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자는 너무 위험하고 부담스러워… 2인자의 전성시대!
출세 만능주의 한풀 꺾이면서 인기·'副'자 '次'자 붙은 직함 뛰어넘어
'2인자'라는 자체가 훌륭한 목표
고어·발머·이학수가 훌륭한 2인자 ·맨유 박지성·선덕여왕 출연 고현정도
훌륭한 기업엔 훌륭한 2인자 있어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윗사람 모실 때는 "선배니~임" 하는 콧소리에 안면 근육을 총동원한 웃음과 온몸을 부르르 떠는 아양을 정성껏 버무리고, 후배들에게는 "똑바로 해 이것들아…, 미친 거 아니야?"라고 호통치며 군림하는 코미디가 요즈음 큰 화제다.
'분장실의 강선생님'이란 이름의 이 코너는 상사와 후배 사이에서 끊임없이 표변하는 '밉상 2인자(안영미씨)'를 웃음의 요체로 삼는다. 이 패턴은 매주 반복되지만 대중들은 식상하지 않은 채 발을 구르며 폭소한다.
왜일까? 우리 사회 전역에 퍼진 서열과 권력의 문화, 그리고 그 공간에 창궐하는 2인자들의 행태와 변이(變異)를 이 코너가 절묘하게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사가 부하를 칭찬하자마자, 직전까지 무시하던 부하를 곧바로 칭송하는 2인자의 돌변(突變)은 이 풍자의 백미이다.
내 직장, 내 모임에 한두명은 꼭 있는 '그분'들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만드는 공감대가 이 코미디의 핵심 경쟁력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2인자는 갈수록 점점 더 다양하게 변주(變奏)되는 인기 코드이자 화두(話頭)이다.
2인자는 더 이상 단순히 한 조직의 '부(副) 자', '차(次) 자' 붙은 직함 혹은 최고위직 바로 밑의 고위직만을 뜻하지 않는다. 직능 다양화와 더불어 웬만한 조직에서는 이제 예전처럼 모든 사람이 피라미드의 정점만을 향해 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2인자'는 '1인자 바로 밑의 직위'란 뜻에서 '조직 곳곳에 일상적으로 상존하는 상하관계 중 아래쪽 구성원'의 지칭으로까지 의미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나아가 '하루빨리 1인자에 오르고 말겠다'는 출세 만능의 세태가 한풀 꺾이고 '가늘고 길게'를 표방하는 현실적 안주 전술이 폭넓게 지지층을 확보하면서, '2인자'는 '1인자로 가는 중간 교두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훌륭한 목표로의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바야흐로 '2인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생활 어디서든 한번쯤 2인자이자 참모가 되게 마련이다. 2인자는 이제 개인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이자 지혜와 전략의 기지로, 조직에는 번성과 융화의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 박지성은 2인자 시대의 상징
컨설팅회사인 올리버와이먼의 정호석 서울지사장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모범적 2인자의 상징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박지성 선수"라고 지목했다.
박지성이 속한 구단은 세계 최고의 명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맨유의 1인자라면 역시 루니나 호날두 같은 세계 정상의 스트라이커 혹은 '카리스마의 지도자' 퍼거슨 감독을 들 수 있다. 박지성은 1인자를 돕거나 1인자의 지시를 받는, 하지만 그 역할은 구단 전체의 성과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전형적 2인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박지성은 이 구단에서 묵묵히 그러면서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열심히 뛰는 선수로 통한다. 퍼거슨 감독의 용병술에 따라 수비형 포지션과 공격형 포지션을 오가지만 그는 공격을 주로 맡는 날도 수비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박지성의 가치는 일반적 축구 중계 화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만을 따로 찍은 비디오 화면을 볼 때 비로소 두드러진다. 정 지사장은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박지성을 보면서 감독이나 동료들은 깜짝 놀라게 마련인데, 그런 식으로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날 문득 공헌이 느껴지는 감동'이야말로 바로 2인자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말했다.
박지성에게 '1인자의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 대표팀의 캡틴(주장)이자 전방 공격수로서 중요한 대목마다 골을 기록하며 월드컵 본선행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맨유에서는 자신에게는 적합하고 남들은 흉내 내기 힘든 위상으로 옮겨 '온리 원(only one)의 가치'를 창출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2인자의 처신이 헷갈린다고? '내가 만약 성실하고 과묵하고 겸손하고 유능한 박지성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떠올려보면 좋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이다.
