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장, 성만찬
서방 기독교 안에서 성만찬 예전의 전통적 정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희생제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따라서 성만찬을 중심적 위치에 둔 예전의 분위기도 참회와 반성을 주제로 하는 슬픔과 엄숙 일변도였다. 그런데 오늘날 동방과 서방교회간, 신교와 구교간 에큐메니칼 회합을 거듭하면서 성만찬의 본질적인 정서가 축제적이었다는 새로운 이해와 강조가 대두되고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리마회의의 합의에서 나온 BEM 문서도 성만찬의 의미를 예시하면서 전반적으로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기보다는 부활 및 다가올 하나님나라의 대망에서 오는 환희의 기조를 반영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일련의 변화된 관점들은 서방의 여타 전통 및 동방의 예전 전통들이 상호 반성적 이해 위에 교류와 수용의 폭을 확대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과연 성만찬의 정서가 시원적으로 마치 축제적인 분위기 일색이었다는 단일 주장에의 몰두가 전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래서 슬픔과 반성의 참회적 분위기는 중세의 유물로서 젖혀 두어야 할 정서인가? 아니면, 기존의 로마교회와 개신교회가 경도 되었던 또 다른 정서만이 여전히 성만찬의 진면목으로서 이해되어져야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비록 성만찬이 더 이상 상당수의 개신교회 안에서 중심적 위치가 아닌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성만찬이 담지하는 상징은 구속사의 재현이면서 예배의 본질을 규정해 주었던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의 형성적인 태(胎)라고 할 수 있는 예배가 기독교 신앙의 영성에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의 기초 위에서 본고는 성만찬의 본질적 정서, 나아가서 예배의 당위적 정서를 규명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나라와 성만찬의 유비를 다루고 그 실제를 관련 예전문서들과 유관 전통들을 통해서 찿아 보고자 한다.
II. 성만찬에서 구현되는 하나님나라
역사적으로 동서방 교회는 성만찬이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장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영성적 삶의 중심에 있던 성만찬의 실행은 떡과 포도주라는 지상적 요소를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천상적 요소로 바꾸었다. 곧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가 상징을 매개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나라는 어린양과 혼인잔치를 벌이는 축제와 환희의 장이며, 완성의 극치를 지향하는 영역이지만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을 향하는 연속선상의 시작이요, 그 도정인 까닭에 실제상 복합적 정서를 반영하는 장이었다. 성만찬과 하나님나라의 의미상의 병행을 통해서 이점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A. 구 질서의 극복과 새 질서의 출현
성만찬은 곧 구 질서와 새 질서의 극한적 대비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대화중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과 그에 걸맞지 않은 죽음은 바로 불의하고 참담한 현실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묵시문학적 대망 사이의 철저한 모순적 대비를 드러내고 있다. 두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대망하였었다. 그러나 의와 평화의 화신으로서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 예수는 부조리한 현실의 대표적 모델인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의해 고난의 표상인 '십자가'에 넘겨진 것이다.(눅 24:19-21) 동시에 모든 이들의 희망도 무너졌다. 악한 현실과 다가올 하나님나라 사이에 극한 대비가 현실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과 배반은 이미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서 극복되어지고 있음을 이들은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부활의 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제자들에게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었다. 급기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6:25,26)'는 책망을 받기까지 한다. 그들이 새로운 현실의 도래를 깨닫게 되는 시간적 공간적 장은 바로 예수께서 성만찬을 시행하신 자리였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 성만찬을 받을 때, 눈이 닫혀 있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눈을 떴다. 닫혀있던 세계, 과거의 질서 속에 붙들려 있던 시야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점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질서 안에 편입되어 있으면서 그 질서를 체감치 못하던, 그래서 '슬픈 빛을 띠고' 걸어갔던, 더디 믿는 믿음의 제자들은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이 사건은 곧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보여주는 정점으로서의 부활과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성만찬의 사건을 연관시켜주고 있다. 성만찬의 자리는 그러므로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 그리스도가 개입하시는, 그의 임재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곧 하나님나라의 임재요, 그의 나라의 임재였다. 이 임재의 현실은 대상물인 떡과 잔을 우상화하리 만치 중요한 주제였다. 성만찬과 하나님나라는 기존의 질서의 극복 위에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유비를 이룬다. 기존의 질서란 모순과 어그러짐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정의의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시는 듯한 부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이런 현실에 대한 전능자의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서 돌연 그 존재의 실체를 드러낸다. 성만찬은 이런 하나님나라의 실체가 드러나는 장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가 임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새로운 질서는 무엇인가? 곧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화해의 사건이다. 수직적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누구든 성만찬의 장에 나오는 자는 성결의 요구에 합해야 한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고전 11:27)는 먼저는 수찬자에게 개인적인 성결성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죄의 씻음을 전제한다. 인간에 의해서 어그러지고 왜곡되어진 관계가 성만찬 안에서 갱신된다.
