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최진실 씨 자살 정신분석적 이해
지난 10월 2일 인기 탤런트요, 국민 배우인 최진실 씨가 자살했다. 안재환 씨에 이어 최진실 씨가 자살함으로써 사회는 물론 교계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더욱이 최진실 씨는 아무런 유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그 원인이 궁금하다. 그토록 사랑하던 자녀까지도 포기하고서 떠났다는 점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녀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전체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만큼 사회에 파급 효과가 클 뿐 아니라 이러다가 모방적 자살이 번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자살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켜 또 다른 모방 자살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형태로든 그에 따른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만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진 그녀가 자살할 수 있는가', '왜 그녀에게 신앙의 위력이 발휘되지 못했나' 등의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신앙의 위력이 발휘되지 못한 상황에서 정신분석적인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1. 최진실 씨 자살의 이해와 원인
자살은 스스로 생명을 끊는 현상이다. 자살은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 절망적이 되어 자기의 삶을 포기할 때 일어나는 극단적인 행동이다. 현상적으로 자살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을 선택한 의지적 행동이다. 물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살이란 일반적인 죽음과 그 원인을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이 있다.
더욱이 자살은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개인적인 행동이므로 거의 개인적인 요인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실제로 자살은 흔히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 내력이나 이력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자살은 개인적 측면을 넘어 다양한 요인과 관련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최진실 씨의 자살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자살의 원인을 생물학적인 접근은 생물학적 조건 즉 유전이나 신경계의 움직임이 자살자의 의지를 압도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인체의 생리적 조건이 개인의 의지를 압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가족 내에서 자살 행동이 일어난 비율과 유전성을 문제로 삼는다.
그런가 하면 자살의 사회학적 측면은 사회적 상황과 관련성을 두고 있다. 사회학자의 자살 연구는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미치는 영향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자살의 요인들 가운데 사회학자의 관심은 전체 사회에서 감지되는 자살자의 행위와 관련된다. 즉, 사회적 측면에서는 다시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죽는 이기적 자살, 타인을 위해서 죽는 이타적 자살, 사회가 무질서 하게 되어 붕괴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아노미성 자살 그리고 절망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운명론적 자살로 구분한다.
이런 점에서 최진실 씨의 자살은 과히 운명론적 자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운명론적 자살은 자기의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일어난다. 그러기에 운명론적 자살은 자아의 약화와 관련성이 깊다. 힘들고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도저히 견디어 내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자살로 그 분출구를 찾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궁금한 점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은 그녀에게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는가를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고 있다. 우울증에 압도되면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살에서 우울증의 관련성을 높게 만드는 이유이다. 실제로 우울증은 여러 정신질병 중에서 자살률을 가장 높게 점유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95% 이상이 당시에 심리 및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지만 그 중에서도 우울증이 80%를 점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울증(depression)은 의기 상실한 기분과 정신 운동이 저하되는 정신적 증후군이다. 우울증은 울증 또는 울병이라고도 하며 대개 심리적으로는 희망 상실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신체적으로는 불면증이나 체중 감소를 수반한다. 특히 우울증은 남자보다 여자에게서 더 흔한 장애다.
우울증이 자기 존중감 상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할 때 여성이 남성보다 자살에 더 취약하다는 것이다. 주요 우울 장애의 시점 유병률이 남자가 2~3%인데 비해, 여자는 5~9%였다. 또한 평생 유병률은 남자가 5~12%인데 비해, 여자는 10~25%에 달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역학적 연구에서 우울증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2배 정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2. 반응성 우울증과 자살 유발의 위험
최진실 씨의 자살에 우울증이 지배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최근에 보도된 안재환 씨와 금전적인 관련설은 이를 추측케 만든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있지만 상당한 부담이 되어 정신적 에너지를 급격하게 감소시켰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태는 우울증으로 진단된다. 우울증은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갑작스런 사건이나 상실감에 의한 이른바 반응성 우울증으로 진단되는 것이다.
반응성 우울증은 우울증 중에서 거의 7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응성 우울증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회복될 수 있는 증상이지만 적절히 조치하지 못하면 오히려 자살 유발의 위험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작스럽고 급격하게 정신적 에너지가 소진되기에 위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성 우울증은 에너지의 고갈과 관련되어 이해할 수 있다. 우울 상태는 프로이트(S. Freud)에 의하면 개인의 분노가 내면으로 향한 형태이며, 칼 융(C.G. Jung)에 의하면 정신에너지의 고갈을 의미한다. 우울증은 의식에서 이용할 만한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는 것이다.
