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과부였지만 모범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던 백선행(1848∼1933)은 나눔을 적극 실천했습니다. 사재를 털어 교회당과 학교를 세웠으며, 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1908년 다리가 없어서 주민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보고 평안남도 대동군에 백선교를 세웠습니다. 1923∼1924년 조만식 장로의 자문을 받아 광성학교 창덕학교 숭인상업학교에 후원금을 기부했습니다.
땅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평양 숭현학교에 토지 2만6000평을 기부했습니다. 그가 평생 사회에 기부한 돈은 현재 가치로 316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과부 대신 ‘선행(善行)’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란 써야 돈값을 한다. 쓰지 않는 돈을 모아서 무엇에 쓰려는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돈 한 푼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선행의 장례식은 한국 여성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장례식에는 1만여명이 운집해 한 과부의 죽음을 추모했습니다. 300개의 화환과 만장이 들어선 장례행렬은 2㎞나 됐습니다. 평양시민의 3분의 2인 10만명이 거리로 나와 장례를 지켜봤습니다.
열여섯에 과부가 된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어머니로 섬기는 청년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자본가이자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2006년 7월 평양에는 그녀의 기념비가 복원됐다고 합니다.
글=박성규 목사(부산 부전교회), 삽화=이영은 기자
땅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평양 숭현학교에 토지 2만6000평을 기부했습니다. 그가 평생 사회에 기부한 돈은 현재 가치로 316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과부 대신 ‘선행(善行)’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란 써야 돈값을 한다. 쓰지 않는 돈을 모아서 무엇에 쓰려는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돈 한 푼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선행의 장례식은 한국 여성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장례식에는 1만여명이 운집해 한 과부의 죽음을 추모했습니다. 300개의 화환과 만장이 들어선 장례행렬은 2㎞나 됐습니다. 평양시민의 3분의 2인 10만명이 거리로 나와 장례를 지켜봤습니다.
열여섯에 과부가 된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어머니로 섬기는 청년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자본가이자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2006년 7월 평양에는 그녀의 기념비가 복원됐다고 합니다.
글=박성규 목사(부산 부전교회), 삽화=이영은 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92620&code=23111512&sid1=fai
-국민일보 겨자씨, 20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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