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캐나다에 갔을 때였다. 친분이 두터운 전 선생이 자기 동생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의 동생이 캐나다에 이민 왔을 무렵이었다. 캐나다에서는 기술자가 되어야 직장도 쉬 구할 수 있고 빠른 기간에 정착할 수 있다. 내가 친구인 캐나다 사장에게 취업을 부탁했다. 그리 크지 않은 자동차 정비 공장이었다. 전 선생 아우에겐 “처음에는 기술습득 기간이 있고 적당한 때에 정식직원으로 대우해 줄 것이니 최선을 다해 보라”고 당부했다.
직장을 통해 사회 공동체 기여
일의 가치는 스스로 찾아가야
정치성 노조활동 돌아볼 필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존중을
캐나다 정비공장서 인정받은 청년
그림=김지윤 기자
형의 소개를 받아 직장을 찾은 전군은 6개월 정도 훈련을 쌓고 계약직이 되기로 약속받았다. 그는 취업 10여일 후부터 다른 동료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청소와 작업 준비를 하고, 퇴근 후에도 한 시간씩 남아 잔업을 정리했다. 6개월 후에는 유급 직원이 되었다. 그래도 하루 2시간씩 계속 남아 일했다. 주인에게는 영어도 부족하고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그대로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주인이 전군에게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내가 감사한 마음으로 선물을 하나 주겠다”라고 했다. 전군은 작업복이나 한 벌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주인이 타던 자동차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전군은 그렇게 큰 선물은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주인은 캐나다에서는 선물을 거절하는 일은 없으니까 받으라고 했다. 형과 상의한 전군이 주인에게 “나는 아직 그렇게 좋은 차를 탈 수 없으니까 그간 다닌 교회 목사님에게 그 차를 드리고, 목사님의 작은 차와 바꿔도 괜찮겠냐”며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해서 정규기술자 대우도 받게 되었다.
전군 형의 얘기다. 얼마 전에 그 사장이 찾아와 “작은 정비소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당신이 반(半) 투자하고 동생에게 실무를 맡기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해 왔다는 것이다. 그 사장은 캐나다 직원보다 전군의 마음씨와 성실한 노력을 믿은 것이다.
나는 요사이 기업체나 회사의 초청을 받아도 전군 경우 같은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1970년대까지는 내 얘기가 받아들여졌으나, 노조 운동이 정착되면서 이제는 낡아 빠진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전군 얘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다. 영국 연방국가인 캐나다는 가장 먼저 노조 운동이 일어난 나라다. 심한 노사갈등도 겪었다. 그럼에도 노조 측에서 보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전군 같은 얘기가 통한다. 또 국민 다수가 이를 인정한다. 예컨대 영국·캐나다는 물론 많은 국가가 영국 대처 총리의 노조개혁이 영국 경제를 다시 일으켰다고 부러워한다. 30년쯤 지나면 우리도 전군과 같은 사례를 수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노동운동도 국가를 생각해야
우리나라에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때였다. 내 제자인 박영식 교수가 연세대 총장이 되었다. 새로 뽑힌 노조 조합장이 150개가 넘는 요청사항을 들고 왔다. 박 총장의 고백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나 이 요구사항을 다 검토할 시간이 없으니까, 전국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대학의 사례를 알려주면 그보다 더 잘해주겠다”라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거짓말같이 들릴 것이다. 이화여대에서도 신생 노동조합의 요청이 110여 개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민노총의 핵심 조합원은 삼성 본사에 진입해 노조 설립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런 노동운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문재인 정부 때였을 것 같다. 문 정권의 두 세력이 민주노총과 전교조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우리는 노조 활동을 거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 운동이 있어 과거의 잘못이 비판받고 개선되며 역사적 발전도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이 함께 믿고 따라야 할 규범도 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을 빌린다면 ‘선의의 공동체 의식’이다. 윤리적 가치이며 정의로운 방법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와 같은 정치적 목적과 이념을 위한 경제 규범이나 노동운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 전체의 목적과 방향을 배제한 정권 운동이나 노조가 소속된 조직체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허용될 수 있다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노사의 조화로운 협력이 필요하다. 국가 경제를 육성·발전시키는 의무마저 포기할 권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노조도 사회의 부분 조직이다. 전체 국민을 위한 협력체다. 국가 전체나 윤리 가치에 위배되는 행위는 곤란하다. 자칫 정신적 질서파괴까지 연결될 수 없다.
일의 다양성이 사회발전의 원천
따져보면 노동자 아닌 국민은 없다. 일의 다양성이 사회진보의 원천이고 원동력이다. 일의 가치는 개인이나 이해집단이 결정하지 않는다. 사회가 평가 규정한다. 내가 하는 신체적 일이 노동이고, 정신적 가치와 문화 운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최저임금이나 근무시간 규정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우선이다. 삶의 가치는 임금이나 시간의 길고 짧음에 달려 있지 않다. 모두가 스스로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추구하고 서로 공존하면서 협력하는 것이 최선의 의무이며 방법이다.
나도 100년의 인생을 살아보았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린다. 애사심을 요청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로서의 직장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는 원칙을 저버려선 안 된다. 이기적인 삶은 불행을 자초하며 폐쇄적인 이기집단은 사회적 불행을 더해 줄 뿐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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