고 했다. 많은 것을 포기하는 대신 집중하기로 선택한 부분에 에너지를 집약해 그 부분을 세계 최고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애플의 내부 방침은 혁신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에서 나온다는 잡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빈 스컬리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에 따르면, 1980년대 잡스의 집에는 침대 하나, 전등 한 개,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초상화 하나만 있었다. 그 외에는 흔한 장식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최소한의 완벽한 것만을 자신의 곁에 두는 완벽주의 미니멀리스트의 면모를 드러내는 사례다.

직원에는 냉혹, 기부에는 인색

잡스의 완벽주의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직원들에게는 냉혹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애플은 지난해 아이폰4의 전파 수신 불량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이후 잡스는 안테나 프로젝트 담당자를 조용히 해고했다. 그의 십계명에는 '채찍보다 당근을 주라'고 돼 있지만 실제 행동은 이와 다르곤 했다. 완벽한 제품에 흠결을 남긴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기부에도 인색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앤드루 소킨은 "잡스의 재산은 총 83억달러나 되지만 자선기금을 냈다는 기록이 없다"며 "잡스는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부자들이 최소한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취지로 만든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 운동의 회원도 아니며 이 운동 가입 권유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잡스는 1986년 '스티브 P 잡스'라는 이름으로 복지 재단을 만들었지만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1997년 애플에 CEO로 복귀한 후 사내 자선프로그램을 폐지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20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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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애플, 잡스를 대체할 사람은 없다" IT 전문가들 회색빛 전망

잡스 잃은 애플의 운명은
당분간 현 위상 유지할 듯… 장기적으론 걱정스러운 눈길
팀 쿡 등 '잡스의 아이들' 충돌 없을지도 미지수

세계 최대의 IT(정보기술) 기업으로 승승장구해 온 애플이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사망으로 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파산 위기의 애플을 살려내고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재탄생시킨 주역이 바로 '창조 경영의 아이콘' 잡스였기 때문이다. 미 뉴욕타임스는 5일(현지시각) "잡스 없는 애플이 유례없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잡스는 지난 8월 24일 건강 문제로 최고경영자(CEO)직을 자진 사임하고 이사회 의장을 맡기로 했다. 이후 애플은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을 CEO로 임명하고 집단지도 체제로 회사를 꾸려왔다. 디자인 담당 조너선 아이브, 재무 담당 피터 오펜하이머, 마케팅 담당 필립 실러 등 8명의 수석 부사장이 각자 자신의 영역을 맡고 팀 쿡이 이를 조율하는 형태였다.

지난 4일 열린 애플의 신형 스마트폰 '아이폰4S' 발표회는 그동안 잡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줬다. 기능과 디자인을 확 바꾼 신제품이 아니라 기존 제품의 기능만 일부 수정해 내놓았던 것. 잡스의 총지휘 아래 1년마다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프레젠테이션도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팀 쿡은 초반에 간단한 인사말만 했고 신제품과 주요 서비스는 담당 부사장들이 발표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좌중을 휘어잡았던 잡스의 프레젠테이션과 달리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1~2년간은 큰 변화 없이 지금 위상을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잡스가 이미 하드웨어·소프트웨어·콘텐츠를 합친 'IT생태계'를 완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걱정스러운 눈길이 훨씬 많다. 우선 집단지도 체제를 구성하는 이른바 '잡스의 아이들'이 의견 충돌없이 협조가 잘 될지 미지수다.

오프라인 매장인 애플스토어를 성공시킨 론 존슨은 최근 JC페니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 컴퓨터용 소프트웨어 책임자인 버트란드 설렛도 지난 3월 회사를 떠났다.

잡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애플이 삼성전자에 특허소송을 제기한 것도 경영진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부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세상을 지배해온 애플의 그동안 행보와는 달랐다.

컨설팅업체 엔더리그룹의 로브 엔더리는 "월트 디즈니가 사라진 디즈니, 빌 게이츠가 없는 마이크로소프트 등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기업들은 대부분 과도기를 거치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마법도 함께 잃어버린다"고 말했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도 "미래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스티브 잡스를 100%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고 평가했다.

애플은 내년 초 아이패드와 아이폰 신제품을 추가로 발표할 예정이다. 경영진이 잡스의 공백을 잘 메운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때도 실망스러운 제품이 나올 경우 시장과 애플 열성팬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다.

또 새 경영진은 잡스가 생전에 구상하고 끝내 마무리 짓지 못한 제품과 서비스를 완성해야 한다. 음악과 영화를 인터넷 서버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사용하는 아이클라우드,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보는 아이TV 등이 그것이다.

-조선일보, 20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