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행복과 희망

우리, 심플하게 삽시다!

하마사 2016. 10. 7. 14:41

접대·청탁으로 얼룩진 관계 대신 소박한 합리성 강제하는 김영란법
남들과 마시며 인생 낭비 말고 '저녁 있는 삶' 복원을
이제는 심플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 일상이 바뀌어야 자유 찾아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2005년 온 나라를 뒤흔든 과학 스캔들의 주인공 황우석 당시 서울대 교수는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유명했다. 휴일도 없이 연구만 한다는 것이다.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 논문이 사이언스에 실린 이래 그는 과학 영웅이 되었다. 황우석이 한국인 최초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되길 바라는 사회적 열기가 끓어올랐다. 결국 모든 것이 사기극으로 드러났지만 후일담이 흥미롭다. 전성기의 황우석은 곳곳의 경조사 자리나 각종 행사에 너무 자주 눈에 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네 사회생활의 기본이 경조사일진대 그런 관습에 충실한 태도는 개인적 미덕이지만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과학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예컨대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 교수는 50년간 한우물을 팠다. 세포 내 노폐물을 청소하는 오토파지(자가포식·自家捕食) 연구에 1970년대 중반부터 반세기 동안 전념했다. 학문은 그런 것이다. 황우석을 몰락으로 이끈 과학 사기극은 차치하고라도 여기저기 눈도장 찍기 바쁜 한국적 처세의 달인이 세계적 과학자가 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전혀 없었다.

김영란법이 근원적으로 겨냥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형님·동생이 수만명'이라 자랑하는 마당발이 사회적 능력과 동일시되는 세태를 통타(痛打)한다.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부정 청탁이 객관적 절차를 압도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음을 고발하는 문명사적 경종(警鐘)이다. 물론 김영란법엔 문제가 적지 않다. 관료 사회의 복지부동을 고착시킬 수 있다. 힘 있는 자들의 음험한 내부 거래를 직격(直擊)하기보다 서민들 일상의 작은 정(情)을 규제한다는 지적이 날카롭다. 농·축산업과 화훼산업 등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언론 자유와 지식 활동을 위축시키며 전 국민을 잠재적 범법자로 만드는 과잉 입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김영란법에 대한 이 모든 비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김영란법이 가져올 창대한 변화는 부작용을 훨씬 능가한다. 절대다수의 시민이 김영란법을 지지하는 현실을 감성적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하는 논리는 고언(苦言)으로 포장한 기득권자들의 교언(巧言)이다. '자기 밥값은 자기가 내자'는 목소리야말로 힘 있는 자들의 갑질에 질린 민심의 실존적 절규이기 때문이다. 불공정과 부패의 관행을 깨트려야 한국 사회가 전진할 수 있다는 길고 긴 자기 학습의 난산(難産) 끝에 태어난 옥동자가 김영란법이다. 김영란법은 동시대 한국 시민 모두가 동참한 실천 지성의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법은 만능이 아니다. 법의 보편 타당성은 '우리를 자유롭도록 강제하는' 데서 비롯되므로 시민적 동의만이 법의 강제력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실정법보다 근본적인 것이 생활 현장의 공감대다. 2004년의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오히려 불법 성매매 확산으로 이어진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김영란법이 삶의 현장에 뿌리내릴 수 있을지, 아니면 거대한 위선의 도가니로 전락해 사문화(死文化)될지 여부는 공권력이 아니라 시민 손에 달렸다. 김영란법 시행 첫 주의 엄숙한 풍경은 사회적 마당발이 득세하는 한국적 처세술의 종언을 말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김영란법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다.

김영란법을 착근시키는 근본 방법은 우리가 담백하게 사는 데 있다. 부정한 청탁과 대접은 하지도 받지도 않는 일상의 실천에 김영란법의 성패(成敗)가 달렸다. 여러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이미 질박한 삶을 살고 있는 터에 무슨 희생을 더 요구하는가라는 항변이 나올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조차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마땅하다. 400만명의 공직자·언론인·교직원뿐 아니라 거의 전 국민이 관련되는 일체의 부정 청탁을 삼가는 태도는 생활상의 막대한 불편을 야기할 게 분명하다. 우리가 일상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지 않는 한 김영란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김영란법은 질척질척한 접대와 청탁으로 얼룩진 인간관계 대신 소박한 합리성의 삶을 권장하고 강제한다.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일이 불가피하다면 얼굴을 찡그리느니 즐기는 게 지혜롭다. 남들과 먹고 마시는 데 인생을 낭비하는 대신 '저녁이 있는 삶'을 복원해야 한다. 저녁과 주말을 되찾는 건 잃어버린 자신(自身)을 되찾는 일이다. 담백한 생활만이 자유를 선사한다. 김영란법과 함께 심플하게 살아야만 하는 시대가 드디어 왔다. 일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조선일보, 2016/10/7