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 소천

하마사 2011. 8. 3. 09:59

 

간암 수술을 7차례 받을 만큼 병약했으나 늘 자기보다 더 아픈 사람들을 돌봤던 사람. 교인 7만5000명의 대형교회를 일구고도 항상 소탈했던 사람. 2일 한국 교회는 또 한 명의 큰 별을 잃었다. 개신교계 대표적 복음주의 지도자인 하용조(65) 온누리교회 담임목사가 이날 오전 8시 40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소천(召天)했다. 하 목사는 지난 1일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었다.

1946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하 목사는 1985년 온누리교회를 세웠다. 세계 각국에 12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해외 선교에도 깊은 열정을 보였다. 빈소는 온누리교회 서빙고 본당 성전 두란노홀, 발인 예배는 4일 오전 9시 서빙고 본당, 장지는 경기 파주 문막 온누리동산. 유족으로는 부인 이형기씨와 성석·성지씨 등 1남 1녀가 있다.

 

-조선일보, 20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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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고단한 영혼들 그의 곁에서 구원을 봤다

대표적 복음주의 지도자…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별세
병약한 몸으로 선교 위해 지구 37바퀴 거리 여행, 아내 따라 신도 된 최경주 투어 도중 조문 위해 귀국

엄지원, 한혜진 같은 여배우들이 울다 지쳐 탈진했다. 미국 클리블랜드에 있던 골퍼 최경주는 소천 소식을 듣자마자 날아와 밤 10시 30분쯤 빈소에 도착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귀하게 쓰신 목사님이셨어요."

"인간의 건강은 바람과 같습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삶만이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쁘지만 즐겁고 흥분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사세요."(5월 12일 마지막 트위터 메시지)

2일 별세한 온누리교회 하용조(65) 목사는 건국대 3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당뇨, 고혈압, 간염, 간경화, 간암, 신부전증을 앓았다. 암 수술도 7차례 받았다. 아산병원 이승규 교수는 "의사들은 그분을 '오뚝이 목사님'이라 불렀다"고 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도 그래서 생겼다.

장로회신학대학을 마치고 1976년 목사 안수를 받은 하 목사는 평생 쉼없이 달렸다. 온누리교회를 전국 9개 성전에 교인 7만5000여명 규모로 키웠고, 세계 각국에 122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선교를 위해 여행한 거리만 150만㎞, 지구 37바퀴다. "다 죽을 것 같다가도 설교단에만 서면 힘이 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별세 하루 전인 1일에도 예배 설교를 했다. 하 목사는 작년 9월 소천한 고(故)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원로목사,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등과 함께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렸다. 복음주의는 예수의 말씀(복음)에 따른 신앙 생활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입장이다.

2일 별세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한 여성이 조문 도중 눈물을 짓고 있다. 하 목사는 20대 때부터 병마와 싸우면서도 온누리교회를‘사도행전’의 교회로 일궈낸 한국 개신교계의 대표적 복음주의 지도자였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평안도 출신 피난민으로 목포에 살았던 하 목사 부친은 버려진 아기들을 거두는 것으로 유명했고, 나중엔 영아원을 운영했다. 고아들과 형제처럼 자란 하 목사가 평생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역에 집중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그리스도인은 누가 봐도 빛이요 소금이어야 한다"던 하 목사는 1985년 온누리교회 설립 때부터 재정의 3분의 1 이상을 구제 사업 등에 사용했다.

2007년 7월 도쿄에서 하 목사에게 세례받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날 빈소에서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같은 분이었다"며 "한 번도 감사하다고 의례적인 인사를 못했던 것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문화선교'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 1980년 그가 세운 출판사 두란노는 문서 선교의 신기원을 이룩했고, 청년 찬양집회 '경배와 찬양'은 국내 여러 교회로 확산됐다. 2007년부터는 한류 스타와 함께 일본 내 13개 주요 도시에서 전도집회 '러브 소나타'를 열었다. 총 7만여명이 참석해 일본인 5000여명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2일 빈소에는 길자연, 김선도, 김영주, 박종순, 이동원, 이영훈, 조용기 목사 등 교계 인사와 이용훈 대법원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고흥길, 이용경, 정몽준 의원, 김준규 전 검찰총장,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연예인 김자옥, 노사연, 박미선, 심은하, 윤복희, 이성미, 이윤미, 주영훈, 골퍼 최경주, 축구선수 이영표 등이 빈소를 찾았다. 이날에만 1만1000여명 추모객이 몰렸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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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연예인 교회 세우자 곽규석·윤복희 등 몰려

