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가정

아버지- 산악인 故 고미영씨가 쓴 희망편지

하마사 2009. 7. 14. 06:33

아버지!히말라야 14좌 완등하면 동네잔치 하고 싶어요.
또 얼큰하게 취하셔서 막내딸 자랑하셔야죠.

아버지!
사랑만 가득하신 아버지!

어느덧 아버지 곁을 떠난 지 25년이 흘렀네요. 아버지가 저를 낳았던 때의 나이가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왔던 시간의 절반에 와 있기도 합니다. 신발끈을 고칠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저도 중년이에요.

사람의 시간이 일 년 단위로 쪼개어져 있는 건 우리에게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뒤돌아 볼 때를 알려주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해가 다 가는 이 시점에, 건강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아버지께 그 동안 단 한 통의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제가 말이죠.

10년 넘게 이장을 하시며 어렸을 적 동네사람들을 우리 집 마당에 가득 채우고 새마을 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시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나요. 모기 때문에 온 몸을 긁적이며 잠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연설하시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마이크 없이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죠.

지난 여름에 방문했을 때 “이제는 동네에서 내가 가장 연장자여!”라고 큰 소리 치시고 “앞으로도 10년은 문제 없다”면서 소주 한 대접 들이키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론 머리 절반 이상이 희어지시고 치아는 흔들거리는데다 얼굴과 몸 곳곳에 주름져 남아 있는 세월의 흔적들 때문에 서글프기도 했답니다.

아버지! 걱정만 가득하신 아버지!
막내딸이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닌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산등반을 하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바로 아버지인 걸요. 제가 히말라야의 멋진 장관을 보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시간들을 잘 견뎌내고, 소중한 인연들을 알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저 데리고 등산 한번 간 적 없는데 무슨 소리냐 물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강인한 의지와 지치지 않는 체력을 물려주신 분, 바로 아버지 아니시던가요.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숫자를 세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하다’는 의지 덕분에 뒤돌아서지 않을 수 있답니다. 이것이 곧 열정이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원동력입니다.

아버지! 그리움만 가득하신 아버지!
일년에 한 두 번 뵙는 게 고작이지만 제 마음만은 늘 강렬한 태양에 그을린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군데군데 녹슨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왔냐?” 작별인사를 할 때면 눈도 안 마주치시며 “언제 올래?” 두 마디로 일관하시지만 이 안엔 들어 있는 많은 뜻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그리움이고 또 다시 헤어지는 안타까움이 아니던가요. 겉으론 무뚝뚝하시지만 사선을 넘나드는 막내딸을 걱정하고 그리워하신다고, 술 한잔 들어가시면 “딸래미 보고 싶다”는 말도 자주 하신다고 지난 번 집에 찾아갔을 때 어머니께서 전해주시더군요.

저의 목표인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후, 동네잔치를 하고 싶어요. 작은아버지, 큰오빠가 서울의 명문대에 갔을 때 마을에서 큰 잔치 했던 것처럼요. 아버지 그날 또 얼큰하게 취하셔서 동네 사람들에게 쩌렁쩌렁 딸 자랑 하셔야죠. 그날까지 열심히 논두렁 밭두렁 걸으며 건강관리 하시길 바라요. 술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드시구요. 노인정에 나가 친구 분들과도 많이 어울리세요.

아버지, 다음 생신 때 찾아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막내딸 올림
산악인 고미영(코오롱스포츠챌린지팀)

 

2009/7/1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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