동시에 성만찬은 수평적인 화해의 사건이다. 기독교계 어떤 전통에서는 그래서 성만찬을 Communion 혹은 Holy Communion이라고 명명한다. 헬라어의 koinonia에서 나온 말이다. 친교, 연합, 나눔, 그리고 공동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성만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관계를 형성하는 자리이다. Willam R. Crockett는 H. de Lubac의 견해에 동조하며 고린도 전서 11장 27-29에 나온 '주의 몸'을 성별된 떡과 잔에만 국한시키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은 또한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곧 바울과 어거스틴의 생각이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수평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와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화해는 곧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평등적 관계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이 평등이란 바로 하나님나라에 참여한 사람들간에 발생하게된 평등의 원리이다. 종래에 노예의 신분이었든, 귀족의 신분이었든 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 없이 그들은 같은 상에 앉아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한때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위협을 받았다. 중세교회는 사회적 신분이 아닌 교회의 신분상의 구별이라는 또 다른 구질서적 요소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에 역류하려고 하였지만 종교개혁의 거센 저항을 초래하고 말았다.
성만찬은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구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어 가는 장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며 수평적으로는 교회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지체들과의 화해를 이루는 장이다.
B. 완성에의 대망과 그 시작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나라는 사람들 가운데 임하였으나 그 임재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는 힘으로가 아니었다.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은 모습이었다. 천국은 임하였지만 현재의 질서가 전복된 임재가 아니다. 추수 때까지 하나님나라의 자녀들과 악의 자녀들이 함께 자라는 현실이었다.(마 13:24-30, 36-43) 하나님나라가 인간에게 임하였으나 영광스러운 새 질서로서가 아니라 겨자씨같이 임한 천국이다. 그러나 그 미미함은 무시될 수 없는 시작이다. 후에 이것은 크게 자라서 다다를 완성의 시작이기 때문이다.(마 13:31-33) 하나님 통치의 역동적인 힘이 이 악한 세대에 침투하였기 때문에 이는 현실 속에서 영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상황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의 은총이 경험되는 영역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나라를 함께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그 사귐이 완성되기까지 확장되어져야 하는, 여전히 완성을 남겨놓은 천국이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전히 고난과 환란을 겪으며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행 14:22, 살후 1:5, 딤후 4:18)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미래적 영역(마 25:31-46; 막 9:45,7; 막 10:17,30; 고전 6:9-10, 15:42-50; 갈 5:21; 엡 5:5)과 그 시작인 현재적 영역(마 12:28; 눅 16:16, 17:21)이 있음을 보여준다. 성만찬은 곧 parousia와 완성의 모습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자리이다. 그의 고난의 유익, 부활의 결실을 경험하게 되는 현실이지만 그러나 완전한 것을 대망하는 조건적인 상태이다. C. H. Dodd는 이런 이중적 현실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 들어오는 위 기를 끊임없이 재현한다. 성만찬은 결코 이점을 초월하지 않는다. 매번 의 성만찬에서 우리는 거기--그가 배신당한 골고다에, 부활절 빈무덤 앞에, 또 그가 나타난 다락방에,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의 모든 무리와 함께 그가 오시는 순간에 있다.
Edmund Schlink도 이런 이중적 영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이미 여기 지상에서 미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며 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재림 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초림과 재림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바로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자리이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매 실행마다 그 자체를 뛰어넘어 시간의 종언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시하고 있다.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확신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와 성만찬은 두 개의 모순된 현실이 공존하는 장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 형태에서 완전한 통치로 인한 축제와 환의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현실에서는 여전히 그 완성의 도정에서 고난과 고통을 동반하는 과정인 것이다.
C. 슬픔과 경축의 혼재
적어도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나라는 슬픔과 경축이라는 두 가지 혼합된 정서를 여전히 담고 있다. 이미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다가올 완성의 형태로서의 하나님나라가 각각 현실과 대망의 형태로 존재한다. 전자의 하나님나라는 지상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로 비록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기'는 하나 여전히 고통과 절망과 환란이 있는, 그래서 그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며, 엄숙하며 무거울 수도 있는 하나님나라이며 후자의 하나님나라는 완성적 형태로서의 승리와 기쁨, 축제의 영역이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전자의 영역이다.