병약했던 하용조 목사는 영육(靈肉)이 아픈 이들의 속마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대중의 갈채를 받으면서도 내면은 고독했던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1976년 처음 세운 '연예인교회'에는 희극인 곽규석, 배우 신영균, 고은아, 가수 윤복희, 서수남, 임희숙 등 연예인들이 몰려들었다. 하 목사는 그들 역시 "하나님의 어린 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온누리교회 장로인 가수 윤형주씨는 "환경 탓에 신앙에서 멀어지기 쉬운 연예인들이 목사님 곁에서 신앙을 지키고 위로를 얻었다"고 했다. 후일 목사가 된 곽규석씨는 하 목사보다 나이가 18세나 많았지만 그를 '영적인 아버지'로 여겼다고 한다. 술에 취해 한밤중에 전화를 거는 연예인도, 예배를 보다 마스카라가 녹은 시커먼 눈물을 쏟는 연예인도 많았다. 생전의 하 목사는 "여배우들이 진짜 울음을 우는 것을 보고 나도 함께 울면서 '주님, 이것이 교회군요. 주님의 교회는 정말 아름답습니다'라고 고백했었다"고 회고했다.

프로골퍼 최경주 선수는 이 교회 신자였던 아내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고 해 온누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해 1999년에 세례받았다. 인터뷰하는 기자들까지 전도하는 이영표를 비롯, 송종국·최태욱 선수 등 2002년 월드컵의 스타들도 하 목사를 따랐다. 신자는 아니지만 박찬호 선수도 미국에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 하 목사의 조언으로 다시 일어섰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 야구 봉중근 선수, 지상욱 자유선진당 대변인과 배우 심은하 부부 등의 결혼식 주례도 하 목사가 맡았었다.

 

-조선일보, 20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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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쟁이(비저너리)’ ‘종합병동’ ‘강해설교 대가’ ‘영원한 청년’ ‘목사와 평신도 동역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목회자’ ‘선교사를 꿈꾼 목회자’.

고(故)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를 일컫는 말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교회에 남긴 족적이 크고 다양하다. 특히 28장으로 끝난 사도행전을 이어받아 한국교회가 29장을 써내려가야 한다며 선포한 ‘Acts 29’ 비전은 한국교회의 새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을 듣는다.

◇‘떠남과 만남’의 삶을 살다=하 목사는 결정적일 때마다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가졌다. 그는 평소 “한경직 목사님에게서 목회자의 겸손과 온유를, 김준곤 목사님에게선 기도와 말씀의 능력을,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에게선 사랑을,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에게선 긍휼사역을 배웠다”고 고백하곤 했다.

그가 선교 중심 목회를 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6·25전쟁 중 평안남도 진남포를 떠나 목포로 피란 온 그의 가족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고 선교사들의 헌신은 하 목사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태신앙인인 그는 건국대 재학시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1966년 경기도 입석에서 열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여름 수련회에서 사역자로서의 부르심을 확인했다. 하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예수님을 정신없이 좋아했어요. 목이 쉬도록 찬송하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밤새워 성경을 읽었습니다. 지금 외우고 있는 성경구절은 거의 그때 외운 것입니다.”

CCC에서 7년간 사역하던 그는 72년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때 함께 공부한 동기가 김지철(소망교회) 이수영(새문안교회) 목사 등이다. 76년 목사 안수를 받던 해, 그는 2년 전부터 곽규석 등 코미디언, 배우, 가수 등과 함께 시작한 성경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연예인교회를 개척했다.

연예인교회가 부흥하고 성전이 완공될 무렵 간경화로 교회를 사임했다. 80년 치료와 휴식차 영국으로 건너가기 전 두란노서원을 창립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치료와 쉼보다는 또 다른 일을 찾아냈다. 평생의 멘토인 강해설교 대가 데니스 레인 목사와 복음주의 지성인 존 스토트 목사를 만난 것. 특히 스토트 목사를 통해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재 삶을 규명한 뒤 미래를 조명해나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두란노서원의 4대 축이 만들어졌다. 4대 축은 교회 성장과 성숙을 돕고,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하 목사의 고유 브랜드인 두란노 바이블칼리지,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천만큐티사역, 천만일대일사역, 출판사 사역 등도 여기서 나왔다.

◇“질병은 나의 동반자”=그에게 평생의 가시는 육체의 질병이었다. 대학 3학년 여름수양회에서 폐결핵이 발견됐다. 밤 12시까지 전도하러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새벽 시편을 읽던 중 환상을 보게 됐다. 주님이 직접 나타나 그에게 목사가 될 것을 권고했다. “두 번째 주님을 만났을 때 전 주님으로부터 정중한 초대를 받았어요. ‘네가 목사가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저를 병원에다 집어넣고 아무도 못 만나게 하시고는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성경을 보게 하셨어요.”

