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재난의 시작”이기도 하고 또한 “축복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거대한 쓰나미로 밀려 오는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분명 “영적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재난”이 될 수도 있고, 선교의 추수를 위한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노도처럼 밀려오는 이슬람의 물결을 어떻게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대응하느냐에 있습니다.
20세기 여명에 그 누구도 주목할 세력이 되지 않았던 이슬람은 기독교를 대체할 세력으로 성장하여 전세계를 이슬람화할 목적으로 이슬람 선교인 DAW’AH를 기치로 전지구촌으로 무서운 속도로 점령하고 있습니다. 필사 몽골 고원으로부터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과 유럽까지 단시간에 점령해 버린 몽골 제국의 기세로 몰려 오는 듯 합니다.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끼고 시작된 3대 종교는 영적 영토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 종말의 시계침 완성을 위해 달려 가고 있습니다. 자그만한 유대인 때문에 큰 골치를 앓았던 로마 제국의 디도(Titus) 장군은 “유대인을 삽으로 떠서 지중해 묻어버리라”고 말하고 지긋지긋한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함락했습니다. (AD 70)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11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은 비참한 학살 가운데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화려했던 스룹바벨의 성전, 헤롯이 중건한 제2 성전은 무너지고, 그곳은 들짐승들의 처소가 되었고, 그 후 그 자리에 초대 교회, 로마 천주 교회, 비잔틴 교회가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7세기에 시작된 꾸라이시 부족의 문맹(Unlettered) 의 한 상인이었던 모하메드는 한 종교를 일으키고, 그 종교는 이슬람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한지 1300년을 지나며 이슬람 최대의 성지로 삼으로 역사적인 모스크를 짓고맙니다. 기독교의 성지로 불리우는 그 자리에 이슬람이 자리잡고 길목이 막히게 된 것입니다. 이슬람 세력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성지 순례 감행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증오의 불씨를 남겨둡니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해방된 후 그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독립 선언을 기점으로 성경 예언 성취의 중심 무대에 재등장합니다. 이곳의 중심이 예루살렘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2000년 동안 헤메이던 유대인이 치고 들어온 팔레스타인은 중동 화약고에 불을 붙이게 되고 이는 여러차례의 중동전쟁을 야기시킵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빼았고 2000년 염원이던 통곡의 벽에 그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라헬과 레아의 애곡(Tikkun Rachel, Tikkun Leah, 시편 137편, 89편) 기도인 Tikkun hatsot 을 마음껏 목놓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통곡의 벽 안 쪽에 위치한 Al Aqsa 사원과 황금돔 (Dome of Rock) 사원은 이슬람의 3대 성지로 솔로몬과 스룹바벨 제2성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자리입니다. 2000년 전 무너진 그 성전에 언제 솔로몬의 성전을 세울 수 있을까 고심하던 유대인들에게 성전 재건 계획은 차근 차근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아랍 리그(League of Arabs)가 버티고 있는 인근 중동 국가들, 이제 새롭게 지도자를 뽑고 힘을 발휘하는 EU 에는 후에 인류 마지막 전쟁의 기운을 감지케 하는 평화의 중재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두고 일어난 중동 전쟁이나, 그리고 사담 후세인이 천명한 내용이나, 이제는 이란 대통령 마무드 아네지네자드와 수많은 anti-Semitic 주의자들도 시온의 영광이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종교적 기원에 그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원래 middle name 이` 사부르지안(Sabourjian)'라는 유대인 이름(직물공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아마지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유대인 이주자이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반 유대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핵무기 개발과 사용을 부추기며 반 이스라엘 정책의 선봉에 서고 있으나 실상은 이슬람 원리주의 입각한 종교적 적대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세계의 평화에 먹구름을 몰고 오는 중동에는 인류 역사의 풀리지 않는 고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이며, 이스라엘을 통해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3대 종교가 제각기의 해석을 갖고 우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주신 구약, 즉 토라(모세의 율법), 다윗의 시, 그리고 역사서를 바탕으로 오신 메시야에 대한 이견은 3대 종교의 근본적 성격과 본질을 가르게 되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신 것을 받아 드리지 않는 유대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메시야임을 믿는 기독교, 예수님은 메시야(그리스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모하메드는 알라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이슬람은 부분적인 예를 제외하고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2048년을 기점으로 이슬람화를 완성한다는 목적하에 유럽과 북미 대륙은 물론 이제는 이슬람 예외 권역권이었던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이슬람은 성장하고 있고 세계 각국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9/11 사태이후 점증하는 이슬람은 북미에서만 150만에서 80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일은 불과 몇년만에 일어난 획기적인 일입니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Saleem 의 TV 인터뷰에 의하면 미국의 무슬림 인구는 이미 1000만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의 무슬림 인구는 기독교인 교회 출석률을 앞서간지 오래되었고, 스웨덴의 Malmo, 남부 프랑스 Marseilles (마르세이유), 벨기에의 Brussels, 영국 Birmingham, 덴바크의 Copenhagen 과 런던과 파리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무슬림 인구가 점유하여 살고 있습니다. Mapping the Global Muslim Population 이라는 연구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09년 10월까지 3년간의 통계 결과 충격적인 수치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전세계 무슬림 인구가 12억이 아니라 15억 700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세기에 무슬림 인구는 무려 500% 나 성장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기 어려운 매우 구체적인 연구 조사였습니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기독교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는 유럽(동유럽 포함) 에만 3천 8백만명의 무슬림이 있으며, 전세계 무슬림 인구가 60%가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다른 지역에서도 성장하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세계 선교 파송국중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는 한국인 타문화권 선교사 (Cross-cultural Missionary)가 2만명에 달하는데 현재 한국에서만 활동하는 무슬림 선교사는 3만명에 달하고 있고,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많은 대학에 유학생 명목으로 온 무슬림들이 상당하며, 저들의 Oil Money 와 중동(또는 이슬람) 문화 센터, 중동 유학을 통해 이제 한국도 더 이상 이슬람권 선교 대상 안전지대(?)