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을 인정하라 | ||||||||||||
육체와 영혼에 대한 인식을 균형 있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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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영혼 구원과 영생을 중심 과제로 둔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인에게 상대적으로 성에 대한 인식을 뒤로 물러나게 만든다. 성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반인데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육체를 갖고 있으므로 성욕이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런 육체적 성욕을 인정하는 기반에서 세계를 해명하고 영원한 진리를 논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기독교인의 성폭력 예방과 그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육체적 본능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육체적 본능을 인정해야 한다. 육체적 본능이 때로는 영적인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기독교인은 인간의 영혼을 중요시한 결과 인간의 육체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도 영적인 측면에 치우치려 한다.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라는 균형적 감각을 회복함이 필요하다. 육체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고 그것을 제어하며 살 수 있는 영혼이 있다. 실제로 육체와 영혼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삶에 충실하게 되며 그 본질을 밝히는 일도 가능해진다. 어쩌면 우리에게 육체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킴이 급선무일지 모른다. 육체를 가진 우리는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 욕구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성욕이다. 육체는 본능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육체를 경시하고 욕망을 죄악시했다는 것이다. 육체적 욕망이 신앙의 힘을 받아 감동으로 채워진다면 삶에 희열과 환희가 있을 것이다. 이때의 감동은 신앙이나 지성이 가져다 줄 수 없는 근원적 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직접적 감각이다. 우리들은 이 직접적 감각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 직접적 감각, 즉 직각(直覺)이야말로 분명히 존재하는 인식 중의 하나이며, 힘과 능력을 갖춘 원초적인 인식이다. 어쩌면 다른 모든 것들은 이런 감각을 뒷받침을 하는데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때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아폴로적인 것보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 로고스보다는 파토스, 관념보다는 실재, 지식보다는 의지를 존중히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본능과 욕망은 항상 유동적이면서도 통일하는 힘일 뿐 아니라 그것은 실로 정지가 없고 분열과 분해를 묶어 하나로 전진시키는 힘으로 존재할 것이다. 2) 육체성과 영혼성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은 유기체적 특성을 갖는다. 우리의 생명은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깊이와 근거를 갖는 ‘삶’은 각자의 인식에 의해 그 내용이 다르게 된다. 즉 우리의 생명은 유기체처럼 삶의 내용을 만들어 전진하는데,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육적 및 영적 체험이다. 체험하지 못한 것은 지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교리적이며 관념적인 지식은 결국 이 넓고 깊은 체험의 내용을 합리화, 체계화시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육적 및 영적 체험을 통해 그 내용을 지니도록 되어 있기에 누구라도 육적 및 영적 체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도 한쪽, 즉 영적으로만 치우쳐 살려고 한다. 이제 생각의 전환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육적 체험의 내용을 자각하는 것, 그 체험을 자신의 영적 내용으로 만드는 체험의 내면적 요소가 다름 아닌 신앙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영혼성과 육체성을 구분하려는 이분법적인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육체와 영혼의 균형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교훈하신 바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롭기를 바라시던 것이다. 그것은 알고 보면 세상과 천국, 그리고 영(靈)과 육(肉)의 양면성을 의미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영적인 이상(理想)에 치우쳐 다툼을 벌일 때에 주님께서는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시면서 현실(現實)을 논하셨다. 그런가 하면 부자 청년이 영생을 질문할 때에는 그 마음에 신앙이라는 이상(理想)이 들어갈 자리가 없음을 지적하신다. “네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팔아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이다. 영적인 이상(理想)을 좇는 제자들에게는 현실 즉 육체의 중요성을, 현실로 꽉 찬 마음에는 이상(理想) 즉 영혼의 중요성을 지적하셨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양면적 특성으로 균형성을 중요시 하였건만 그 제자 된 우리는 어찌하여 아직도 오로지 영적이라는 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지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는 참으로 주님의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지 않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인식의 문제에서 육체와 영혼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식이란 체험의 자기의식, 의식작용의 내용이므로 육체적인 감동과 그에 따르는 직접적인 감각도 영혼에서는 공통성을 가진다. 육체적인 희열이 영혼의 감동이 될 수 있고 영혼의 괴로움이 육체적인 고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육체적인 감동도 깊고 원초적인 영적 체험이 될 수 있고 그 직접적인 감각이 영혼의 바탕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적인 감각은 체험의 상층이라면 육적인 감각은 인식의 기초적 구조로 보아도 좋지 않은가 말이다. 이는 우리가 육체적 감각이 요구한 것을 체험하며 이것을 신앙의 영적 특성으로 깨닫고 의식하며 판단하는 경험이 가능한 이유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본래 인간, 주어진 인간성을 구속하거나 부정하지 않아야 하는 점이다. 그러기에 영혼을 위한다고 해서 육체를 거부한 기독교적 신앙은 수정되어야 한다. 또한 내세를 약속한다는 구실 아래 현실세계를 회피하는 태도도 개선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영혼 구원이라는 기치 아래 삶의 창조적인 정열과 의지를 약화시키는 행위는 그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우리의 유한적인 삶, 생명 그 자체를 어떤 다른 사상과 교리의 예속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 3) 성욕을 정상적으로 발휘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성욕(性慾)은 정상적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성욕이 정상적으로 발현되지 않으면 성폭력이나 성도착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발휘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성폭력은 성욕을 정상적으로 발현하지 못하는 상황과도 상당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성 욕구는 침체되거나 그것을 누적시킨다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분출될 소지를 갖는다. 