폐결핵 치료차 먹은 약의 부작용으로 당뇨와 간염을 앓았다. 당뇨는 고혈압으로 이어졌다. 또 신부전증으로 발전해 1주일에 3번 투석해야 했다. 간염은 간경화를 거쳐 간암으로 퍼졌다. 암 수술도 7차례나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질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병이라는 고난의 풀무 불에 집어넣어 연단하셨어요. 내가 교만할 것을 아시고 바울의 가시처럼 질병을 꽂아 놓으셨죠. 저는 병이 도지면 꼼짝 못합니다. 하지만 병 때문에 설교를 못한 적은 없었어요. 병과 설교는 언제나 동행합니다.”

◇묵상, 삶, 결단으로 이어지는 강해설교=85년 영국에서 귀국, 12명의 교인으로 온누리교회를 시작했다. 2개월 만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자신의 월급을 털어 선교사를 돕는 걸 즐겼다.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 122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91년 교회의 새로운 변신을 꾀했지만 간경화 판정을 다시 받고 안식년을 얻어 하와이로 떠났다. 그리곤 ‘성령목회’라는 콘셉트를 갖고 되돌아와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주제로 성령집회를 열었다. 동생 하스데반 선교사와의 동역을 통해 경배와찬양 문화를 한국교회에 널리 보급했다. 온누리교회 또한 폭발적 성장을 이어갔다. 94년 ‘2010년까지 2000명의 선교사와 1만명의 평신도 사역자를 세운다’는 ‘2천/1만’ 비전을 선포한 데 이어 2003년에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재생산해 온누리에 복음을 전한다’는 Acts29 비전을 발표했다.

그는 설교에 유난히 집착했다. 설교를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고백했다. “성경이 말하게 하라” “성경의 순서를 따라라” “네가 성경 본문을 택하지 말라”는 강해설교 원리를 철저히 따르려 했다. 하 목사는 대형 교회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온누리교회는 상상도 못했어요. 모든 게 하나님 작품입니다.”

그는 모든 교회의 부흥에 관심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중소형 교회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의 국내 성전과 해외 비전교회들이 중소형 교회의 모델이 돼주길 바랐다. 중소형 교회들이 온누리교회의 도움을 받기 원하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도울 용의가 있다고 늘 말해 왔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국민일보, 20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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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하용조 목사는 한알의 밀알 같은분"

각계 애도 메시지 이어져

 

2일 오전 세상을 떠난 고(故)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를 추모하는 개신교 등 각계의 애도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씨앗 자체가 죽는 것 같지만 무수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한 알의 밀알처럼 많은 생명을 살리셨다”면서 “저도 그중에 하나”라고 고인을 애도했다.

이 전 장관은 하 목사가 2007년 7월 일본에서 개최한 문화 선교 집회 ’러브 소나타’ 행사 때 하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개신교에 귀의했다.

그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고인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고 가셨다”면서 “더 많은 생명의 메시지를 주고 가셨으며 단순한 죽음의 슬픔이 아니라 슬픔의 눈물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또 “개인적으로는 고인이 아니었으면 저는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서 “일주일 전에 만나 식사를 했는데 그게 마지막인 줄 모르고 교리 문제, 종교 문제 같은 무거운 주제의 얘기를 주고받았다. 지금까지 저를 인도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끝내 못 드렸는데 가슴이 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 목사는 “제자훈련과 성령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하 목사의 소천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면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일본선교와 방송선교에도 크게 기여한 고인이 우리 곁을 떠난 데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는 트위터를 통해 “사랑하는 친구 하용조 목사의 마지막 영원으로 떠나는 순간을 곁에서 지킬 수 있어서 감사했다”면서 “그는 정녕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애도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은 “하 목사는 온누리교회를 개척해 문서 선교와 해외 선교, 청년 사역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면서 “7전8기의 암 투병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던 열정의 자취가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생전에 고인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연예인과 지인들도 갑작스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배우 한혜진 씨는 트위터에 “사랑하는 하 목사님 편히 쉬세요. 너무너무 보고 싶을 거에요. 그 사랑 잊지 못할 거에요”라고 애도의 메시지를 올렸고, 작곡가 주영훈 씨는 “마지막까지 설교하시다가 떠나시고 싶으시다던 목사님..결국 마지막 주일 설교를 마치시고 가셨네요 사랑하는 하 목사님..벌써부터 그립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도 밝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큰 감동을 줬던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씨도 트위터를 통해 “하 목사님... 주님 곁에 가셨으니 좋으시겠지만... 우리는 너무 슬픕니다...지금은 감사를 드리기엔 너무 슬픕니다... 목사님 가족들과 온누리교회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애도했다.

