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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시민의식

하마사 2011. 3. 15. 21:35

우리 말도 떼지 못한 딸 아이가 일본에 살며 세 살 때 배운 말은 차례, 순서를 뜻하는 '준반(順番)'이었다. 이 말을 가르쳐준 건 보육원 교사가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었다.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려던 아이들은 다투지 않고 "준반, 준반"을 외치며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먼저 미끄럼을 타려던 딸도 어느새 '준반'을 외치며 줄을 섰다.

▶일본 엄마들은 "남에게 폐(迷惑·메이와쿠) 끼치지 말라"는 말로 가정교육을 시작한다. 지하철에선 "다리를 꼬거나 뻗으면 남에게 폐가 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하루 종일 나온다.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민감하다"고 했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은 절제하는 '수신(修身)문화'다.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에는 '메이와쿠 방지 조례'라 하여 '남에게 현격히 폐를 끼치는 행위'는 법으로도 금하고 있다.

▶2009년 11월 부산 사격장 화재로 10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숨졌을 때도 부산에 온 가족들은 통곡 대신 침통하게 무릎을 꿇은 채 흐느낄 뿐이었다.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의 장례식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3·11 대지진에서 일본인이 보여준 배려와 시민의식에 세계가 감탄하고 있다. 외신들은 일본인의 인내와 질서를 '인류정신의 진화'라며 극찬했다. 다리를 다친 환자는 구조대가 도착하자 미안해하며 "나보다 더 급한 환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생필품이 부족해도 약탈이 없고, 수퍼마켓 앞에는 수백 m의 줄이 이어졌지만 새치기가 없다. 도쿄전력은 14일부터 지역별로 나눠 강제 정전을 하기로 했지만, 이날 오후까진 그대로 전기를 공급했다. 지하철 회사는 운행을 제한했고, 시민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절전(節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티즌들은 "파친코와 유흥업소 사장님들. 조금만 참자"는 메시지를 올렸다.

▶"남편과 연락이 안 된다"며 애끊는 구조 요청을 할 때, 피난소 여인은 절규 대신 고개만 숙였다. 도로가 망가져 차가 다니지 않는 센다이 도로에선 시민들이 지금도 파란 불을 기다렸다가 길을 건너고 있다. 공영방송 NHK는 흥분하지 않고 뉴스와 피난 정보만 신속히 전했다. 일본인들은 지금 속에서 터져나오는 피눈물을 억누르며, 놀라운 의지로 시련을 견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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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이 보여줬다.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14일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칼럼을 통해 대지진 상황에서 보여준 일본의 철저한 대응과 일본 국민들의 침착성에 대해 격찬하는 등 전 세계 언론이 일본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일본 현지 르포 기사 등을 통해 “(대지진 발생 뒤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극단적일 정도로 침착했던 일본인들” 등 일본 국민들의 침착함에 대해 전했다.

13일 오후 일본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臺)시의 한 편의점에 생필품을 구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 연합뉴스

전 세계 역사상 4번째, 일본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이번 ‘동(東)일본 대지진’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란 나라를 새롭게 보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죽음에 몰릴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에 전 세계는 “감동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이란 국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지진을 통해 일본인은 믿을 수 있다고 느꼈다. (중략) 도둑질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세계 종말이 온다면 이런 모습으로 다가왔으면 한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한 중국 학생은 FT에 이런 기고문을 남겼다. 중국 관영 매체들도 일본의 시민 의식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중앙방송(CCTV)은 “(대지진 이후) 일본 방송이 외국인을 배려해 여러 외국어로도 재해방송을 내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환구시보도 “도쿄에서 수백명이 광장으로 대피하는 가운데 남성은 여성을 도왔고, 길에는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미 지질조사국(USGS)의 데이비트 애플게이트는 “이번 지진에서 우리는 지구의 매우 큰 균열을 목도했다”며 “하지만 이런 사태를 극복해낼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언론의 보도 태도를 두고도 “배울 점이 있다”는 분석이 쏟아졌다. 쓰나미로 가옥이나 차량이 휩쓸리는 장면은 일본 TV 화면에서 자주 보도됐지만, 휩쓸려 내려가는 사람 등 자극적인 보도는 없었다. 홍콩 봉황TV나 대만 연합보 등 중화권 언론들은 “(일본 언론은) 억지 감동을 쥐어짜지 않았다. 처참한 화면으로 과장하지도 않았다. 정확한 피해상황과 대처법을 보도했다”고 평가했다.

두차례 퓰리처상을 받았던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는 ‘일본에 대한 마음아픔, 그리고 감탄(Sympathy for Japan, and Admiration)’이란 글에서 자신이 뉴욕타임스 일본 지국장으로 거주했을 때의 일을 소개했다. 당시 한신 대지진을 취재했던 크리스토프는 “한신 대지진 당시에도 일본 사람들의 참을성과 질서의식은 정말로 고귀했다”며 “이런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이 이번에도 보인다”고 소개했다. 그는 “일본에 대해 깊은 동정뿐 아니라 깊은 경탄을 함께 보낸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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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덮친 대참사(大慘事)에 세계가 숨을 죽이고 있다. 우리 국민도 일본 동해안 도시들이 통째로 사라지고 수만명이 실종된 참극(慘劇)을 보며 말을 잃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일본 국민을 부축하고 위로하자는 움직임이 폭넓게 일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난을 겪는 일본 국민을 감싸 안는 첫걸음은 무엇보다 일본의 현 상황을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언론부터 3·11 일본 대지진을 보도하면서 써야 할 말, 쓰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야 한다. 한 미디어가 '일본 침몰'이라는 제목을 달자 일본 네티즌들은 "일본 침몰이 기쁜가?"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상대의 반응이 어떻다 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살폈어야 할 대목이다.