그러기에 성욕구가 있을 때 억지로 또는 신앙적 의지로 누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이기려고 기도를 통하여 억누르는 것도 문제다. 이는 밥을 먹지 않고 먹었다고 생각하려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분명히 밥을 먹지 않고서도 ‘먹은 셈 치고’로 말하는 것과 먹은 것과는 실제로는 많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성욕을 해결한 것과 해결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그런 성욕을 발현시키지 않고 억누르기만 한다면 어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그런 현상은 마치 속에서 들끓고 있는 용암이 언젠가 자극되면 분출하여 엄청난 괴력을 나타내는 현상과도 다를 바 없다. 성욕이 바로 그런 용암의 상태와도 같은 것이다. 성욕을 발현시키지 않고 침체되는 상태로 놔둔다면 그것은 엄청난 덩어리가 된다. 그러면서 그 성욕의 덩어리가 무서운 에너지를 가진 용암처럼 들끓어 오를 수 있는 정도에 이르면 자신이 성욕을 조절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런 정도에서는 우리가 성욕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성욕이 우리를 행동하도록 압도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욕이 들끓어 오르는 현상이 바로 성폭력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의 성욕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정상적인 성관계는 영혼과 육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성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그런 점에서 성욕이 표현되는 부부의 성관계는 단순히 연합하는 차원을 넘어 신비로움을 갖는다. 성관계는 의식 무의식의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이며, 스트레스의 해소 기능이 있고, 원기회복의 비밀이며, 쾌감 증진의 효과, 종족보존의 기능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부의 성관계는 변두리가 아니라 언제나 가운데 토막이다. 그러므로 성관계를 하기 싫다고 안하고, 하고 싶다고 하면 부부사이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부부에게 성문제가 있다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전문가를 찾아 정확하게 진단받고 치료받아야 한다. 이때 과거와 현재의 성생활의 차이, 성관계 횟수를 포함한 관계정도를 살피는 것은 간단한 진단기준이다. 이를 위하여 성욕의 과소, 성 혐오, 통증, 성관계의 방법, 체위, 오르가즘, 성 만족 등이 점검되어야 한다. 성기능의 문제나 장애를 진단하는 다음의 세 가지는 중요하다. 그것은 신체생리적, 심리적, 관계적 원인이다. 신체생리적 원인으로는 주로 성기능에 문제가 일어나는 신체적인 결함으로 신경이나 해부학적인 이상을 들 수 있다. 즉 척수손상이나 당뇨병과 같은 각종 질병, 신체의 피로감 등이 포함된다. 심리적 원인으로는 성에 대한 자신감이나 긍정적인 심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죄의식, 불안, 성에 대한 부정적 태도나 가치관, 성에 대한 의무감, 강박관념 등이 있다. 관계적 원인으로서는 서로 간의 성관계를 방해 및 저해하는 요소인 부부 간의 미움이나 적개심,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 서로 간의 불신, 부모와의 관계, 성에 대한 부정적인 과거경험 등이 있다. 성기능의 문제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와 관련되고 있기에 비뇨기과의 전문적 진단이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부부의 성생활이 성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 의한 것이라면 정확한 지식을 알려주어 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다. 특히 성생활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심리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성생활의 촉진 및 향상법 숙지해야 한다 성폭력을 예방하는 방법에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소극적인 방법은 성에 대하여 주의할 것과 조심할 것들에 관하여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다. 소극성이란 통제적인 방법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유의하는 태도다. 그 반면에 적극적이란 정상적인 성생활로 발전하는 방법을 중요시 한다. 실로 정상적인 성생활은 성폭력을 예방하는 적극적인 측면이 있다. 더 나아가 정상적인 성생활과 아울러 성생활의 향상법은 중요하다. 여기에 하워드 클라인벨(Haward Clinebell)의 성생활 촉진법은 매우 도움이 된다. 그 핵심은 모두 심리적인 것이 기반이 되는 것으로 성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 감정해소, 고유한 낭만을 찾는 것, 바람직한 방법을 추구하는 것, 가장 방해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 등이다. 성적인 감응력에 대해서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없으므로 성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는 서로에게 필요하다. 이 태도는 올바른 성생활을 향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전반적인 부부사이에 기여한다. 이때 성적인 감응력이 증대되는 것들이 요구되는데, 성생활에서 상대방을 올바로 이해하기, 적절한 위로와 어루만짐, 긍정적으로 수용되기를 바라는 갈구 등은 서로의 마음을 정기적으로 채워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랑하기 전에 쌓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서로 간의 정신적 상처와 울분, 그리고 노여움 등은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데 장애요소이므로 사랑하기 전에 이러한 장애요소를 해소해야 한다. 성적 흥분에는 감각적인 사랑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특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때 현재의 결혼생활에서 고유한 낭만을 찾아 즐기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부부 간에 성적 즐거움은 젊은 시절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원숙한 노년기에도 성적 즐거움은 무한정 지속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인의 성폭력 방지 대책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성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이란 영적 신앙에 치우친 때문에 성에 대한 오해와 성욕이 정상적으로 발현되지 못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신앙적인 의지로 육체적인 성욕을 억누르려할 때 그것이 오히려 성폭력을 발생케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성욕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정상적으로 발현하도록 힘을 기울이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로써 영적 및 육적 생활이 균형을 이루어 성폭력이 감소하기를 기대해본다. 김충렬/ 한국상담치료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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