 

-연합뉴스, 20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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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재수생 때 만나… 우린 형·동생이었다"

故옥한흠·하용조, 이동원 목사와 함께 '복음주의 4인방'… 홍정길 목사 인터뷰
"성경이 말한대로 살아보자" 교단 달랐지만 생각 비슷, 모두들 열정적으로 선교… 교단 정치에는 체질 안맞아
평신도와 토론하며 가르쳐 생활 속 '제자훈련' 강조, 목회자가 교인에 설교할 땐 자신을 향해서도 설교해야

 

"우리는 쉽게 살았어요. 손해 보는 일, 고생해야 하는 일,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으니까. 가질 게 없으니 다툴 일도 없었고, 서로 도울 일밖에 없었지."

20대에 만나 40년 넘게 계속된 네 사람의 인연이 한국교회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69) 목사와 지구촌교회 이동원(66) 원로목사, 작년 9월에 별세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와 2일 별세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 이 네 사람을 세상은 한국 개신교의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소수의 목회자 중심이던 한국 교회에 평신도 제자훈련의 바람을 일으켰고, 열정적으로 선교했으며, 낮은 곳을 향한 구제사역의 비전을 공유했다. 많은 후배 목회자들이 이들을 따랐지만, 평생 교계 정치나 교단장 같은 직책은 멀리했다. 미국 일정을 접고 3일 오후 4시쯤 급거 귀국한 홍정길 목사를 하용조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온누리교회 서빙고 본당에서 만났다. 홍 목사는 하용조 목사에 대해 "내 가족보다 더 소중했던 사람이었다. 처음 소천(召天)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 개신교계의‘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리는 4인의 목사들. (왼쪽부터)고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목사,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이 중 옥한흠 목사는 작년 9월에, 하용조 목사는 지난 2일 별세했다. 이들은 평생 열정적 선교, 성경 말씀대로의 삶, 낮은 곳을 향한 구제사역의 비전을 공유했으며 교계 정치나 교단장 등의 교회 밖 직책은 멀리해 많은 한국 목회자들의 모범이 됐다.
―네 분 목사의 인연이 아주 깊다.

"1965년쯤, 대학생 선교단체 CCC 모임에 재수생 둘이 따라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하용조 목사였다. 나는 간사였다. 다음해에 두 사람이 대학에 들어오며 CCC에서 함께 활동했다. 68년에는 총신대에서 나보다 1년 늦게 들어온 옥한흠 목사를 만났고, 69년에는 수원 집회에서 이동원 목사를 만났다. 내가 1975년에 처음 목회개척을 한 뒤 다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놀랍도록 생각이 비슷했다."

―어떻게 비슷했나.

"당시에는 한국 교회 어른들로부터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하는 소리 많이 들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거슬리는 게 많았을 거다. '식자우환'이라는데, 평신도 성경공부 가르쳐봐야 목사만 힘들다는데, 우리는 굳이 평신도를 일깨워 초대교회에서처럼 교회의 주체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제자훈련을 강조했다. 목사가 절대권위를 갖지 않는 대신 신자들과 토론하는 것도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책을 목사만이 아닌 모든 교인의 손에 쥐게 하고 신자가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 생각이 같았다."

―한국적 복음주의 운동(성경에 쓰인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운동)의 태동처럼 들린다.

"사실 옥 목사와 나는 예장 합동 교단, 이동원 목사는 침례교, 하용조 목사는 예장 통합 교단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한 대로 살아보자는 데는 뜻이 같았다. 다들 열정적으로 선교했다. 내가 개척한 남서울교회도 교회 재정의 63%까지 구제와 선교 등 교회 밖 일에 썼다."

맏형 옥 목사와 막내 하 목사는 8살 차이였다. 하지만 네 사람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형님" "동생" 하며 함께 복음주의의 가시밭길을 개척해갔다. 누군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앞다퉈 내 일인 듯 도왔다. 700여 선교사 가정을 해외로 파송한 사단법인 한국해외선교회(GMF)나 매년 2만5000여명의 한인 기독유학생이 모이는 대규모 해외 집회 '코스타' 등에도 이들의 힘이 컸다. 옥한흠 목사가 교회 일치운동을 벌이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만들면 함께 뛰었고, 홍정길 목사가 밀알학교와 장애인 고용 재활용가게 굿윌스토어를 세우면 또 모두가 힘을 보탰다. 오직 성경말씀만 전하는 '강해 설교'만으로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명설교가'였던 것도 닮은꼴이다.

