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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학교를 다니면서 뻥튀기 장사를 하던 소년이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뒤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까지 됐다. 이명박(李明博) 당선자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성공 드라마였다.
◆가난에도 학업 포기 안해
이 당선자를 당 경선 때부터 도왔던 최시중 선대위 고문은 “이명박을 미는 이유는 가난과 배고픔을 제대로 경험해본 후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뒤 포항에서 자란 이 당사자는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가 목부(牧夫)로,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는 과일 행상으로 일했지만,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때 방 한 칸에 15세대가 모인 곳에서 살기도 했다. 학교엔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안 돼 물로 배를 채웠고, 등록금을 못 내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뻥튀기 장사도 하고 성냥개비에 황을 붙여 팔았다. 군부대 철조망 밖에서 김밥과 밀가루떡을 팔다가 헌병에게 잡혀 맞았다.
그러면서도 하루 왕복 4시간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당초 고교 진학은 엄두를 못 냈지만, 중학교 때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해 동지상고 야간부에 들어갔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낮에 일하면서도 전교 1등을 유지했다. 그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다들 공부를 안 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더 나은 직장을 구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에 고교 졸업 이후 서울에서 막노동을 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결국 또래 학생들보다 1년 늦은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 ▲ 고려대 상대 재학 시절의 이명박 당선자. 뒷줄 가운데가 이 당선자다.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이 된 이 당선자는 1964년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에 참가했다가 국가내란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이 경력이 그를 현대건설과 인연을 맺게 한다(1965년). 그는 “당시 운동권 출신으로 ‘블랙 리스트’에 올라 웬만한 기업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며 “그때만 해도 현대건설은 직원이 수십명인 작은 소기업이었다. ‘설마 여기도 막진 않겠지’라는 생각에 지원했다”고 했다. 입사 후 그는 태국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각목과 칼을 든 폭도들에게 맞서 공금이 든 금고를 지켜내 정주영 회장의 전폭적 신뢰를 받게 된다. 5년 만에 이사, 10년 만에 부사장, 12년 만에 사장, 23년 만에 회장으로 승진했다. 회사에선 “이명박은 정 회장의 친척” “박정희 대통령이 백”이란 소문이 돌았다. 이에 정 회장은 이 당선자에게 “내가 언제 당신을 승진시켰어? 당신은 당신 스스로 진급한 거야”라고 했다.
- ▲ 이 당선자(왼쪽 세 번째)가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가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당선자는 1992년 현대를 떠났다.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선 출마를 위해 만든 국민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자당에 입당해 전국구 의원이 됐다. 그는 “고르바초프라는 한 인물로 인해 세계에 생긴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도 뭔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1995년 지방선거 때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배했고, 1996년 15대 총선에선 서울 종로에서 당선됐으나 법정 선거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쓴 사실이 드러나 의원직을 사퇴한 뒤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2000년 귀국해 정치 재개를 준비했다. 결국 2002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뽑힌 뒤 본선거에선 당시 여당의 김민석 후보를 꺾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 당선자는 2005년 10월 청계천 복원 사업을 순조롭게 마무리지으며 대선 도전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는 “4200번 이상 노점상들을 만나 설득했다”고 말해 왔다. 또 대중교통 시스템 개조, 뚝섬 서울숲 조성 등으로 서울을 바꾸면서 ‘일을 해내는 이명박’ ‘불도저’라는 이미지를 심었다.
- ▲ 현대건설 재직 때 정주영 회장과 윷놀이를 하고 있는 이 당선자(왼쪽).
