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본질/봉사(섬김)

어느 할머니가 내밀고 간 1억

하마사 2008. 4. 5. 17:48
어느 할머니가 내밀고 간 1억
 
"좋은 일 하려는데…" 물어물어 延大 총무처로
"재개발 보상금… 학생 위해" 끝내 이름 안밝혀
 
최수현 기자 pau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지난 1일 오후 2시쯤 한 할머니가 연세대 공학원에 들어섰다. 커다란 살구색 재킷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할머니는 학생들이 모여 밥을 먹고 있는 지하 식당을 서성이며 두리번거렸다. 한참 뒤 할머니는 구석진 곳에서 식사를 하던 정제훈(26·사회체육학과)씨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학생, 좋은 일하러 왔는데 어디로 가야 되나. 길을 헤매다 여기까지 와 버렸네."

정씨는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대학 본부 총무처로 안내했다.

할머니는 총무처 직원과 마주앉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엔 5000만원짜리 수표 1장, 4000만원짜리 수표 1장, 100만원짜리 수표 10장, 모두 1억원이 들어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써주세요."

할머니의 차림새를 보고 봉투에서 100만원쯤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총무처 직원들은 깜짝 놀라 총장실에 연락을 취했다.

할머니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묻자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김한중 총장이 달려와 "장학금 받은 학생들이 감사 서신이라도 보낼 수 있게 주소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해도, "경기도에 살고, 나이는 60대"라는 대답뿐이었다.

할머니는 "식당 해서 모은 돈에 최근 내가 살던 지역이 재개발돼 나온 토지보상금을 보탰다"며 "깨끗한 돈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자식이 3명이나 되지만 대학 공부는커녕 밥도 제때 못 먹였어요. 애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어떻게 이름을 밝히겠어요. 임신하고도 제대로 먹지 못해 지금도 빨래하고 나면 다리가 저리지요. 내가 평생 없이 살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심정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할머니는 "연세대가 좋은 학교라는 말만 듣고 찾아왔다"고 했고, 김 총장은 할머니가 기부한 돈에 학교 재정을 보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겠다고 약속했다. 두 시간 만에 학교를 나선 할머니는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이 종점인 버스에 올랐다.

입력 : 2008.04.05 0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