―왜 교단정치에 뜻이 없었나.

"우리는 모두 체질적으로 복잡한 교단 정치가 안 맞는다."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도 끝도 없는 얘기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복음 안에 온전한 사람을 만들면 온전한 행동도 할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좋은 생각을 했으면 좋은 행동까지 나와야 좋은 사람인데, 좋은 생각을 하면서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한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은퇴 1년을 앞두고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가슴 아프다."

―금권선거와 타락, 물신숭배 등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비판도 계속 터져 나오고 있는데.

"목회자는 설교할 때, 교인뿐 아니라 목회자 자신을 향해서도 설교해야 한다.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 전에, 후배 목회자들이 나를 보며 무엇을 배울까 고민해야 한다. 우리 넷은 사실 쉽게 살았다. 손해 보는 일, 투자해야 하는 일,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했으니까. 성경대로 했으니 그게 외려 쉬웠다. 그러나 한국 복음주의에는 아직 좋은 후배 목회자가 많다. 이제 새롭게 또 시작할 것이다."

☞홍정길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의 대표적 복음주의 운동 지도자 중 한 명.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1975년 남서울교회를 개척해 20여년간 목회했다. 사임 후에는 장애인 사역으로 널리 알려진 남서울은혜교회를 1995년 새로 개척했다. 1990년 자폐 장애인 교육시설인 밀알학교를 설립했다.

☞제자훈련

평신도를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교회의 주체로 보고 그들을 일깨워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가르치는 과정.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옥한흠 목사가 선구자다.

 

-조선일보, 20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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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라이프] “목사님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잘 할게요.”

세계 선교와 말씀, 성령운동에 한평생을 바친 고 하용조 목사가 4일 그가 가장 좋아하던 찬송, ‘내 영혼이 은총 입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충효공원묘원 내 온누리동산에 안장됐다. 성도들은 풍선을 날리며 하늘나라로 떠난 하 목사를 향해 작별 인사했다.

이날 오전 내내 흐리고 비 오던 날씨는 안장될 때 햇빛으로 바뀌어 그의 묘소를 비췄다. 한국교회 복음주의 선두주자로 말씀과 성령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세계 선교를 통해 예수 재림을 강렬히 소망했던 한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 더 이상 수술도 투석도 병원행도 없었다. 안식만 있었다.

온누리동산은 교회 성도들의 가족묘로 하 목사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교인들과 한 자리에 묻히게 됐다. 온누리동산은 이라크 선교에 힘쓰다 별세한 고 김사무엘 목사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관예배에서 홍정길(남서울은혜교회) 목사는 성경 속 인물인 에녹(창 5:21∼24)을 예로 들며 하 목사의 삶을 조명했다. 홍 목사는 “하 목사는 1966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 진짜 삶을 시작했다”며 “하 목사의 멋진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하 목사는 대학 시절부터 아프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며 “그러나 정작 자신은 아픔을 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뢰하는 삶을 살아갔다”고 했다. 홍 목사는 1000여명의 추모객을 향해 “하 목사의 생애가 평가받는 것은 이제부터”라며 “성도들은 온누리교회가 하 목사의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서울 서빙고동 교회에서 진행된 발인예배(천국환송예배)는 하 목사의 마지막 길을 지키려는 신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교인들은 하 목사의 관이 운구차량에 실릴 때까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을 불렀다. 성도들은 차량이 서서히 떠나자 “목사님!”하며 목 놓아 울었다.

3일간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던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는 발인예배 설교에서 그간 아꼈던 하 목사에 대한 기억을 쏟아냈다. 중간 중간 울먹이기도 했지만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하 목사를 그리워했다. 이 목사는 “하 목사가 70년대 후반 몸이 아파 영국에 갔을 때 존 스토트 목사를 만나 말씀의 균형을 배웠다고 자랑하던 때가 생각난다”며 “하 목사는 말씀의 균형으로 교회를 세우고 사역했다”고 했다. 또 “하 목사는 ‘인리치(in reach)’의 사람이었다. 평생 세계 선교를 위해 아웃리치(out reach) 활동을 했지만 그의 내면엔 인리치, 즉 샘 곁에 있었다”며 말씀과 성령, 말씀과 선교의 하모니를 이루려했다고 회고했다.

원주 글=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사진=곽경근 선임기자

-국민일보, 201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