에너지는 무의식에 정체되고 지금까지 돌보지 않은 내면 세계가 큰 세력을 가지고 의식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자살자가 느끼는 절망감·허무감, 자살 관념 등은 자아 의식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자아가 집착해 온 사회적 평가·객관적 기준·사회 규범의 한계를 느끼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다.
그러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울증 상태에서 신앙인도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울 상태에서는 순간적으로 신앙의 위력이 무력화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으로 자살에는 기독교인이라도 예외를 둘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열왕기상 19장에 엘리아가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한 싸움에서 승리하고서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기도하던 것을 들 수 있다.
이때 엘리아의 우울 증상은 온 힘을 쏟아서 기진맥진하게 된 아드레날린 우울성이었다. 대선지자가 자살을 기도했다면 신앙심이 강하지 못한 일반 신앙인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는 최진실 씨의 자살이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우울 증상에서는 신앙이 무력화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울 현상은 좌절이 지배적인 상태로서 불행감이 밀려들면서 삶을 암울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최진실 씨뿐 아니라 다른 신앙인이라도 자신이 열등하고 비참하게 여겨지고, 삶이 매우 힘겹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며,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들이 밀려들어 침울하고도 슬픈 기분에 휩싸일 수 있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열심이 신앙생활을 하던 신앙인이 일상생활에서도 전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으며 흥미나 의욕이 저하되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상의 생활, 가정생활이나 학업, 그리고 직업 활동이 부진해지고 대인관계도 위축되어 삶이 더욱 힘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욱이 인생의 수렁 상태에 있다면 결코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생각에 휩싸이게 되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을 시도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최근의 안재환 씨에 이어 최진실 씨의 자살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는 그대로 최진실 씨의 자살을 기점으로 기독교인에게 자살의 유혹과 그 예방적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이유를 요청하는 것이다.
3. 기독교인 자살 예방과 그 대책
자살은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자살하려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많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자살하려는 사람의 동정을 살피어 시간을 다투어 적절하게 처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간적 실수로 생명을 잃게 되기 쉬운 것이다. 이는 자살의 예방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이다.
최근에 일어난 기독교인의 자살은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중요성을 직시하게 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10대 사망 원인 중의 하나가 자살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자살이 죽음의 원인 중 5위 이내에 들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연도별로 차이는 있지만 인구 10만 명 당 20~25명 정도로서 세계적으로 높은 편에 해당한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자살 기도(企圖)에 그친 사례까지 합치면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자살의 위험 요소(risk factors)를 파악하는 일은 자살의 예방적 효과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목회적 관점에서 기독교인의 자살 예방을 위한 몇 가지 대책을 제안하고자 한다.
1) 기독교인의 정신 건강을 분기별로 체크하자
기독교인의 정신건강을 정기적으로 체크해야 한다. 이런 영적 건강에는 교회에서 분기별로 간단한 진단지나 설문지를 통하여 성도들의 정신건강을 체크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이때 특히 ‘우울증’을 중요시해야 한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인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정신에너지의 제로(zero)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기에 자살의 위험성이 더욱 높아질 수 있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울증은 흔히 강박적이고 철저한 성격의 사람에서 잘 나타나며, 이들은 대개 사회생활을 착실히 하고 사회의 도덕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 특히 신앙적으로도 교회의 일에 성실하게 봉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절망감·허무감·무의미 등에 빠져 기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울증은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보다는 현실적 욕구와 불만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증세는 상당 부분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과 관련을 갖고 있기에 기독교인은 현실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무력감을 경험하므로 자살할 위험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 반대 급부로 ‘저 세상적인 것’을 이상화시키는 비현실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현실의 포기로 인한 회피적 방안으로 일종의 현실 도피적 태도를 취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이때 우리는 '자살자들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천국과 지옥을 왜 생각하지 않을까' 등을 두고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자살 기도자들은 당장에 그런 것조차도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상태이다. 평소에 기도하면서 신앙적으로 무장하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신앙의 본질과 삶의 의미 강화하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잘못된 신앙·형식적인 신앙은 생활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신앙의 무기력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상실한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활력을 가져야 할 신앙생활이 그렇지 못하다면 질병의 상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랭클(Viktor E. Frankl)은 그 원인의 하나로 현대인의 무의미를 정신적 문제로 지적한다. 현대인에게 삶의 무의미는 삶의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무의미가 삶의 무기력과 정신병을 유발하는 요인이라면 신앙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인은 곧잘 무기력의 상태에 노출될 수 있다. 게다가 신앙생활이 무의미한 상태에 있는 교인이라면 언제든 무기력으로 이어질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신앙생활의 무의미, 활력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은 그대로 무기력에 빠질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상태에서 잠재력이 침전되고 삶의 단조로움과 무기력을 느끼게 된다. 이는 ‘왠지 모르게 힘이 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의욕이 상실된 심리적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교인은 원인 모를 공허감이 그들의 실존적 공백을 채우게 되어 신앙적으로 생활을 창조하기란 어렵다. 이는 신앙의 본질과 관련하여 삶의 의미를 강화해야 할 이유다.
