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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이런 난리는 없었다

하마사 2011. 1. 23. 13:31

 

겨울이면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주었다. 가을에 산에서 베어다가 말려 헛간에 쟁여둔 풀을 2~3일에 한 번씩 작두로 썰어두었다가, 구정물을 두 양동이쯤 가마솥에 붓고 풀을 가득 넣은 다음 불을 땠다. 한참 불을 때다 보면 소죽이 끓었다.

소죽솥에서 푹푹 김이 나오기 시작하면 방아 찧을 때 나온 쌀겨를 한 바가지쯤 넣고 뒤적거렸다. 그러면 소죽이 완성되었다. 소죽을 끓일 때 호박을 큼직큼직하게 썰어넣기도 하고 콩깍지로 소죽을 끓이기도 했다. 펄펄 끓는 소죽을 뒤적일 때면 고소한 풀냄새가 났다. 소죽을 끓이려면 불을 많이 때야 하기 때문에 소죽을 끓인 방은 겨울 내내 절절 끓었다.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소를 절반 살림이라고 했다. 소가 살림의 절반이었던 셈이다.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 소를 키우지 못했다. 부잣집에서 암송아지를 빌려다가 키웠다. 그 송아지가 자라 어미 소가 되어 송아지를 낳으면 송아지는 자기가 갖고 어미 소는 주인집에 되돌려주었다. 이른바 ‘배내기’ 소였다. 자기 소 한 마리를 가지려면 적어도 2~3년은 걸렸다.

배내기 소가 암송아지를 낳으면 경사였다. 그 송아지를 키워 새끼를 내어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논농사나 밭농사를 지어 살림을 불려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농부들은 그렇게 남의 소를 키워 살림을 불려나갔다. 소를 키워 송아지를 낳으면 송아지를 팔아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자식들 교육도 시켰다.

추운 겨울 소 외양간을 치우려고 마당으로 소를 내어놓으면 오랜만에 마당에 나온 소가 훌훌 뛰기도 하고 여기저기 뿔짓을 했다. 소 외양간을 치우면서 돼지 우리도 같이 치우기 때문에 돼지도 마당에 나와 꿀꿀거리며 돌아다닌다. 소와 돼지가 마당을 나와 돌아다니니, 강아지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강아지가 소에게 달려들어 컹컹 짖으면 소가 풍경을 딸랑거리며 고갯짓으로 강아지를 쫓?는다. 강아지는 마당을 돌아다니는 닭도 쫓고 돼지도 쫓는다. 조용하던 겨울의 시골 마당이 그렇게 며칠 만에 한 번씩 짐승들의 움직임과 울음소리로 떠들썩했다.

집짐승들은 한 집안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먹고 남은 것들을 나누어 먹였기 때문이다. 집짐승과 농부들과의 그런 관계는 오랜 전통이었다. 자연을 따르는 순리와 이치였으며, 생태적이고 공생적인 순환이었다. 그런 소와 돼지와 닭들을 몇천 마리씩 한 구덩이에 생매장을 한다. 난리도 이런 끔찍한 난리가 일찍이 없었다.

 

<출처:시사저널 칼럼>[1109호]/ 2011년 01월 19일(수)

 

칼럼을 읽으신 아버님이 감동을 받으시고

농민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가족카페에 올리신 글을 옮겨본다.

 

본 칼럼은 옛날 우리 한국 모든 농촌에 얘기이며 곧 내가 어릴적 내매에서의 생활과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소를 비롯한 가축들을  키우시며 농사를 하시던 모습이 본 칼럼을 통해서 새롭게 기억에 떠오르며 평생 농사만 하시며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나서 이 글을 옮겨본다.

요즘 소 구제역 이란 무서운 가축병으로 지방곳곳 농가들에서 자식처럼 기르던 소와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축산농가들의 아픔이 오죽할까 싶고 내 마음도 같이 아픔을 느끼게 된다.

하루속히 구제역이니 AI 라고하는 가축병이 진정되기를 기도해본다...............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