일본에 닥친 재앙과 일본 국민이 당한 현재의 사태를 우리 경제의 손익(損益) 차원에서 다루는 듯한 표현도 삼가는 게 옳다. 윤리적 판단 이전에 사람의 도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대지진이 터진 날 밤엔 어느 방송이 특집 메인뉴스에서 "지진 때문에 한류 스타들의 일본 공연과 출연 일정을 조정할 수밖에 없어 신한류 열풍이 위축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일본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시청자들도 그 보도에 어이없어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본의 재난을 언급하면서도 삼가야 할 말이 있다. 일부 철부지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글은 일본 국민에게 상처를 준다는 차원에 앞서 우리 국민의 품격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런 글은 다른 네티즌들의 호된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지도급 인사는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지난 12일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원로급 목사 한 분이 기독교 인터넷신문 인터뷰에서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진으로) 경고한 것 같다"고 말했다. 평생 남의 아픔과 어려움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며 살아온 목회자(牧會者)의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 국민 대부분은 이웃 일본이 겪고 있는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고 아파하고 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같은 반일(反日)-항일(抗日) 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19년 동안 해 오던 시위를 이번 주엔 멈추기로 했고 "일본이 국가적 재앙을 슬기롭게 극복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귀국 사할린 동포들도 적은 돈이나마 쪼개 모금을 시작했다.

일본 국민은 당장 먹을 것, 마실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생지옥 같은 처지에서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질서정연한 시민의식을 보여 줘 지진에 놀랐던 세계를 다시 한 번 놀라게 만들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런 일본 국민의 등을 감싸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찾았으면 한다. 

 

-조선일보 사설, 20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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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일본이 전쟁보다 더한 대지진을 맞았다. 진도 9.0의 대지진은 1995년 일본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고베 지진의 무려 120배에 가까운 위력이었다. 10m를 넘는 쓰나미의 파괴력은 영화 '해운대'에서 본 장면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이번 일본 대지진의 참화로 인한 사상자 수는 1만명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실로 가공할 만한 자연재앙에도 불구하고 허둥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질서를 지키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본인들을 보면 경외심마저 든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전기·가스·수도 등 생명선(線)이 차단된 곳이 남아 있고, 물·식량·의약품 등이 부족한 데다 가족 및 친지들의 생사확인도 어려운 실정이다. 주택은 물론 도로·철도·학교·병원 등 시설 복구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위기로 불리는 재해로 고통받는 일본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도와야 하나? 첫째,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도와야 한다. 일본은 지구촌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다. 피할 수도 없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천재지변은 우리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다. 만약 대지진이 태평양 쪽이 아니라 동해 쪽에서 발생했다면 쓰나미는 우리나라 동해안을 덮쳤을 것이다. 대일(對日) 감정이나 타산적인 고려를 뒤로하고, 인도적인 견지에서 따뜻한 마음을 담아 도와야 한다.

둘째, 신속하면서도 통 큰 지원을 해야 한다. 정부가 5명의 선발대를 보낸 후 다시 102명의 긴급구조대를 파견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말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에 지원의 손길을 펼쳐야 한다. 일본이나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아가며 생색을 내기 위해 찔끔찔끔 지원할 게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아낌없이 화끈하게 도와야 국격(國格)이 산다. 긴급구조 및 물자지원, 의료 제공, 실종자 수색, 쓰레기 및 잔해 처리 등 할 일은 부지기수로 많다.

셋째, 재일(在日) 한국인의 체면이 서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와 유학생이 아주 많다. 피해자의 일부는 바로 우리 동포들이다. 재일 한국인 사회가 가진 일본인들과의 소통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일본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일본이 재해를 극복하고 난 후, 일본인들이 한국뿐만 아니라 재일 한국인 사회와 우리 유학생들의 도움을 기억한다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품위를 갖게 될 것이다.

넷째, 지속가능한 지원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재해 복구 초기에는 금전적인 지원이나 물자 지원이 긴요하다. 하지만 재해를 딛고 일어서려면 중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며, 한국은 여기서도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지들의 생사 확인 등 소셜 네트워크의 회복, 주거 및 공공시설의 복구와 재건, 고령자 및 노약자 돌보기 등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 일본인의 '마음 달래기'에 동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지원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일본과 교류관계를 맺고 있는 지방자치단체, 협력 및 제휴관계에 있는 단체와 협회, 비즈니스 제휴관계에 있는 재계는 물론, 시민사회, NGO, 나아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지원을 한다면 한국의 도움은 더욱 일본인들의 마음에 새겨질 것이다.

 

-조선일보, 201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