동방교회의 예전에 보면, 참여자가 지상의 교회에서 하나님나라로 진입하는 순서인 대입장(Entrance)을 거치는 동안 하나님나라가 동일한 공간에서, 차원(dimension)을 달리하여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Schumemann은 이렇게 설명한다.
성만찬중 제단으로 들어가는 '대입장'은 상징적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성례전의 진정한 차원이 드러나고 확립되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행동 이다. 은혜란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은혜속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교 회이다. 또한 은혜는 새로운 존재, 하나님나라, 곧 다가올 세상이다. 집 례자가 제단에 나아가면서 교회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영원히 부르는 찬양을 영창한다...여기서 천사들은 장식이나 영감을 위해 있지 않는다. 그들은 정확히 천국을 위해 서있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나라가 임재하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이점은 종종 동방교회의 예전을 축제적 무드 일색으로 오해케 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앞서서 성만찬예전의 통전적 부분인, 서두에 있는 준비(proskomidia)는 예전의 실제적인 시작이지만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무려 일곱차례의 기도중 그리스도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예배를 시작한다. 더불어 그 시작부분의 종결에서도 죄의 씻음에 참회의 간구를 잊지 않는다. 동방교회의 예전은 회중석에서는 가리워져 있으나 실상은 이 준비(proskomidia)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는 기쁨이면서 인내이다. 축제이면서 슬픔이다. 환희이면서 고통이다. 웃음이 있으면서 눈물이 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하신 그 제자들의 삶속에 여전히 실책에 통곡하고(눅 22:61-62), 좌절감에 어두워지고(눅 24:17), 두려움에 떠는(요 20:19) 현실이 존재한다. 하나님나라를 월권적으로 점하는 어둠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완성을 향해 가는 길에 있는, 하나님나라임을 배반하는 요소들이 혼재하는 이율배반적 현실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세례를 통해서 중생의 외적인 공지를 하였지만 그 중생이후의 삶을 완전한 성화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여전히 오늘이라는 세속적 시간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나라와 세상사이를 자맥질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성만찬을 준비 없이도 자격있는 모습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성만찬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성만찬은 하나님나라에서 맛볼 축제적 식사를 지표하고 미리 맛보게 함에도 불구하고 이 식사에서 사람들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동안 여전히 피할 수 없는 죄성으로 인해 참회와 뉘우침을 표출해야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갱신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성만찬에서의 하나님나라와의 이런 양면적인 특성은 성만찬의 정서와 분위기를 규정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런 전단계 없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쓰디쓴 준비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신학적 균형없이 일방적으로 성만찬을 기쁨과 축제로만 규정하려는 섣부른 질주는 자칫 예배의 온전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내용은 참회와 사죄라는 전단계후 천국을 '미리 맛보는' 통전적 드라마여야 한다. 이것은 마치 구속사를 다시금 재요약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우리가 완전하게 누리게 될, 다가올 하나님나라와 성찬찬에서 미리 맛보아 지는 하나님나라와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축제적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동시에 현실의 한계에서 오는 단속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고통과 어두움의 현실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의 시련의 과정을 겪고난 후에 주어지는 일종의 차후적 결과인 것처럼, 성만찬의 축제적 결말은 참회적 분위기의 전단계를 전제하여야 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예배모델에서 예배의 4중적 구조는, 도입(Entrance), 말씀(Word), 성만찬(Table), 파송(Sending Forth)의 네 장을 설정한다. 이중 도입부분을 위해 일부에선 축제적 분위기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도입부분은 예배의 시작이면서 여전히 하나님나라에 나아가는 준비적 무드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참회의 예식이다. 성만찬은 기쁨으로 종결되기 위해 참회와 고백의 전단계를 겪어야 한다. 이 점은 상호 균형적인 비중을 지녀야 한다.
III. 성만찬에 깃든 두가지 정서의 실제
오늘날 성만찬의 정서에 대한 이해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옮겨간 느낌이다. 이미 진술한 대로 최소한 교회일치적 접촉 이전의 과거의 성만찬은 죽음의 기념에서 오는 엄숙과 우울의 분위기였음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던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안에서 성만찬의 이해는 그에 대한 또 다른 극단으로 전치되어 버렸다. 이것은 종래의 성만찬의 분위기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과 갱신의 노력이 이번엔 또다시 다른 한쪽으로 기울만큼 균형을 잃은 격이 되어버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세계교회들의 에큐메니칼한 합의의 산물인 리마예전(Lima liturgy)도 성만찬의 분위기를 즐거움 일색으로 채워버렸다. 마치 종래의 성만찬 및 그것을 둘러싼 예배의 분위기와는 다른 방향으로의 선회였다. 이들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성만찬의 분위기가 비록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의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축제적인 분위기로 일색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경도는 앞서 논의한 대로 과연 예배의 전체적의 균형에 적절한 것인가를 밝힐 필요를 느끼게 한다. 이제 여기에서는 위와 같은 전이해를 가지고 이와 관련한 상반된 논의들을 비평적으로 고찰하고 실제 예전문서들과 그를 둘러싼 환경적 관행들을 증시적 자료로 살펴보고자 한다.
