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한복 입고 칸에 간 윤정희

하마사 2010. 5. 29. 13:43
강경희 경제부 차장대우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가 칸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동안, 인터넷에는 '왕년의 스타 윤정희가 누구인가'를 궁금해하는 어린 네티즌들의 글이 적잖이 떴다. 기성세대에게 윤정희란 이름 석 자는 1960년대를 풍미한 톱스타로 각인돼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동명(同名)의 1980년생 탤런트를 떠올린다.

그런데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16년 만에 스크린에 다시 섰고, 젊은 후배들이 앞서 간 칸의 레드 카펫을 영화 인생 43년 만에 뒤늦게 밟은 이 60대 여배우의 칸행(行)에서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 요즘은 국내 영화제 때도 배우들이 협찬받은 명품 드레스와 값비싼 보석으로 온몸을 두르고 '걸어다니는 광고판'처럼 나온다. 그런데 난생처음 칸의 레드 카펫에 서는 특별한 날에, 윤정희씨는 남편과 여동생이 골라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화장도, 머리 손질도 직접 자기 손으로 하고 나왔다.

더 비싸고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고도 그토록 아름답고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아마도 그가 자기 인생의 레드 카펫에서 하루하루 행복한 주연(主演)으로 사는 연습을 해왔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칸 영화제가 끝난 다음 날부터 윤정희씨는 늘 하던 대로 '남편의 비서' 역할로 되돌아갔다. 연주 여행을 다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동행하며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그는 1974년 파리로 유학 가 그곳에서 만난 백건우씨와 1976년 결혼, 30년 넘게 파리에서 살고 있다. 남편은 세계적 피아니스트, 아내는 왕년의 대스타지만 이들 부부의 파리 생활은 소박(素朴)하고 한결같다. 장성한 외동딸은 여느 프랑스 젊은이들처럼 독립해 나가 살고, 부부는 결혼 초기 장만한 파리 동쪽 외곽의 아파트에 30년 넘게 살고 있다. 승용차 없이 여느 파리지앵들처럼 지하철 타고, 급할 땐 택시를 이용한다.

왜 좀더 편리한 곳으로 이사 가지 않느냐고 물으면 윤정희씨는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데, 시끄럽다고 불평하지도 않고 집 앞에 조용히 꽃을 놓고 가는 이웃들이 너무 좋아서" "샤토(프랑스의 성·城)처럼 으리으리한 집에 산다고 행복한가.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너무 많아 이토록 행복한데" 하면서 활짝 웃는다. 전 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남편을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며 내조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에, 그 왕년의 대스타가…" 하고 놀라는 파리 교민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조연' 역할도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게 주연처럼 해내는 아내다.

중노년의 삶을 연구하는 미국의 심리학자 프레데릭 M. 허드슨 박사는 노화(老化)란 육체는 쇠락해도 정신은 성장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나이 듦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중년 이후에도 성취(成就)나 능력(能力)을 중시하는 젊은 시절의 꿈만 좇거나 과거의 추억에 갇힌 바람에 정신적 성장을 멈추는 '심리적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만약 윤정희씨가 젊은 시절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왕년의 스타'로만 갇혀 살았다면, 스포트라이트에서 비켜난 삶에서 그리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데뷔 43년 만에 선 칸의 레드 카펫에서 그토록 당당한 아름다움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은 것에도 늘 행복해하는 '긍정의 힘'으로 삶을 엮어온 덕에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한 배우로 우리 곁에 남게 됐다.

 

-조선일보, 201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