3) 내세 신앙으로 소명 강조하자
사람의 심리는 안정적이지 않다. 주변의 환경은 우리의 신앙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이런 경우에 신앙이 확고하지 못하면 외부적인 환경적 위협에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앙이 일시적인 병리적 현상, 갑작스런 사건의 변화 등에 의해 손상이나 상실에 노출됨을 의미한다. 목회자는 내세 신앙을 강조해서 기독교인이 새 힘을 얻게 해야한다. 내세 신앙은, 죽은 다음에 천국 가고 지옥에 가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삶에서 자신의 소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소명은 삶에서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일을 발견하는 일이다. 따라서 내세 신앙은 ‘존재와 신앙’ 그리고 ‘소명 내지는 사명’의 문제와 중첩되고 있다. 즉 삶을 사는 존재로서의 회복일 뿐 아니라 사명자로서의 건전한 신앙의 회복이다.
4) 체험적 신앙생활을 훈련하자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체험적이어야 한다. 체험적인 신앙은 힘이 있기에 생활 속에서 만나는 여러 위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한다. 이런 체험적인 신앙은 감동이 있고 생동감을 발휘하게 된다. 특별히 21세기에 사는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세대다. 이들은 미래학자인 레오나드 스윗(Leonard Sweet)은 ‘포스트모던 세대는 경험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진리를 그저 알기보다 자기의 것으로 체험하고 싶어 하며,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또한 그들은 참여하길 원하고 그저 일방적인 수여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또한 관계성을 중시하며, 이미지 중심적이다. 즉 포스트모던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말이나 글보다 이미지나 은유로 표현하기를 원한다.
실로 오늘의 기독교는 고대의 기독교의 영성과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빈티지’가 중요시 되는 이유다. 교회도 적극적인 참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고 공동체성을 더욱 지향하며, 이미지와 상징을 추구하는 예배를 강조한다. 이로써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생활에서도 실천할 수 있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었다. 이제 나에게는 무의미의 심연이나 나락은 없으며 나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존재로서 나의 삶은 다시 멋있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떠오르는 교회들이 ‘빈티지 신앙 예배’를 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목회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자
그동안 교회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목회에 열심을 내왔다. 그러나 작금에 사회로부터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일반화되고 있음이 안타깝다. 이제 최진실 씨의 자살을 기점으로 교회는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영혼을 돌보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교회는 목회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할 때가 왔다. 숫자를 증가시키려는 양적인 부흥에 집착하지 말고 영혼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보다 전문적으로 보살피는 일에 나서야 한다. 교회의 경영론에 입각하여 나가다가는 본질인 영혼을 돌보는 일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분기별로 교인의 심리상태를 점검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문제가 발견되는 성도는 특별하게 다루어 교육하거나 전문가를 기용하여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도록 특별한 조치를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소속한 교회들은 일종의 특별한 관리도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다. 실로 그 어느 때보다도 영혼을 돌보는 본질에 교회가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기독교인의 자살이 문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실로 신앙이 삶의 희열과 정열로 충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최진실 씨의 자살이 시발점이 되어 목회에서 자살에 대한 깊은 관심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싶다.
김충렬/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한일장신대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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