A. 두개의 상반된 전통에 대한 논의
성만찬의 분위기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정적 분위기에 대한 모종의 규명을 뛰어 넘는다. 이것은 개개 신자들의 영성의 문제와 연관되어진다. 만일 성만찬이 핵심에 들어있는 예배가 축제적인 결말에 앞서서 엄숙과 장중의 준비적 요소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바로 값싼 은혜론에 편승하는 신학의 태(胎)를 제공하는 격이 된다.
요한복음에는 만찬이 유월절 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고 예수를 유월절 기간중도살되는 양으로 제시한다. 다른 복음서들은 모두 만찬이 유월절 식사였다고 보여주고 있다.(막 14:12-25; 마 26:17-29; 눅 22:7-20; 요 13) 이들은 비록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으나 한결같이 유월절 양이 도살되는 니산 14일 오후 혹은 해가 떨어진 니산 15일 전야에 양을 희생으로 잡아 유월절을 기념하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죽으심을 상징하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점은 바울의 고린도 전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굳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때 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도록 당부하고 있다.(고전 11:23-26)
이점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여기 복음서에 나오는 성만찬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쉽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의 범주와 바울이 세운 교회들의 전통이 구분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친교(haburoth)의 식사로 보고 성만찬중에 오실 주님을 대망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마셨다는, 그래서 축제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고 그에 비해 후자는 바울계 교회들이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이었기에 그 분위기가 엄숙하고 장중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중의 축제적인 성격만이 보다 초대교회적인 성만찬의 성격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 이점은 오늘날 에큐메니칼한 성만찬 이해에서 대종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선 두가지 이유에서 재검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바울계 교회들의 실행과 예루살렘 교회들의 실행사이를 이원화 한다는 것이 타당치 않다는 점이다. 바울이 이방을 향한 선교에 주력했다는 오늘의 통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적인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우며(행 22:3; 23:6) 유대는 그의 끊임없는 목회의 관심이었다(롬 9:1-3). 더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만난 예수는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는 '죽으심'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활의 영광이 휘황하여 바울을 실명케 한 모습이었다.(행 9:1-9) 둘째는, 어린양이 도살되는 유월절의 상황에서 그의 죽으심을 연상케하는 만찬기사를 담은 마가와 마태복음의 전통이 곧바로 축제적인 전통에 분류될 수 있다고 하는 점이 납득되기 어려운 점이다. 예수께서는 다가올 그의 죽으심을 예견하시면서 함께 나누는 떡과 잔이 당신의 희생의 상징인 살과 피임을, 그리고 새로운 언약의 표징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만찬에는 사실상 이 두 가지 정서, 즉 죽음의 기념과 부활의 기쁨이 병재하고 있었다는 점에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성만찬이란 어떤 고정된 정서를 담으려하기 보다는 성만찬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가 시행되는 그 배경이 어떠하였느냐에 따라서 성만찬은 그 정서가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B. 성만찬예전의 실제
초기 예전의 모습은 성만찬이 중심에 있었던 까닭에 여기서 성만찬예전이라는 말은 곧 예전을 통털어 일컫는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내용을 살피면서 다루게 될 것은 예전안에 있는 각각의 순서들과 또 필요하다면 그 순서들 중의 어떤 부분의 내용들, 곧 순서를 이루는 구성요소의 종류나 성만찬 기도, 지문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들은 곧 성만찬 예식의 정서를 반영하는 종합적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성경외의 문서들 중에서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Didache문서는 성경과 동시대적인 배경을 갖는다. 이 문서에서 성만찬 기도로 보여지는 부분의 전체 분위기는 주로 떡과 잔에 대한 감사이다. 그런데 한군데 유념해야 할 것은 자세한 내용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감사기도--성만찬기도로 추정되는--를 마친 후 10장 6절에서 "거룩한 자는 나오게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회개케 하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성만찬이 단순한 축제적 분위기로만 일색됬다고 보기는 어려운 근거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내용은 14장 1절에서 매주일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먼저 죄를 고백하라'는 내용을 잊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만찬기도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예식이 충분히 발전한 모습은 아닌 상태였기 때문에 고정된 참회문이 들어있지 않을 뿐, 성만찬의 참회적, 준비적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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