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가장 많은 선교비를 사용하고 있는 미남침례교회 선교부의 막강한 일년 예산이 3억불인데 사우디 정부는 매일 1억 달라씩 이슬람 선교를 위해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우디 정부의3일분 선교비가 미남침례교 전체 선교비를 능가합니다. 전 세계 모든 국가의 모든 선교비를 다 합쳐도 사우디 아라비아가 쓰고 있는 이슬람 선교비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현재 이슬람 인구가 90%가 넘는 나라는 이미 57개 나라를 넘어섰으며, 자신의 운명도 모른채 국가적으로, 또는 주나 도, 또는 전도시적으로 이슬람을 믿는 “공동체”라는 뜻의 움마(UMMAH) 가 사하라 남단 국가들에게, 중앙 아시아에 이제는 영국 버밍엄, 스웨덴의 Malmo 같은 도시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지구촌 최대의 모스크를 영국의 런던에 세우고자 하는 저들의 계획이 런던 시민의 반대에 의해 부결되었어도 여전히 저들은 그 일을 추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심각한 이슬람의 도전에 무방비 상태로 기독교 선교 진영이 대응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기독교 진영은 이슬람의 본질과 세력 확장에 대해 모르거나 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코란이 마틴 루터가 언급한 것처럼 투르크(이슬람 세력 지칭)인들을 통해 “단순히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너무나 안이한 대응을 해 왔다는 점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투르크가 우리 주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으로 사용되고, 분노하는 마귀의 종이 된 이래, 투르크의 주님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채찍을 취하였다.” (Since the Turk is the wrathful rod of our Lord God and the servant of the raging devil, it is necessary first of all to overcome the devil himself, the Lord of the Turks, and thus to take the rod out of God’s hand.” 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한 이단 세력으로 이슬람을 규정한 서구의 관점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져서 우리는 이슬람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연구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기독교의 안방이었던 초대 교회의 모든 중동, 소아시아, 동유럽 일부, 북아프리카, 중앙 아시아가 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모하메드의 탄생과 이슬람의 발흥의 원인과 비밀, 꾸란이 만들어진 배경 그리고 어떻게 조작되고 집대성되었는가에 대한 궁굼점은 역사적, 문헌적, 학문적 규명을 통해 시간이 갈수록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 때,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이슬람을 태동시켰습니다. 그러한 이슬람은 기독교 안방 지역을 차례로 점령하고 그들의 선교(DAW”AH)를 차근 차근 진행하면서 세계 이슬람화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 팽창에 대해 “1400년 동안 기독교는 어떠한 대응을 하였는가?” 가 궁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 근대 선교 비교도 참으로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동 화약고의 불씨를 제공하는 이슬람의 정체에 대해서도 궁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역사적 궁굼점에는 너무나 분명한 이슬람 세력의 역사적, 종교적, 정치적, 의도적 목적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것을 막는 사탄의 전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심증이 감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문헌학적으로,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독교 세력이 규명하는 노력에는 모든 힘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의 DNA 를 통해 형성된 UMMAH(공동체)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에 이르기까지 통합적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이슬람은 이제 A way of life 와 Culture 가 되어 한번 구축되기만 하면 도저히 무너 트릴 수 없는 난공불락이 되었습니다.
이미 무슬림 다수가 된 나라들을 재복음화할 수는 없는가? 기독교는 엄청난 여리고 성(이슬람 세력)을 보고 두려워하고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은 성경에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고 성경 예언이 성취되며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가장 큰 길목에 버티고 있는 이슬람권을 주 앞에 돌이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 준 마지막 지상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회복과 이슬람 권 복음화는 이제는 물러 설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마지막 남은 영적 전투 권역입니다. 여기에 효과적 이슬람 선교를 위한 영적 전투는 오직 “기도와 간구”로 주께 구할 것을 아뢰는 일입니다. 사탄의 강력한 진을 깨트리기 위해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중보 기도의 군대를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1)
아아 이슬람!
단대목에 매번 빼앗기고 남은 뭉뜯김의 땅
순교의 핏값에 얻은 신앙 단말마로 사라지고
원한과 분노, 속임과 저주 긋는 닥쟁이 한놀음에
매정함과 차가움, 서러움과 애달픔 역사라고 포장했던가!
나라와 지경, 시대와 인종의 분열의 사립문에
꾸라이시(Quraysh) 목대잡이 신앙의 이름으로 남폿불 붙이더니
사라센 말밥굽에 아청빛 지중해 엎쓸린 파장떨고
무어족의 호령 소리에 프랑코 왕정 파슬거리더니
오스만의 화살촉에 비엔나가 씰그러지고
오일 머니 온 인류 넉가래 쓸 듯 했나
거짓의 아비에게 속아온 그대 치룽구니되고
속고 속는 삼한갑족 허들허들 생명빛 잃는데
썩달나무 썩어가듯 쌓아지는 죽엄산의 생명들
시틋한 초승달의 츱츱한 멸망인가
시호시호 장명등 기다리는 그믐달의 소생인가?
작고 작은 자 김종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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