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세경 전 초등학교 교사
늙은이 엄살 심해
병상에서 이 한마디가 쏜 화살처럼 마음에 박혔다
오기가 나서 癌을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에겐 얼마나큰 상처겠는가
바깥 밥 싫어하는 남편 덕에 과일, 야채, 나물 같은 소위 ‘웰빙’ 밥상만 차려 먹었는데 일흔 나이에 대장암이라니…. 혈변에도 단순한 치질이려니 무심했었는데…. 의사는 얼마나 진행됐는지, 얼마나 잘라내야 할지 열어봐야 안다고 했다. 아찔 현기증이 났다.
입원 날이 다가오면서 홀로서기가 안된 남편을 위해 이곳저곳에 집안일을 챙길 메모지를 붙였다. 입원 전날에도 TV만 보는 무심한 남편. 나는 장롱 서랍을 열며 “여보, 여기는 속옷, 여기는 양말…”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내 걱정 말고 내일 병원에 가져갈 거나 챙겨.” 일흔이 넘은 남편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한데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리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남자 조무사가 나를 이동 침대에 눕혀 수술실 앞의 대기실로 옮겼다. 가족은 대기실 문밖에, 나는 대기실 안에 격리된 채 온전히 의료진에게 맡겨졌다. 잠시 후 몇 사람이 들어와 코에 마취제를 대고 “숨을 크게”하더니, 수술실로 데려갔다. 내 몸이 좁은 매트리스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의식은 점차 멀어졌다.
춥다. 특히 두 발과 어깨와 팔이 덜덜 떨린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멀리 들리고 눈도 조금씩 움직여진다. 그때 누군가가 가까이 와 흔들고 때리고 눈을 뒤집으며 “정신이 드느냐”고 묻는다. 정신은 드는데 몸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너무 추워요. 오른쪽 어깨와 팔 좀 따뜻하게 해주셔요.” 내 말에 그녀는 이불 속에 손을 넣고는 “이렇게 따뜻한데 추워요. 할머니는 이상하게 추워, 추워하면서 정신은 안 드네”하고는 원통 같은 물건을 배 쪽에서 오른쪽 가슴께로 옮겼다. 일종의 온풍기로 그걸 하게 되면 경직되었던 살들이 풀리면서 살살 잠이 온다. 그때 “늙은이들은 엄살이 심해. 신경을 써 주면 더한다니까. 가서 다른 일 봐”하는 목소리에 내 가슴을 오그라들게 한다.
“아냐, 혈압도 60에서 1시간째야. 올라가질 않아.” 그녀가 계속 내 곁에서 손과 발, 고개를 흔들며 말을 시키니 늙은이의 엄살이라 하던 목소리와 비교돼 몹시 고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대장을 한 뼘쯤 잘라내고서야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물도 음료수도 못 넘기고, 구토·설사에 시달렸다. 응급실에 재입원하고 퇴원하길 몇 차례, 하루 19가지 약을 먹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기도와 찬송으로 얻는 평안은 잠깐이고, 먹지 못하고 깊이 잠들지도 못하는 24시간은 내게 너무 길었다. 약은 줄어들어도 여전히 힘이 들어 “차라리 회복실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이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순간순간 ‘늙은이의 엄살’이라던 말 한마디가 쏜 화살처럼 마음에 박혀 잊혀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회복실 환자와의 생활하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었을 게다. 하지만 “늙은이도 늙은이 나름이다. 내게 엄살은 없다”며 어떻게든 암을 이기자고 다짐했다.
2차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는, 너무 힘에 부쳤다. 덧없는 인생살이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종으로 5kg이나 늘어난 체중 때문에 힘들고 숨이 차면 누워 글을 썼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될 수 있으면 즐겁고 보람 있었던 일들을 찾아 끼적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가르친 아이들의 모습도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가난한 농촌출신의 8남매 장남이던 공무원 남편과 달리 나는 서울 태생으로 8남매 외동딸로 곱게 자라 꿈속에 사는 여자였다. 남편은 장남의식이 강했고 시부모 봉양은 물론 남편과 24살 차이가 나는 막내 시동생까지 공부시켜야 해 우리 부부만의 생활은 없이 살았다. 더욱이 시어머니는 치매로 대소변도 못가려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한 내가 낮에 돌보고, 밤에는 퇴근한 남편이 지켰지만 힘이 부쳤다.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바로 전해였다.
나는 컴퓨터에 가족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썼다가 지우기를 몇 번씩 했다. 남편에겐 “의무감에서 벗어나 새 생활을 찾아라. 나는 날개 달고 멀리 날고 싶은 사람이니 빨리 잊고 날려 보내라. 내 연금은 손자손녀들에게 할아버지 인기 관리를 위해 쓰라”고 썼다. 남편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했는데 노후에 나 때문에 복되게 살 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딸과 아들에게도 “아버지가 빨리 좋은 동반자를 만나도록 권유하라, 공경과 순종으로 받들되, 유산은 작은 것이라도 탐하거나 바라지 말라”고 했다. 이런 나를 주위에서는 지독하다며 나무란다. 이웃에 사는 아들도 “엄마는 정말 못 말려”하며 난색을 짓곤 한다.
그러나 의료진의 지시를 잘 따르고, 내 일은 내 힘으로 꾸려가겠다는 일념이 치료에 도움을 줬다. 암수술 받은 지 3년이 돼 이제 나는 암을 이겨냈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연구와 의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이 환자에 대한 의료진의 정성이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이다. 내게 성의를 다 해준 의료진들이 참으로 고맙다. 그들에게 돌아갈 감사가 한 사람의 말 한마디로 하마터면 물거품이 될 뻔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이겠는가. 그러나 그 한 마디는 나를 오기로 일으켜 세운 소중한 한 마디였다.
-조선일보, 20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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