■ 조형기·고현정·허영만의 2인자 역설
'2인자여서 더 행복하다'는 역설이 2인자 시대의 대표적 현상이다. 올해 상반기 방송가에서는 '1인자 MC들이 퇴출당한 아침 토크쇼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2인자 MC 조형기씨'가 잔잔한 화제였다. 불황의 여파로 몸값 비싼 프리랜서 진행자들이 쫓겨나는 와중에서도 그만은 살아남은 것이다. 바로 2인자 처신전략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TV에서 "간판은 계속 바뀌어도 나는 늘 보조"라고 투덜대는 식으로 웃음을 안겨줬지만 실제로 그는 제작진의 토크쇼 전면 배치 권유를 완강히 거부해왔다고 한다. 한 중견 PD는 "조형기씨는 예능 오락 PD들이 꼽는 최고 두뇌의 진행자"라며 "바람을 맞고 책임을 져야 하는 1인자 자리를 고사하고 양념 같은 2인자로서 강력한 경쟁력을 축적해온 덕분에 간판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방영 중인 사극 '선덕여왕'에서 '미실'이라는 2인자 배역을 고른 고현정씨의 선택도 비슷한 맥락이다. 고현정씨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당연히 선덕여왕 역을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첫 사극에 도전하는 고씨는 드라마 제목과 동명(同名)이어서 더욱 시청률 부담이 많았을 1인자 역을 고사하고, 2인자의 악역을 자임했다. 현재까지 그녀의 선택은 적중하고 있다는 평이다.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를 소화해온 것으로 유명한 당대의 만화가 허영만씨는 평소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2인자"였다고 말한다. "1970년대에는 이상무씨, 1980년대에는 이현세씨에 밀려 1인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인자였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장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 게 허영만씨의 회고이다. 늘 수성(守城)에 신경 써야 하고, 실패의 부담이 크며, 때로는 '자만의 덫'에 빠지기 쉬운 1인자보다 2인자의 공간이 훨씬 자유롭고 널찍하다는 의미다.
■ 대표적 2인자 저우언라이와 이학수
전문가들이 성공적 2인자로 꼭 거론하는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을 주군으로 모신 저우언라이(周恩來)이다.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저우는 자신에게는 없는 카리스마를 마오에게서 발견한 후 자청해서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저우는 늘 마오의 반걸음 뒤에서 '영원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실제로 중국을 이끈 두뇌는 저우언라이였다고 평한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겠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 ▲ (왼쪽부터) 앨 고어, 스티브 발머, 이학수, 저우언라이, 조형기, 고현정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도 한국 1등 기업의 신화를 1인자와 함께 쓴 '뛰어난 2인자'로 꼽힌다. 이 전 부회장은 '오너 1인자'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직관·내향·은둔'이란 특성을 엄청난 성실함과 과감한 조언으로 훌륭하게 보완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학수 전 부회장이 이건희 전 회장에게 사재(私財)를 내고 삼성자동차를 털자고 적극적으로 조언하면서 삼성은 삼성차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훨훨 날 수 있었다는 진단이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가 이룬 궁합과 비슷하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본부장은 저서 〈1인자를 만든 2인자들〉에서 "게이츠가 MS의 두뇌라면 발머는 MS의 심장이고, 게이츠가 기술자·전략가·총사령관이라면 발머는 사업가·책사·야전사령관"이라고 비유했다. 보스와 참모, 1인자와 2인자가 이렇게 능력과 적성의 아귀가 맞을 때 그 기업과 조직은 최고의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디즈니의 전(前) CEO 마이클 아이스너도 2인자 프랭크 웰즈가 헬기 사고로 죽을 때까지 행복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웰즈와 편안한 동료처럼 지낸 아이스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웰즈의 사무실을 하루에도 10번 이상 찾으며 조언을 구했다. 아이스너는 포천(Fortune)지와의 인터뷰에서 "웰즈는 '결점만 보는 사람'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디즈니의 경영 목표인 '최고 아이디어의 성공 보장'을 도왔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앨 고어 부통령은 '미국 부통령의 역사를 새로 쓴 인물'로 꼽힌다. 고어는 강력한 비전과 조언을 통해 클린턴의 변덕과 스캔들을 감싸 안으며 미국의 기술·환경·무역정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스스로는 클린턴보다 늘 카메라에 작게 잡히도록 신경 쓰는 식으로 현명하게 주목을 피하면서 2인자의 선을 넘지 않았다.
■ 2인자가 잘해야 양뇌형 기업 가능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상상력과 직관의 우뇌'와 '이성과 논리의 좌뇌' 분류법이 관심을 끌고 있다. 컨설팅사인 베인&컴퍼니는 최근 "업(業)의 번영을 위해 경영에서 양뇌의 활성화가 점점 긴요해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혁신의 대명사로 불리는 애플(Apple)사의 간판 스타는 스티브 잡스. 하지만 애플 신화의 궤적을 되짚어보면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우뇌의 잡스와 좌뇌의 쿡이 행복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국내에서는 우뇌형으로 평가받는 구본무 LG 회장의 곁에 '좌뇌형 경영인' 남용 LG전자 부회장이 절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광훈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최근에는 R&D의 D가 'Development'가 아니라 'Design'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21세기는 기업 경영에서 우뇌적 기능, 곧 통섭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1인자인 오너를 바꾸기 힘든 한국 기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컵 모양에 따라 변하는 물' 같은 유연성이 2인자에게 점점 더 요구된다"고 말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업체인 '오피스h'의 황의건 대표는 "대중들이 '분장실의 강선생님'의 괴팍한 2인자를 보며 공감한다는 사실은 아직도 그런 2인자들이 넘쳐난다는 방증"이라며 "고품격 고성능의 세련된 2인자가 늘어야 우리 경제와 사회의 질적 발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9/6/27,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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