대선을 목표로 지난해 6월 여의도 정치권에 돌아온 그는 박근혜 전 대표와 경쟁해야 했다. 그는 당보다는 국민을 상대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먼저 주력했고, 지난해 9월 북한 핵실험과 올해 초 고건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에 힘입어 계속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유지했다. 경선 때 “이 후보의 어머니가 일본인이며 형들과는 배다른 형제”라는 소문이 나돌자, 그는 입 속에서 세포를 떼어내는 DNA검사를 통해 이 소문이 허위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8월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표와 유례가 드문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1.5% 차이로 신승(辛勝)을 거뒀다. 이 당선자는 본선에서도 다른 후보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BBK 의혹 연루 문제, 도곡동 땅 외에 한반도대운하의 적절성까지 총망라됐다. 지난달 BBK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가 귀국하면서 절정에 달했고, 대선을 이틀 앞둔 17일엔 자신에 대한 특검법까지 국회를 통과했다. 또 이회창 전 총재의 무소속 출마도 있었지만, 그는 역대 대선 사상 최대 득표율 차이로 압승했다.
- ▲ 이 당선자가 서울시장 시절인 2003년 10월 청계천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당선자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꼽는다. 평소에도 자주 어머니 얘기를 한다. 그는 “사춘기 시절 뻥튀기 장사하는 게 부끄러워 큰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장사를 하다가 어머니에게 눈물 나도록 혼났다. ‘왜 얼굴을 숨기느냐. 도둑질한 것도 아니고 네 힘으로 일해 돈 버는 건 떳떳한 것’이란 말씀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도 어머니가 면회를 와 “아들아, 소신대로 행동해라. 어미는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서 이 당선자를 격려했다. 이 당선자는 “내 인생의 성공은 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 7일 전 재산 사회환원을 발표하면서도 “이는 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1964년 이 당선자가 출감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떴다. 그는 아직도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로 어머니 생전에 새 옷 한 벌 못 해드린 것을 꼽고 있다.
- ▲ 이명박 당선자가 올해 설날 부인 김윤옥씨(맨 왼쪽)와 함께 서울 가회동 자택을 찾아온 손자, 손녀들을 안아주고 있다.
●생활기록부 속의 이명박
“적극적” “결단력 강함” 주요 과목은 모두 ‘수’
이명박 당선자의 꿈은 중학교 때부터 ‘관리(官吏·공무원)’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졸업한 동지상고 생활기록부에는 ‘학생 희망 직업’과 ‘학부형의 희망’ 모두 ‘관리’로 적혀 있다. ‘중학교 때 희망 직업’도 ‘관리’라고 기록돼 있다.
고교 담임교사는 “활동 적극적”, “성격은 착실, 결단력 강함”, “학업이 우수하고 타의 모범”, “장래가 기대됨”이라고 평가했다. 자주성·책임감 등 ‘행동 발달상황’ 평가에서도 대부분 우수 등급인 ‘가’로 기재돼 있다. 포항중학교 학적부도 “성격 명랑” “적극성 유(有)”다. 다만 초등학교 2학년 때는 “경솔하다”고 적혀 있으며, 고교 2학년 때는 ‘판단 경향’ 평가 항목의 ‘신중성’란에 ‘X’표시가 돼 있다.
성적은 어떠했을까? 이 당선자는 고교 3년 내내 국어, 도덕, 수학, 영어, 독어 과목에서 ‘수’를 받았다. ‘미’를 받은 건 모두 네 번이었다. ‘상업경제’(1학년), ‘상업부기’(1학년), ‘주산’(1·3학년) 과목에서였다. 1학년 때는 전체 20개 과목 중 ‘수’가 10개, ‘우’가 7개였고, 2학년 땐 23개 과목 중 ‘수’ 19개, ‘우’ 4개였다. 18개 과목을 들었던 3학년 땐 ‘수’ 16개, ‘우’ 1개였다. 따로 등수는 기재되지 않았다. 이 당선자 측에선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국·영·수는 열심히 했지만, 상대적으로 상업 관련 과목들을 잘 챙기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중학교 때는 ‘특기 및 취미’가 ‘탁구’였으나, 고교 때부터 ‘영어’였다. 초등학교 땐 “그림을 좋아한다”고 기록돼 있다. 고교 땐 ‘문예부’ 활동을 한 것으로 나온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를 다닌 것을 감안하면 출석도 양호했다. 1학년 때 4일, 3학년 때 5일 결석했고 2학년 때는 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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